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 있다는 희망

<반지의 제왕>과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선

by 코두 codu

살아남는 것만도 벅찬 세상이다. 어떤 시대이든 그랬지만, 기술이 발전하고 국제기구가 설립된 현재까지도 인간은 여전히 전장에 내던져진 전사처럼 살고 있다. 그러나 싸워야 하는 대상도 이유도 불분명하다. 복잡한 현실에 눈이 흐려져 자신의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제대로 판단 내리지 못한다면 엉뚱한 곳으로 칼을 휘두르게 된다. 칼날이 향해야 하는 곳은 옆에 있는 경쟁자도, 따라잡을 엄두가 들지 않는 빠른 변화도, 새로운 기술도, 다른 국가도 아니다. 다만 자신 내면에 존재하는 악이다.

먹고 살기에도 바쁜 세상에 선과 악에 대한 생각은 한가한 소리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서, 나도 살아야 하니까, 앞일은 아무도 모르니까 라는 말로 눙치고 넘어간 선택들이 선과 악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우리가 내면의 칼날을 예리하게 다듬어놓지 않는다면 악은 언제고 자라나 나를 제압할 것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완전무결하게 선하지도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지배하는 악인도 아니다. 필요한 만큼만 악하고 가능한 만큼만 선하다.

인간은 언제나 힘을 원하고, 절대적인 힘은 대체로 악과 결합한다. <반지의 제왕>의 절대반지는 힘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며 그 자체로 파괴를 위해 태어난 물건이다. 강력한 힘이 언제나 악한 것도, 선한 것이 약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선하기 위해서는 때로 악보다 강한 힘이 필요하며 약하기 때문에 악해지기도 한다. 선과 악의 선택지에서 사람은 갈등할 수 있지만 강함과 약함의 선택지에서 우리는 언제나 강함을 택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강력한 힘은 어느 정도 욕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절대반지는 모두의 욕망을 추동하고 세상을 정복할 힘을 줄 것처럼 보인다. 반지를 파괴할 반지 운반자가 힘없고 약한 호빗이 된 것은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일이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평온한 샤이어를 떠나게 된 프로도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반지의 영향을 적게 받는 이유는 마음의 강함보다는 무욕에 있다. 호빗 종족의 평온함과 적은 욕망은 절대반지의 강력한 힘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 무욕은 힘의 세계에서 모순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다.

우리의 진실한 친구 샘은 ‘세상에 선함이 남아 있다는 희망’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말한다. 힘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선에 대한 믿음은 연약하다. 프로도와 샘은 국가나 영토, 보물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모험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각자의 마음에 존재하는 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여정을 나선 것이다. 인간계를 지배하겠다는 욕망과 힘이 응축된 절대반지를 파괴하려는 연약하고 욕심 없는 호빗은 그렇기에 가장 강하다.

동화 혹은 신화의 형식으로 보면 선과 악은 뚜렷해 보인다. 악한 힘인 사우론과 절대반지에 맞서 싸우는 호빗과 인간 그리고 엘프와 드워프는 선의 영역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은 이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선과 악이 뒤섞여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다.

내면의 악함과 선함은 일상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선은 악을 만나야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낸다. 선과 악을 판별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이 손쉽게 얻을 수 없기에 수많은 교육과 훈련 그리고 제도가 필요하다. 완전한 악, 공포에 가까운 힘이 아니라 불편한 정도의 문제에 직면한 인간은 그저 외면하는 것으로 해결하기도 한다. 도덕적 딜레마에 부딪힌 인간이라면, 원치 않아도 에너지를 쏟게 되고, 떨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빌 펄롱은 수녀원의 석탄 창고에서 한 여자아이를 발견한 뒤로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빌은 아이를 책임질 필요도 수녀원의 잘못을 고발할 힘도 경제적 여유도 없다. 수녀원을 적으로 돌리는 일은 마을 공동체에서 배제될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아이가 딸린 미혼의 어린 여자아이를 돌보아야만 할까? 누구도 선뜻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딸이 다섯이나 있는 빌도 마찬가지다. 빌이 짊어진 양심의 무게는 운명과도 같아서 선량한 작은 호빗이 반지를 파괴하는 여정을 걸어야 하듯이, 빌도 자신의 양심이 이끄는 길을 따를 수밖에 없다.

내면의 불편함과 질문에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자만이 선함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선은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민과 모험 그리고 투쟁을 통해 다듬어 가야 한다.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우리는 고민과 질문이 없는 욕망을 통해 빠르게 악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갈등 속에서 마침내 마음의 소리를 따랐을 때 빌 펄롱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진실한 기쁨을 느낀다.

그의 선택은 현실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공동체에서 배척당할 수도 있기에 사회적으로 어리석은 선택이다. 그러나 빌의 양심에 응답하는 선택이었고 그보다 큰 가치는 없다. 평범한 고민 끝에 비범한 결단이야말로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참된 선일 것이다. 미혼모였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미시즈 윌슨의 비호 아래 자라난 빌 펄롱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받은 구원을 다시 베풂으로써 빌은 다시 한번 구원받는다. 몰랐다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외면하기를 고민하면서도 빌은 발걸음을 돌린다. 한 점의 얼룩조차 없는 고귀하고 깨끗한 곳이 아니라 그 고민과 방황 사이에 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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