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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두 codu Oct 18. 2020

좆같으니까 다들 행복하게 좀 살아줄래?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리뷰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NETFLIX 오리지널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2020), 이경미 감독, 원작 정세랑


안은영과 젤리의 세계


보건교사 안은영(정유미)이 보는 세계에는 젤리가 가득하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젤리를 남긴다. 때로는 죽어서도 젤리를 남기지만 대부분은 해로운 존재가 되기 전에 천천히 부서진다. 젤리는 욕망의 흔적이며, 우리가 감정, 마음, 영혼이라 부르는 것들은 모두 젤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젤리들이 오염될 경우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래서 안은영은 젤리를 처리하며 다닌다.


안은영의 무기는 15분간 사용이 가능한 장난감 플라스틱 칼과 비비탄 총 스물 두발이다. 이집트산 앙크 십자가와 바티칸의 묵주, 부석사의 염주와 교토 신사의 건강 부적을 더하면  스물여덟 발까지 늘릴 수 있다. 손톱을 물들인 봉숭아 역시 나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서다.



은영은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을 두고 보지 않는다. 굉장히 영웅다운 면모이지만, 은영은 남들을 돕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말하며 뒤에 욕지거리를 덧붙인다. 그 욕지거리는 불쾌하기보다 친근하게 느껴진다. '남을 돕는 사람'이라는 안은영의 정체성이 젤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괜찮다. 우리는 알고 있다. 나 하나 살기도 빡빡한 세상에서 남을 돕는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욕이 나올 정도로 고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가 그 '씨발'에서 드러난다. '드럽게 힘들지만, 해야지 별 수 있냐'는 듯한 태도의 은영은 솔직한 영웅이다.


안은영과 홍인표는 타인의 고통에 예민한 사람들이다. 은영은 젤리를 보지 않는 동안 세상이 조용하고 평화롭고 조화롭다고 했지만, 사실 안은영이 보는 세상이 실제 세상에 가깝지 않을까. 세상은 본래 그렇게 시끄럽고 엉망이고, 인간의 감정은 폭발적인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감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늘 망함과 좆됨 사이의 어디쯤을 부유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세상에서 "시발, 좆됐다."를 되뇌며 세상을 덜 좆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것이 바로 안은영이다. 이런 이가 옆에 있다면 나는 그를 영웅이라 부를 것이다.



운명의 굴레를 벗고


'치흡혈 이곡대운 가자국'
숨구멍을 다스리면 대운을 바꾸고 나라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안전한 행복과 일광소독은 목련고를 차지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은영과 인표(남주혁)는 그들도 모르는 사이 그 싸움에 휘말리고 만다. 은영은 지하실과 압지석을 관리하는 관리자로 자기도 모르는 새 이용되었고, 인표는 학교의 기운을 활용하기 위해 차지해야 하는 인물이다.


'안전한 행복'은 인표의 할아버지인 홍진범 이사장을 처리하고 일광소독을 안전한 행복에서 제명한다. 목련교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던 탓이다. 하지만 학교의 기운을 쓰기 위해서는 홍인표가 필요하다. 원작을 보지 않아서 인표의 보호막의 비밀과 정체에 대해서는 모르겠으나(시즌2에서 밝혀지겠죠?) 그 보호막과 할아버지 덕분에 인표는 '안전한 행복'과 '일광 소독'의 싸움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다.


화수(문소리)가 일광 소독의 대표이고 그에게 이용됐다는 것을 알게 된 은영이 화수를 찾아가 나누는 대화에서 그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높은 곳에서 은영을 바라보며 "안은영"이라는 이름 석자로 그를 휘어잡아버리는 화수는 큰언니, 혹은 엄마의 뉘앙스를 풍긴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화수의 음성에 자동반사처럼 대답하는 은영이의 모습은 잘 훈련된 동물 같기도 하다. 기댈 곳 없던 은영을 어떻게 길들여 갔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화수는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너'를 받아주는 건 나밖에 없으며 너에게는 가족이, 우리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하며 안은영의 손을 감싼다. 


목련고 반경 5.38km 안에서 생을 반복하는 옴잡이 '혜민'은 은영이 가장 도와주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옴들이 번지면 나타나고 옴이 없어지면 사라지는 존재. 그저 옴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은영은 젤리를 잡는 자신의 처지가 혜민과 비슷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기에 혜민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한편 자신의 운명을 '원래 그런 거'라며 받아들이는 혜민의 모습은 담담하다. 은영이는 그런 혜민의 모습이 불만스럽다. "원래 그런 게 어디 있어?" 운명이라는 말도, 태어난 대로 살아야 하는 것도 싫다. 모두의 안전 이전에 내 안전, 우리의 안전도 중요하다. 죽을 때가 되면 전쟁의 선두에 섰다는 혜민과 스스로를 전투병이라 칭하는 은영 역시 안전과 행복이 필요하다.


혜민이는 위 대신 배에 '구제'라는 글자가 적힌 젤리가 있었다. 젤리를 적출했으니 혜민이는 이제 구제라는 굴레에서, 남을 구해야만 하는 운명에서 벗어난 것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제 혜민이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옴을 잡아야 한다는 의무에서 벗어나 다양한 선택지를 갖게 된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도 결국은 자신의 두 손에 달려있다. 안은영도 선택을 한다. 화수의 손을 뿌리치고, '네가 더 이상'하다고 말한다. 은영은 가족같은 존재였던 화수에게서 벗어나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은영은 젤리가 안 보였을 때 목련고를 외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압지석을 열어 학교를 무너뜨리기로 마음먹었고, 그 결과 다시 젤리를 보게 된다. 


안은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에 온몸으로 부딪혀 보는 사람이다. 



그렇게 웃는데 어떻게 복이 와요?


목련고는 '흡혈' 숨구멍의 자리다. 즉, 기운이 아주 센 곳이라는 거다. 그래서 당시 학교를 지으려던 홍진범 선생을 다들 말렸으나 그는 목련고를 지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불러 모은 기운을 좌지우지하고자 했던 홍진범은 아이들에게 해가 갈 것을 알면서도 학교를 세웠던 듯하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교훈과 큰 소리로 웃을 것을 강조하는 아침 체조는 건강한 학생과 학교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모든 것이 어떤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자 섬뜩하게 다가온다.


지하실의 압지석이 잠시 뒤집어졌을 때 기가 약한 수많은 학생들은 미친 듯이 웃으며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 몸을 내던지려 했다. 지하실 문이 열리자 젤리들은 활개 치며 밖으로 나오고 아이들 뿐만 아니라 교사들 역시 기괴하게 울고 웃는다. 그들은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무기가 되어 남을 할퀸다. 조롱과 비웃음, 남의 고통을 향한 웃음은 폭력 그 자체였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공격과 혐오뿐이다.


교무실의 그 장면은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 장면이었다. 극의 설정상 웃는 주체와 복을 받는 주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웃으면 (안전한 행복에) 복이 온다'의 의미가 되어버린다.



이상하고 귀여운 정세랑과 이경미의 세상


2화의 오프닝은 진정 난장판이 따로 없는데, 이게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한다. 하얀 보건교사 가운을 휘날리며 학생들의 머리를 플라스틱 칼로 삑삑 내리치며 그들을 구하는 안은영, "씨발, 계단..." 하며 옥상까지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는 홍인표, 스피커로 연신 학생들에게 제자리에 있으라며 '내 몸이 좋아진다' 노래를 부르는 교장선생님까지. 거기다 '따라란, 와아~' 하는 귀여운 음악이 더해지니 독특하고 난해하지만 귀엽고 이상한 <보건교사 안은영>이라는 드라마가 완성된다.


목련고의 사이비적인 풍경을 금세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놀라운 지점이다. 아침마다 겨드랑이를 두드리며 "내 몸이 좋아진다. 좋아진다. 좋아진다..."를 반복하는 목련교의 풍경은 너무나 사이비적인데, 이게 너무 한국스러워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학교의 교훈과 교장 선생님의 광기 어린 웃음을 봐도 이상한 학교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한국 학교들은 보통 이러지 않나?


십자가 옆에 부처상이 있고, 부적과 드림캐쳐가 아른거리며, 웃고 있는 복고양이 옆에 미소 짓는 동자승 모형이 도란도란 어울리고 있는 은영이의 캐비닛 풍경은 '아, 이게 한국이지' 싶다. 그냥 좋다 싶은 것을 다 때려 박은 듯한 모습.


적당히 이상하고 적당히 정의로운 주인공이 악몽 같은 세상을 유쾌한 태도로 구원해 가는 것을 보고 있자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그 음악! 강렬하고 때로는 익살스럽고 귀여운 노래와 깜찍한 효과음은 이 이상하고 엉망진창에 그로테스크한 세상을 귀엽게 보여준다.



은영의 캐비닛 속에는 온갖 종교의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케비넷 안의 모습은 은영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런 마법 같은 힘에 기대어 안식을 얻고는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치유하는 은영은 다른 세상을 보기 때문에 소외되기도 한다. 은영의 캐비닛 속을 본 홍인표는 '징그러운데, 너무 좋은데요?'라고 말한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상대방이 '당신은 이상하지만, 이상해서 좋다'라고 말해준다면 정말 살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님과 감독님이 바라는 세상은 이렇게 손을 붙잡고 조금씩 나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아닐까 한다.


나는 이경미 감독과 정세랑 작가가 만들어낸 세상이 너무 재밌었다. 아직 원작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드라마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즌 2도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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