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를 묻다

by 유채운

최적화된 풍요

1. 탈물질화

앤드루 맥아피는 『포스트 피크』 에서 ‘탈물질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행성, 지구를 더 가볍게 딛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산업 문명이 지구 한계와 충돌하고 있는 절박한 순간 앞에서, 앤드루 맥아피의 주장은 순진함을 넘어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개인적으로 ‘인류세는 계몽주의의 극한이다’ 라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고 얻을 수 있다는 가정된 전제가 지금의 기후재앙을 불러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후술하겠지만, 앤드루 맥아피가 주장하는 바의 근거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은 기본적으로 비용 절감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용 절감을 위한 노력이 자원은 덜 쓰면서도 높은 효율성을 이끌어내는 제조법, 즉 탈물질화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탈물질화는 ‘지구를 더 가볍게 딛는’ 새로운 형태의 산업 문명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스벨은 그 뒤로 ‘물질화인가 탈물질화인가?’라는 문제를 계속 연구해왔다. 그가 2015년에 쓴 글의 제목 <자연의 귀환 : 기술은 어떻게 환경을 해방시키는가>는 그의 답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오스벨은 미국인들이 1인당 자원을 점점 덜 소비할 뿐 아니라, 철강, 구리, 비료, 목재, 종이 등 경제의 가장 중요한 기본 요소들 중 일부에서도–총량을 볼 때-소비를 덜하고 있다는 증거를 꽤 많이 얻었다. 미국에서 이 모든 자원들의 연간 총소비량은 지구의 날 행사가 열릴 즈음까지는 빠르게 증가했다. 그러나 그 뒤에 소비는 정점에 달했다가 감소해왔다.”

앤드루 맥아피는 산업 문명을 회의하는 이들에 정면으로 맞섭니다. 회의론자들의 일반적인 시각에 반하는 여러 지표와 수치를 무기로 그는 두 가지를 겨냥합니다. 우선은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만 증가하기에, 인류의 성장과 공동체의 크기가 필연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맬서스의 『인구론』입니다. 앤드루 맥아피에 따르면 『인구론』 의 주장은 산업혁명의 초기까지만 유효했던 진술입니다. 그레고리 클라크의 연구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나오기 전 6세기 동안 영국인들이 처했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연구를 종합하면, 땅에서 이용 가능한 자원, 특히 식량 생산의 본질적인 한계 때문에 인구가 적으면서 번영을 누리는 상태와 인구가 많으면서 가난한 상태의 반복이 1200년 이래 수백 년간 지속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번영을 이루고 인구수가 늘어나도, 식량 생산의 근본적인 한계로 인해 한순간에 궁핍이 닥쳐 모든 것을 바닥으로 끌어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레고리 클라크는 자신의 연구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우리는 1200~1800년까지 600년 동안 산업화 이전 사회에 관한 맬서스 모델의 기본 원리 중 하나가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후속 연구들은 같은 기간에 유럽의 전역에서 이러한 맬서스적 진동이 나타났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776년 제임스 와트에 의해 세상에 등장한 독특한 기계, 즉 증기기관으로 인해서 이 경향성은 뒤집힙니다. 증기기관은 광물이나 동물의 뼈와 배설물을 비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증기력을 이용하며 산업 시대의 비료의 양이 극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영국의 농민들은 이를 기반으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식량 생산량이 늘어나며 인구도 자연스럽게 증가합니다. 여기에 제조업과 광업에서 우위를 확보하면서 획득한 부를 방역과 영양 개선에 사용함으로써 안정적인 양적 팽창이 가능해집니다. 거기에 연이어 등장한 내연기관, 전기, 실내 배관, 비료 혁신의 결과로 전례 없이 풍요로운 산업 문명의 꼴이 드디어 완성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풍요가 가능했던 것은 유한한 지구의 자원을 끝없이 착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주지하고 있다시피 전대미문의 기후재앙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액드류 맥아피의 두 번째 과녁은 바로 제번스입니다. 윌리엄 제번스는 ‘제본스의 역설’을 이야기한 경제학자입니다. 제번스는 1865년 『석탄 문제』에서 당시 영국의 성장 속도와 소비량으로 봤을 때 유한한 자원인 석탄은 100년 이내에 고갈될 것이고, 영원할 것 같은 풍요도 석탄이 바닥남과 동시에 자연히 멈출 것이라는 우울한 예측을 내놓습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석탄의 고갈을 막거나 늦추기 위해 추진 중인 증기기관의 효율 개선도 단순히 석탄 자원을 덜 쓰면서 동일한 양의 증기력을 얻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생산물은 가격이 내려가면 수요가 증가하는데, 마찬가지로 증기기관의 개선된 효율은 더 많은 제품을 더 많이 소비하는 상황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황은 증기기관이 에너지 효율을 개선하기 이전과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미국 지질조사국에서 내놓은 ‘광물 자원의 조사’는 제번스의 예측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광물 자원의 조사’는 1900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의 산업에서 중요한 5대 금속의 연간 총소비량을 보여줍니다. 알류미늄, 니켈, 구리, 철강, 금은 모두 소비량이 2000년 이후에 급감합니다. 놀라운 것은 2000년 이후 줄어들고 있는 자원 소비량에 비하여 경제 성장률은 계속해서 지속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경향성은 비료의 투입과 식량 산출량부터 목재와 종이, 플라스틱, 화석연료와 같은 원자재와 소비재, 에너지 사용량과 배출량에 있어서 모두 동일합니다. 액드루 맥아피는 혁신과 신기술에 힘입어서 경제성장과 자원 소비량이 분리되어가는 추세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따라서 서로 경쟁하는 미국 농민들은 땅, 물, 비료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매우 애쓴다. 맥주와 청량음료 기업은 알루미늄 구매량을 최소화하려 애쓴다. 자석과 첨단 기기 생산 업체들은 희토류 가격이 치솟기 시작하자마자 희토류 구입량을 줄였다.” 경쟁에 시달리는 기업들이 제품 생산에 필요한 지출을 줄임으로써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익을 짜내려는 동기가 탈물질화를 자극합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설명하면, 자본주의가 진보와 성장을 지속가능 하도록 담보하면서도 이전과는 달리 환경까지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노기술’을 통해 탈물질화의 징후와 전망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에릭 드렉슬러는 『급진적 풍요』에서 나노기술의 핵심적인 특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 ‘나노 크기의 장치’에 기초한 기계를 이용해서 물건을 제조한다는 점, 그리고 ‘원자 수준의 정밀성’을 갖춘 제품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나노기술, 즉 원자정밀제조(APM)는 비용과 생산 범위, 제품의 성능이 기존 산업의 생산 법칙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에릭 드렉슬러는 나노기술 기반의 생산 방식을 다양한 크기의 모터, 기어, 컨베이어 벨트, 그 밖의 특화된 부품이 들어있는 장치가 구비된 ‘상자 안에 집어넣은 공장’으로 이해하길 요청합니다. 분자 수준에서 이뤄지는 나노기술은 저비용 생산이 가능하고, 축적비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극도로 높은 생산성을 산출합니다. 더 강하고 가벼운 구조물에서 시작해, 효율적인 엔진, 높은 안정성, 감축된 배기가스, 증가한 연산 능력을 가진 제품의 제작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를 말미암아 극도로 가벼운 항공기 소재에서부터 빌리언코어(코어 수가 10억 개) 노트북 컴퓨터, 암세포를 발견하고 파괴할 수 있는 장치를 포함한 의료용 미소 장치 등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나노기술은 철과 크로뮴, 납과 주석 같은 유한한 지구의 자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탄소, 질소, 산소, 규소 등 기존의 산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면서도 지상에서는 아무리 갖다 써도 마르지 않는 무한한 재료를 이용하여 제품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산업 문명과 지구 한계의 충돌 앞에 선 인류의 과제는 명확합니다. 물질 자원을 보존하기, 풍부한 에너지와 물과 식량을 공급하기, 빈곤을 줄이고 삶의 질을 높이기, 생태계에 가해지는 압력을 줄이기, 유해 화학물질 방출 줄이기, 온실가스 방출 줄이기. 에릭 드렉슬러는 나노기술을 통해 산업 문명과 지구 한계의 충돌을 완화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자원 소비와 유독 물질 배출을 줄이고, 저비용 태양에너지 사용과 탄소 중립 경제를 위한 하부구조를 건설함으로써(그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수준의 비용으로 이미 대기에 방출된 이산화탄소를 제거할 방법을 마련해줌으로써)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앞서 나노기술 기반의 생산 방식은 지구에 부담을 가하지 않는 원재료와 에너지를 사용하며, 낭비가 제로에 가깝다고 설명 했습니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첨단 제품을 비롯한 온갖 제품이 멀리 떨어진 산업 시설에서 생산되어 공급망을 통해 전달되는 대신 소형의 심지어 탁상용 기계로 생산되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거대한 규모의 자동차 공장과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생산 장비 대신 차고만 한 시설에서, 분 단위로 측정되는 생산 시간 속에서, 저렴한 작은 부품들을 조립하는 방식으로 자동차가 만들어지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나노기술은 현재보다 훨씬 더 나은 성능의 태양광발전 장치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에너지의 저장과 이동에 있어서 높은 효율성도 담보합니다. 자연에 막대한 부담을 가하던 기존의 농업을 대신하여, 척박한 환경에서도 자연환경의 영향을 통제하여 안정적으로 건강한 농산물을 재배하는 ‘폐쇄 환경 농업’을 실현할 수도 있습니다. 대기 중의 탄소를 포집하는 기술도 가능합니다. 효과적인 태양광 발전과 저장/운송 기술, 폐쇄 환경 농업과 이산화탄소 포집 기술은 모두 나노기술의 발전에 의해서 최적화된 수행이 가능해집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인류가 지구에 가하던 부담은 자연스럽게 감소합니다. 나노기술에 기반한 산업이 더욱 발전한다면 지구의 자원을 끝없이 착취하며 유독 물질과 배기가스를 무책임하게 방출하던 기존의 산업 방식을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탈희소성

바이런 리스는 『제 4의 시대』에서 로봇과 AI의 발전이 오랜 시간 인류를 괴롭혔던 빈곤, 질병, 전쟁의 종식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기계적 두뇌 장치의 개발은 식량의 가격을 낮추고, 생산성을 높이고, 질병에 대한 관리를 손쉽게 만들고, 우주의 도처에 존재하는 제한 없는 에너지에 접근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이런 리스에게 있어서 인류의 진보는 기술의 진보로 인해서 가능해졌습니다. 불을 이용해 조리한 음식을 먹은 덕분에 소화가 쉬워지면서 두뇌의 능력이 향상되었고, 글을 쓰면서 정보의 저장과 전파가 수월해졌으며, 바퀴를 이용했기 때문에 전 세계를 빠르게 누빌 수 있게 되었습니다. AI와 로봇은 인류가 경험한 기술 발전의 연장선일 뿐입니다. 불, 글, 바퀴의 개발로 말미암아 인류가 질적으로 다른 번영을 일구게 된 것처럼, AI와 로봇 기술의 발전은 자원의 희소성을 종식 시키며 전례 없는 풍요를 선사할 것입니다. “기술이 인간의 노동력을 배가시키면서 번영이 반복해서 증대할 것이다.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주 적게 가진 사람들조차 풍요를 누리는 세계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기술을 이용해 순수하게 기술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질병을 없애고, 청정 에너지를 충분히 만들고, 인류 전체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와 맞붙을 것이다. ”

아론 바스타니의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를 보면 희소성의 종말이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디지털화와 정보화 등 기술혁신에 의한 ‘탈희소성’의 범위는 노동, 에너지, 자원, 수명, 음식 등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하부 기반의 거의 모든 부분에 해당합니다. 인간의 노동을 자동화된 기계가 대체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재생에너지를 사용한 에너지의 희소성 해소, 달과 소행성 채굴을 통한 무한한 자원의 이용, 생명공학의 발전에 의한 수명의 증진과 질병의 완벽한 개선, 농업 혁명과 대체육에 의한 깨끗하고 건강하고 풍요로운 식생활을 가능하게 합니다. 탈희소성의 시대에 임하여 비로소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공산주의, 즉 노동과 여가가 하나가 되고 우리의 본성이 놀이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개발되는 풍요의 상태가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희소성이 제거된 세계에서는 기존의 환경운동의 메인 테마였던 ‘작은 것이 아름답다’ 같은 구호가 공허해집니다. 정보화, 재생에너지, 마르지 않는 새로운 자원의 이용이 추동하는 무한 공급 성향을 이용해 “백만장자처럼 호사를 누려 삶의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변혁에 걸맞는 정치가 없다면 기술 발전이 가져올 이익은 소수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위험은 분명 존재 하지만, 인류가 합심해 역사적 전환점을 만들어낼 이 기회를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아론 바스타니는 이야기합니다.

질문하는 비관

과연 탈물질화와 탈희소성이 우리를 ‘급진적 풍요’로 인도할 수 있을까요? ‘무어의 법칙’에 의해서 트랜지스터의 성능이 여전히 18개월마다 2배씩 성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이를 첨단 기술 전반에 확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밋빛 미래를 논하기에는 아직 성급한 것 같습니다. 인류가 경험한 시간에 비춰보면, 첨단 기술의 발전이 약속하는 풍요로운 미래에 대해 몇 가지 의문과 질문이 따라붙게 됩니다.

1. 자살과 동물화

에밀 뒤르켐에게 있어서 사회는 결속과 연대의 공간입니다. 결속과 연대가 약해진다면 사회는 병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밀 뒤르켐은 유럽에서 자살을 비롯해 정신적 이상과 우울 같은 개인들의 고립, 고독, 무규범에 의한 ‘아노미’ 현상이 세대를 거듭하여 대두하는 것을 사회가 병들어가고 있는 증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자살론』은 명백하게 현대성과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막스 베버는 근대화 과정의 핵심을 정치, 경제, 행정 같은 인간의 행위 영역에서 “목적 합리적 행위의 수가 증대”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에밀 뒤르켐은 신으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주체와 합리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목적 합리적 행위의 바탕, 즉 현대성과 계몽주의를 사회의 결속과 연대를 약화시키며 집합적 병리 현상을 증가시키는 원인으로 규명한 것입니다. 중세적 규범을 극복한 개인의 극단적 원자화 속에서 인간들은 의미와 방향을 잃고 부유합니다. 개인은 삶에 대한 절대적인 결정권을 가진다는 전제는 결국 자살의 권리까지도 허용하는 방향으로 심화 됩니다. 그 끝 없는 아노미의 결말은 결국 자살입니다. 에밀 뒤르켐의 자살에 관한 연구는, AI 알고리즘에 의해 노동과 일상이 자동화된 세계에서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뚜렷이 상기시킵니다.

스가쓰케 마사노부는 『동물과 기계에서 벗어나』에서 빅데이터 알고리즘에 의한 ‘동물화’와 ‘기계화’를 우려합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인간과 기계의 일체화는, 한편 인간의 동물화를 초래한다. 개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결단해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기계가 알려주는 정보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일상사가 빈틈없이 굴러가는 현실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AI의 방대한 추천 정보에 ‘나는 따른다, 고로 존재한다’ 상태가 된 것이다 (…) 특히 노동 분야에서 다양한 알력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각 분야에서 진행될 노동시간의 극단적 단축이 ‘인생 100세 시대’와 겹치면서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즉 AI가 인간의 지성을 능가하는 싱귤래리티는 도래하지 않지만, 1930년 케인스의 예측처럼 “여유가 충분한 풍요의 시대가 도래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남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걱정”하게 되는 시대가 오는 건 아닐지?” AI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직업이 대체되는 일은 급속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인간은 여태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노동하는데 할애했습니다. 그리고 여가 시간이란 다시 그 노동 현장에 투입되기 위해 기력을 보충하는 시간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노동과 여가의 의미가 뒤바뀌며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풍요 속에 내던져진 인간은, 남아도는 시간과 여유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무의미와 본능적 쾌락의 영역 속으로 깊이 빠져버릴 공산이 큽니다. 에밀 뒤르켐이 현대성과 계몽주의가 인간을 자살로 내몰고 있다고 우려한 것, 스가쓰케 마사노부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쓴 아즈마 히로키를 인터뷰하면서 ‘패스트푸드화된 소비재를 동물처럼 먹어야 하는 현실’이 도래했음을 포착한 것을 보면 우리는 동물화와 기계화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한시라도 빨리 세워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2. 불평등

불평등 문제는 자살과 동물화의 위험과 연동해서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불평등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의 그래프를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브랑코 밀라노비치가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에서 제시한 ‘코끼리 곡선’입니다. 이 그래프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세계화가 진행되는 동안 전 세계 각 소득 계층의 소득 증가율이 어떤 경향을 나타내는지를 보여줍니다. 리처드 볼드윈이 『그레이트 컨버젼스』에서 ‘대수렴’으로 지칭하기도 하는 세계화의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저개발 국가로 생산 수단을 아웃 소싱하는 ‘오프 쇼어링’을 통해 북반구가 주도하는 세계 경제권에 뒤늦게 편입된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이 눈부신 경제적 도약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화의 과정 속에서 19세기 초부터 지독하게 이어졌던 국가 간의 불평등 지수가 빠르게 하락합니다.

19세기 초부터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국가 간 불평등이 심중해집니다. 증기기관의 도입으로 상품의 이동 비용이 낮아지고, 이를 기회로 오늘날 G7으로 불리는 북반구의 선진국들이 세계 경제권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상품을 옮기는 데 드는 물류 비용이 줄어들었기에 생산지와 소비지가 같을 필요가 없습니다. 경쟁력 있는 곳에서 생산하여 배와 비행기를 이용해 내다 팔면 되기 때문입니다. 시장은 세계화 되었지만 부를 창출하는 산업은 특정 지역, 즉 북반구에만 몰렸습니다. 20세기 초까지 북반구의 선진국들이 아시아와 중동 지역에 비해서 압도적인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아시아와 중동의 패권을 북반구가 빼앗은 18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를 ‘대분기’라고 부릅니다. 남반구와 북반구 간의 불평등이 오래도록 지속되던 경향은 1990년대 이후 서서히 사그라듭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1990년대 이후, 즉 대수렴의 시기에는 ICT 혁명을 통한 통신 기술의 발달과 이에 힘입은 오프 쇼어링을 통해 선진국의 부가 남반구로 대량으로 이전되기 때문입니다. 통신 기술 혁신 덕분에 상품뿐만 아니라 지식의 이동 비용도 매우 낮아집니다. ‘글로벌 가치사슬 혁명’, 즉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촘촘히 엮인 국제가치사슬이 만들어지면서 핵심 기술과 제조 역량이 모인 북반구의 클러스터가 빠르게 국제화됩니다. 이로써 선진국이 모든 이익을 독점하던 시대가 끝납니다. 여전히 극소수의 국가-상품과 지식의 이동 비용은 줄어들었지만, 사람의 이동 비용은 줄어들지 않은 탓에 선진국과 가깝고 원활한 소통과 교류가 가능한 곳-에만 부가 이전 되었다는 한계는 있지만, 개발도상국도 주체적으로 산업에 임하며 제조업이 이룩한 부가가치의 상당 부분을 가져갈 수 있게 됩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일본이나 미국 기업의 하청 업체로서 브랜드 제품을 대신 만들어주던 위탁 생산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생산에 관한 핵심 지식, 브랜딩, 마케팅, 경영의 기술까지 흡수하면서 직접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을 연상하면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저개발 국가의 국민 소득과 노동자들의 소득도 올라갑니다. 한편 선진국은 점차 탈산업화합니다.

코끼리 곡선의 그래프상에서 A 지점의 집단은 20년 동안 실질소득 증가율이 80%에 육박합니다. 그들은 브랑코 밀라노비치가 ‘글로벌 신흥 중산층’이라고 지칭한 세계화의 수혜자, 즉 아시아의 신흥국가 국민입니다. 중국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인도, 타이, 베트남, 인도네시아의 국민이 포함됩니다. 다음으로 B 지점의 집단은 ‘고소득국가의 중하위층’입니다. 미국, 일본, 독일 등의 고소득국가의 평범한 국민에 해당하는 이들의 실질소득은 거의 상승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C 지점은 세계 각국의 최고 부유층인 최상위 1%를 나타내며, ‘글로벌 금권 집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입니다. 주로 고소득 국가의 국민이 대다수인 이 집단은 절반이 미국인이며 나머지는 서유럽, 일본, 오세아니아, 브라질, 남아공, 러시아의 최상위 1%가 점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세 그룹 중에 가장 높은 비율로 소득이 증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화 과정에서 국가 간의 불평등은 해소되는 한편, 각 국가 내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탈물질화와 탈희소성 등 현대기술의 찬란한 진보가 곧바로 인류 전체의 풍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괜한 기우가 아닙니다. 지난 20년 동안 북반구와 남반구 간의 불평등은 감소했지만, 각 국가 내부에서는 소득 격차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세계화 혹은 기술 혁신 같은 새로운 풍요의 기회에 참여할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격차가 날로 벌어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론 바스타니는 적절한 소유 모델과 정치체제를 갖지 못한다면 기술 혁신은 부유층과 그에 속하지 못한 계층과의 초격차를 만들어내는 기폭제가 될 뿐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미국과 유럽은 불평등한 계층 구조로 인해 우익 집단의 부상이라는 위협을 겪고 있습니다.

미지의 답

1. 미지성과 질적 민주주의

‘미지(未知)’의 사전적 뜻은 “아직 알지 못함”입니다. 미래의 본질은 ‘미지성’에 있습니다. ‘라플라스의 악마’는 미래도 기지(旣知)의 영역이라고 했지만,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은 라플라스의 예단이 부분적 진실임을 입증해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미래를 대하는 태도는 ‘미래를 정확히 모른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즉 ‘무지에 대한 앎’이 되어야 합니다. 니클라스 루만과 울리히 벡은 그걸 ‘무지의 지’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미래는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에 어떤 모습, 어떤 형태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미래를 누리고 싶은지는 섬세히 논의해야 합니다. 앞서 논의한 탈물질화와 탈희소성이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안겨줄지에 대해 그 누구도 답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여태까지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급격한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김상준은 『미지의 민주주의』에서 고도 산업화, 고도 과학 기술의 적용, 지구적 교류 교역의 확대로 인해 앞으로는 새로운 위험이 예측하기 어려운 형태로 대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오늘날의 기후재앙을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 정보기술과 정보사회의 발달 덕분에 위험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과 민감도가 크게 증대합니다. 잠재적 위험이 대두하고, 이를 감지하는 대중의 민감도가 크게 발달하는 상황은 ‘질적 민주주의’를 요청합니다. 풍요를 이야기하는 이들과 반대로 비관을 이야기하는 이들 모두 각자의 해석과 판단에 근거해 미래의 근삿값을 내놓는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배타적 선택이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특정 개인과 특정 집단의 선호에 대한 선택과 실현이 아닌, 평등하고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잘 다듬어진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논의 테이블이 필요합니다. 김상준이 주장한 질적 민주주의의 출발은, 특이하게도 날카롭게 대립하는 당사자들의 이해 선호를 괄호 안에 가둬서 중립화시키는 것입니다. 특정 정당 혹은 정파나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이들은 미지적 과제를 심의하는 과정에서는 제외됩니다. 그 이유는 미지적 문제를 논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느 편이 옳은지를 전제할 수가 없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무작위로 표집된 적정 규모의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사안별 시민 심의 기구를 만들어 미지적 문제에 대해 논하게 합니다. 여기서 결정의 기준은 진리와 비진리가 아닌 공공성 부합 여부가 되며, 그 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누구나 그 결과를 인정하고 승복할 수 있는 공정한 절차를 통했는지 입니다. 공공성은 헤게모니와 당파성의 너머에 있으며, 자기 이해 자체를 성찰하고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이해 선호의 기지성과 고정성을 전제합니다. 정치 행위자가 자신의 이해를 분명히 아는 것을 말합니다. 사안이 기지적이라면 정치 행위자, 혹은 정당과 정부는 일정한 유형으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합니다. 반면 사안이 미지적이라면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과학기술이 초래하는 논쟁과 정책 사안을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닌 공공의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무작위로 선출된 시민들에게 맡겨서 심의하고 판단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적합하다고 김상준은 이야기합니다.

2. 선용과 범용

스가쓰케 마사노부는 『동물과 기계에서 벗어나』의 결론에서 AI를 세계 정부를 건설하는데 이용하는 아이디어를 제출합니다. 스가쓰케 마사노부는 경제학자 미즈노 가즈오의 주장을 빌려, 글로벌 자본주의의 폭주를 막기 위해 세계 국가에 버금가는 범세계적 연합체를 만드는 상상을 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이를 통해 법인세 인하 경쟁에 제동을 걸고, 국제적 금융 거래에 과세를 매기는 토빈세 개념을 도입하여 거기서 징수한 세금은 식량 위기나 환경 위기에 시달리는 지역으로 환원하여 국경을 넘는 분배를 하도록 만드는게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 과정에서 국가의 구속을 받지 않는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배양하고 적절하게 관리하는 도구로서 AI를 유익하게 이용하자는 독창적인 의견을 제출하는 것입니다. 스가쓰케 마사노부의 아이디어가 유달리 기억에 남는 이유는, 과도한 싱귤래리티적 낙관론과 ‘동굴거주자’와 같은 폐쇄적 태도에서 모두 벗어나 미래 기술을 적절히 ‘선용’하길 요구하는 태도가, 탈물질화와 탈희소성의 시대에 매우 적합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미래 기술을 적절하게 이용한다면 우리의 상상력을 넓히는데 유익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미래 기술의 경향성은 낯선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특히 동아시아인에게는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IT 산업의 핵심은 반도체입니다. 단위 면적당 투입되는 에너지의 양을 고도로 밀도화 시켜, 적은 면적에서도 최적의 수행과 높은 생산성의 산출이 가능하게 만든 물질이 바로 반도체입니다. 반도체로 대표되는 ‘집적(集積)혁명’과 동아시아의 ‘내장근대’의 유사성을 논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아 보입니다. 동아시아 유교권 국가의 식민지 없는 복지의 기억과 15세기 송나라에서 기원한 초기 근대는, 풍부한 강수량을 바탕으로 적은 단위 면적에서도 극도의 효율성과 식량 산출량을 이끌어낸 소농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반도체 산업에서 전세계적 강세를 보이는 기업인 삼성과 TSMC가 각각 한국과 대만에 터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P4G 행사가 열리는 날, DDP 앞에서 멸종저항운동의 액션이 있었습니다. 어쩌다보니 저도 그 현장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멸종저항운동이 벌이는 일들의 정당성과 명분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합니다. 급진적 일성은 기후재앙의 원인과 해결법을 정확히 담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운동이 상상력을 제한하고, 기후재앙과 대중 사이를 연결 짓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생각도 한편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날 제 머릿속을 지배한 단어는 ‘범용’이었습니다. 급진적 행동을 기피하는 대중과 기후재앙의 진실 알리기 위해 생을 내놓은 활동가들 사이에서 어떻게 범용성을 만들어낼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아내고 싶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