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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두 codu Dec 26. 2020

'여왕'도 혼자서 싸울 순 없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퀸스 갬빗 The Queen's Gambit>



재능의 명과 암


'엘리자베스 하먼(안야 테일러 조이)'은 눈에 띄는 사람이다. 남자들로 가득한 체스의 세계에서 여성 선수인 것도 모자라 천재적인 체스 실력으로 그들을 압도해 버린 것이다. 붉은 머리와 화려한 옷차림을 한 어린 여성에게 남자들은 승복해야만 했다. 엘리자베스(이하 베스)는 9살에 체스를 시작해 15살에 켄터키주 챔피언에 오른 천재다.


고대 그리스 시인들이 영웅의 이야기를 즐겨했듯 현대의 우리는 천재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천재가 성공해도, 몰락해도 어떤 쪽이든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뛰어난 능력을 타고난 사람을 두고 신의 선물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그 선물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뛰어남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끊임없는 평가와 판단에 시달린다. 심지어 이들은 삶조차 마음대로 재단 당해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선망, 동경, 부러움, 질투, 혐오는 다양한 모습으로 이들을 덮쳐 온다.


때문에 천재는 고립되기 쉽다. 이해받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평범한 아이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 베스는 당연하게도 또래 친구들과 유행하는 노래를 함께 부를 수도 없고, 남자에 대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베스에게 의미가 있는 건 체스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별과 나이가 다르더라도 체스를 하는 사람이 베스에게는 친근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베스가 첫 상금으로 산 것은 옷과 체스판이다. 자신이 또래의 아이들과 다르며 현실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것은 베스의 콤플렉스다. 베스가 불건강한 상태가 될수록 유행하는 모습으로 치장하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단 하나의 악역, 자신


베스는 9살에 눈앞에서 엄마를 잃었다.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베스는 머슈언 보육원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보육원의 지하실에서 홀로 체스를 두고 잇는 관리인 샤이벌(빌 캠프)씨를 마주하게 된다. 64개의 칸으로 이루어진 체스판은 베스가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러낼 수 있으며 지는 것도, 이기는 것도 온전히 자신의 책임 아래에 있는 체스라는 게임에 베스는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베스는 뛰어난 선수였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는 공격수였으며 쉽게 화를 냈다. 샤이벌의 말대로 베스의 '화'는 너무나 깊었고,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베스는 체스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써 안정제의 도움을 받는다. 체스에 경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했지만 체스는 자신을 승리자로 만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체스를 알아가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었겠지만 베스에게는 승리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다. 그리고 고독함과 패배감이 동시에 몰려오자 약과 술로 자신을 마비시킨다.


이 <퀸스 갬빗>이라는 드라마에는 이렇다 할 악역이 등장하지 않는다. 베스를 비웃는 같은 학교 학생들도 악당이라고 할 수는 없고, 세계 챔피언 '보르고프(마르친 도로신스키)'도 굉장히 진중한 체스 선수일 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베스가 넘어야 할 벽은 자기 자신뿐이다.


<퀸스 갬빗>은 그 고독과 압박감에서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고,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일어서는 천재의 치유 과정을 그린 드라마이다.


앨리스와 앨마, 두 엄마가 남긴 것


친엄마 앨리스의 죽음과 양엄마 앨마의 죽음은 베스의 인생에서 큰 변곡점이 된다. 극 중에서 앨리스와 함께 보낸 시간을 많이 보여주지는 않지만 앨리스의 말들이 베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강한 사람은 혼자인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도 그중 하나다. 


앨리스의 이런 양육법은 베스를 독립적인 아이로 만들어주었지만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앨리스의 마지막은 심각할 정도로 자기희생적이며 회피적인 태도다. 앨리스는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재능과 독립적인 정신을 준 동시에 베스를 고독하고 자기 파괴적으로 만들었다.


한편, 베스의 양엄마인 앨마(마리엘 헬러)는 체스에 재능을 보이는 베스를 전적으로 밀어준다.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무료한 삶을 살아야 했던 자신과 달리 자신의 능력으로 부와 명성을 얻는 베스를 보며 앨마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행복해한다. 베스의 성취와 성장은 앨마에게도 큰 행복이었다. 


하지만 앨마는 베스가 체스에만 매몰될 것을 걱정한다. 엄마와 딸 그리고 매니저와 선수로서 둘의 유대는 특별했다. 베스를 조금이나마 쉬거나 걷게 만드는 것은 앨마였다. 앨마가 원하는 것은 베스가 '삶을 살며 성장하는 것'이다. '인생에 체스가 전부는 아니니까'


베스는 멕시코 시티에서 만난 '조르지 기레브'라는 소년에게 '세계 챔피언이 된 후 어떻게 살고 싶느냐'라고 묻는다. 소년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 베스는 이미 그 후를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체스의 자리를 어느 정도로 설정해야 할지를 체감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앨마의 말처럼, 인생에 체스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앨마가 베스에게 남긴 것은 '체스 외의 삶'이다.


외로운 '폰'이 '퀸'이 되기까지


외로움의 구덩이에서 베스를 건져 올려준 사람은 보육원 친구 '졸린(모세스 잉그람)'과 샤이벌씨다. 관리인 샤이벌씨의 부고로 다시 찾게 된 머슈언 보육원은 체스와의 첫 만남을 다시금 떠오르게 만든다. 실제 장례식이 치러지는 교회보다 그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던 찬송가가 울려 퍼지던 시간의 지하실은 베스에게 큰 울림을 준다. 9살이던 베스와 찍은 사진과 돈을 빌리려 쓴 편지, 그리고 베스의 온갖 기사와 사진들이 붙어있는 그 벽면을 보며 베스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베스에 대한 샤이벌씨의 자부심과 애정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치유였다.


사람을 일으키는 건 주위 사람들의 끈질긴 애정과 믿음이다. 오래도록 너를 지켜봐 왔다고, 당신이 걱정된다고 말해주는 것. 네가 필요할 때 내가, 내가 필요할 때 네가 달려와줄 거라는 확신.


자신을 향한 타인의 깊은 관심과 애정을 마주한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를 놓을 수 있을까. 애정과 믿음의 힘은 한낱 약물과 술이 주는 쾌락과 마비의 감각에 비할 바가 아니다.


덕분에 베스는 맑은 정신으로 러시아로 향한다. 하지만 러시아 선수들은 한 팀으로 움직인다. 바르고프와의 대결에서 베스도 혼자는 아니었다. 그동안 베스가 겨뤄왔던 선수들은 한 팀이 되어 러시아에 대항한다.


그러나 아무리 도움을 준다 한들 결국은 홀로 싸워야만 하는 때가 온다. 그 순간 베스는 안정제 없이 차분하게 머릿속으로 다시 수를 어림한다. 맑고 또렷한 정신으로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 전력으로 상대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에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승부를 겨뤘고 마침내 이겼다.

러시아는 체스를 사랑하는 나라이다. 냉전시대에 미국에서 온 백인도 훌륭한 체스 선수이기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세계 챔피언이 된 후 러시아의 거리를 백색 '퀸'과 같은 모습으로 활보하는 베스는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자신다워 보인다. 대통령과의 만찬, 인터뷰 같은 것들이 아닌 거리에서 이름 모를 할아버지와 체스를 두는 것이 베스가 선택한 챔피언 이후의 삶이다.


체스에서 가장 강한 말은 '퀸'이지만 혼자서 모든 말들을 잡을 수는 없다. 다른 말들이 있기에 비로소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역경을 넘어 상대방 진영의 끝까지 다다른 '폰'은 '퀸'이 될 수 있다. 베스는 이기기 위해 자신을 거침없이 내던지는 '퀸'이 아닌 한 걸음씩 전진하여 끝에 다다른 '폰'처럼 마침내 '퀸'으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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