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 베어리드 감독의 <말없는 소녀>(2023)
<말없는 소녀>는 이미 돌봄의 감각을 잊은 관객의 몸과 마음마저 어루만진다.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각색한 영화 <말없는 소녀>는 무심한 부모 사이에서 방치된 아이가 애정과 돌봄의 손길로 다시 성장을 시작하는 어떤 여름을 그린다. 시골의 벌판에 코오트를 찾는 소리가 매섭게 울려 퍼진다. 카메라는 가만히 고개를 내려 웃자란 풀밭 사이에 모로 웅크려 그대로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비춘다.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서 비틀거리는 위태로운 이 아이가 코오트(캐서린 클린치)다.
코오트는 사람들의 눈빛을 피해 눈을 돌리고 말을 삼키며 도망가는 것이 익숙하다. 코오트는 어른들의 차가운 시선을 피해 의자에 튀어나온 솜, 귓가의 귀걸이, 버려진 담배꽁초 따위로 시선을 돌린다. 말수 적은 소녀를 대신한 시점숏은 코오트가 보고 느끼는 바를 충실히 전달한다. 가사와 육아에 지친 엄마는 여섯 번째 아이를 배에 품은 채 분주하다. 엄마의 지친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 역시 코오트다. 코오트는 타인의 시선을 예민하게 감지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간다. 에이블린(캐리 크로울리)과의 첫 만남에서 코오트는 에이블린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돌아본다. <말없는 소녀>는 모든 대사가 사라져도 무방할 정도로 말보다 이미지가 중요한 영화다. 왜곡되고 범람하는 말 대신 시선과 침묵이 영화를 이끈다.
코오트의 언니들은 송아지와 아기의 탄생에 대해 말하다가 아빠 댄이 들어오자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문다. 이 가족의 소리를 억누르는 힘은 댄에게 있다. 댄은 영어를, 엄마 메리와 아이들은 아일랜드어를 사용하며 코오트는 학교의 또래 친구보다 영어에 서투르다. 언어의 장벽으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은 코오트의 집을 단절된 침묵의 공간으로 만든다. 킨셀라 부부 역시 조용하기는 마찬가지다. 에이블린이 영어로 흘러나오던 라디오를 꺼버리자 아침 식탁 위에는 식기들의 조용한 부딪침과 새의 지저귐만이 남는다. “아무 말 안 해도 돼. 언제나 그걸 기억하렴. 많은 사람이 침묵할 기회를 놓쳐서 많은 걸 잃었단다.” 침묵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존중하는 어른의 존재는 말 없는 소녀에게 침묵이 불행의 증거만은 아님을 일깨운다. 압박에 못이겨 짓눌린 침묵이 아닌 공기 사이에 따스하게 스며드는 침묵도 있음을 보여준다.
부실한 점심을 먹은 코오트는 다른 아이의 책상 위에 있던 우유를 몰래 따라 마시려 한다. 뛰어다니는 남자아이들에 의해 엎질러진 우유는 코오트의 치마를 적신다. 코오트의 옷이 젖는 일은 몇 번씩 일어난다. 첫 장면에서 코오트가 그토록 숨었던 이유는 침대에 소변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킨셀라 부부의 집에 간 첫날밤에도 코오트는 오줌으로 침대와 옷을 적신다. <말없는 소녀>에서 목을 축이고 몸을 적시는 행위는 내면과 외면의 결핍과 갈증을 드러낸다. 에이블린은 코오트를 손수 목욕시킨다. 아이의 몸은 따뜻한 물속에서 깨끗하게 씻겨진다. 몸에 비누칠 하는 소리와 살갗이 부드럽게 쓸리는 촉감은 어떤 대사보다도 따뜻한 환대의 표현이다. 경제적 궁핍과 내면의 척박함을 채워주는 물속에서 코오트는 시든 꽃이 물을 머금듯 생기를 찾아간다. 예컨대 션과 에이블린이 따라주는 모든 음료는 클로즈업으로 천천히 찍혀 있다. 우유 한 잔 마음껏 마시지 못하던 아이는 갈증을 해소해낸다. 킨셀라 부부의 집을 떠나기 전 코오트는 샘터에 홀로 가서 물을 떠 오려다 도리어 물에 빠지고만다. ‘양동이와 그 안의 물에 반사된 소녀의 모습’이라는 이미지에서 시작된 <맡겨진 소녀>에서 이 부분은 물속에서 코오트와 똑같은 손이 “물속으로 끌어당긴” 것으로 묘사된다. 온몸을 적신 샘물은 세례이자 양수로 코오트는 마침내 새로운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코오트가 떠나가는 킨셀라 부부의 차를 뒤쫓아 뛰어가는 동안 사랑이라 부를 만한 기억들이 불려 나와 화면을 채운다. 마침내 션의 품에 안긴 코오트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댄의 모습을 흐릿하게 본다. 청각보다는 시각과 촉각에 집중하는 <말없는 소녀>에서 가장 중요한 발화는 코오트의 목소리로 간결하게 전달된다. 두 번의 “아빠”는 댄이 걸어오는 것을 경고하는 의미와 션과 에이블린의 사랑에 부응하는 의미로 각각 쓰인다. 침묵과 돌봄 속에서 다시 태어난 소녀는 명료한 목소리로 새로운 가족을 호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