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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란다 고양이 Sep 08. 2023

미련한 인간이 되었다

플렉스 하지 않는 나는 미련한 인간이다

'젊을 때 해외여행도 좀 가보고 그래야지 미련하게...'


나는 또래에 비해 확연히 해외여행 경험이 적다. 나보다 12살이나 나이가 많은 언니가 보내 준 오사카 여행 한 번. 그것이 나의 해외여행 경험의 전부이다. 제주도도 26살 겨울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가 보았다.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엔트리급 명품 하나 없고, 오마카세 같은 것은 누가 사 줄 때나 먹는 것이었다.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어울리는 것이겠거니 하며 사는 나에게 돌아오는 말은 미련한 인간이라는 호칭이었다.


미련하다

형용사  

1.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릴 정도로 매우 어리석고 둔하다. 

    그 미련하게 생긴 몸뚱이를 괜히 어정어정 밀고 다니는 꼬락서니가 보기에 딱했다.


미련하다. 나는 그저 생겨먹은 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리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고집이라면 고집일까. 그냥 굳이 필요성을 못 느껴서 하지 않았던 일들인데 SNS를 보고 있자면 이 모든 '플렉스'하는 일들이 젊은이라면 해야 하는 소양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사실 내 소비 생활 일정 부분 외골수 기질로 인한 고집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언제나 남들이 하라 그러면 하기 싫고 하지 말아라 하면 꼭 하고야 마는 그런 청개구리 같은 인간이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내가 미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미련한 인간이 자신은 미련하지 않다고 되지도 않는 고집을 부리는 글이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자란 탓일까. 나는 열심히 벌고 적게 쓰며 돈을 모으는 것을 일종의 유희 활동으로 느낀다. 통장에 돈이 모이면 기쁘고 생각만큼 모으지 못했으면 불안하다. 곱씹어보면 불안함을 피하기 위해서 돈을 모으는 것도 있다. 미래에 얼마를 모을 수 있을지, 또 얼마를 굴릴 수 있을지 생각하다 보면 쉬이 안정적인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큰돈을 지출하는 것이 어색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내가 소비 지출을 크게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딱히 욕구랄 게 크게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지거나 누린다라는 감정에 욕심이 없다. 그냥 평범하게 지나가는 일상도 문제없이 행복하고 굳이 어떤 것을 꼭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도 잘 들지 않는다. 아마 누군가는 나의 무미건조하고 싱거운 삶을 보며 여기저기 조미료를 들고 와 간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쌀밥도 꼭꼭 씹어 먹다 보면 특유의 단맛이 배어 나온다. 내 생활도 그렇다. 지루해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은은한 맛이 있다. 


특히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는 점이 나의 인생을 더욱 싱겁게 보이도록 하는 것 같다. 보통 여행 스타일을 나눈다고 한다면 관광파와 휴양파로 나뉜다는데, 나는 극단적 휴양파를 넘어 이럴 거면 굳이 가야 하나 파이다. 여행을 가야 한다면 무조건 휴양을 선택하겠지만 여행을 가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있다면 여행을 가지 않을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것에는 아주 다양하고도 복잡한 이유가 있지만 이 부분은 따로 글을 내어 이야기해야겠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여행 경비로 들어가는 돈도 아끼게 된다. 휴가를 떠나지 않은 여름휴가에는 집 안에서 나만의 소소한 휴가를 즐긴다. 읽고 싶은 책과 좋아하는 간식을 한 가득히 쌓아두고 여름 분위기를 물씬 내는 음악을 틀어두면 그곳이 바로 지상 낙원이 된다. 물론 이 책과 간식들도 중고 서점과 쿠팡 할인을 통해 산 최고의 갓성비 제품들이다.


중고 서점은 내가 정말 사랑하는 공간 중 하나이다.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책을 소비하는 나로서는 매번 나가게 되는 그 책값을 감당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중고서점에서 좋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보물 같은 책들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찾아 읽는 일이 생활의 낙이 되었다. 거의 온전하게 본인이 원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중고 서적들도 좋지만 때로는 세월의 흐름이 장마다 묻어있는 사람 냄새나는 책들이 끌리는 날도 있다. 물론 세월의 흐름만큼 책들의 가격이 더 저렴한 것도 있다. 수많은 손때 묻은 책들 속에서 나의 운명의 짝을 찾는 기분은 소위말해 째진다라고 표현할만하다.


옷도 마찬가지이다. 평소에 옷을 사고 싶다는 생각을 거의 안 하지만, 나의 미니멀한 옷장이 텅텅 비어갈 때면 언제나 찾는 곳이 있다. 바로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이다. 고터 지하상가는 내가 가장 애정하는 쇼핑 장소이다. 쉬이 말해 온갖 보세 옷들이 넘쳐나는 곳에서 나에게 딱 맞는 좋은 옷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가격이 저렴하면 옷의 재질이 너무 떨어지고, 좋아 보이는 옷들은 생각지도 못한 가격표를 받아 들게 되는 일들이 생긴다. 그럼에도 나의 발품은 언제나 놀랄만한 성과를 낸다. 밀려드는 옷의 파도들 사이에서 싸고도 마음에 쏙 드는 옷을 발견하면 무엇인가 성취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곤 집에 돌아와 새로 산 옷들을 입어보고, 역시 사람이 명품이라 뭘 입어도 잘 어울리는군 하며 자아도취를 한 번 하면 그날 하루가 완벽해지는 것이다.


소비를 줄이는 싱거운 삶에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작은 것 하나에도 온갖 곳에서 가격을 비교하는 수고로움이 필요하고, 세상의 모든 마케팅과 광고들의 유혹을 뿌리치는 줏대가 필요하다. 사실 개인적 경험으로는 마케팅과 광고에는 그저 흐린 눈을 하고 세상 만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인양 초연하게 행동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대응방식이었다. 때로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마음가짐이 현대 사회에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이런 나의 삶의 방식이 좋다. 남들 하는 것을 따라 하지 못할지라도 나만 할 수 있는 경험들을 하고, 화려하진 않을지라도 보기에 딱 좋을 정도로 어울리게 사는 것. 그래서 내가 진정 아끼지 않아도 될 곳이 나타났을 때에 흔쾌히 모아둔 돈을 쓰게 하는 것. 그것이 내 인생에 남몰래 숨겨둔 단맛이다.


'그 돈 모아서 집 사겠니?' 하며 반문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답 할 것이다. '집은 못 사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내 싱겁고 노곤한 삶은 미련한 것이 아니라 길거리의 들꽃만치 작고도 행복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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