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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두 codu Jan 28. 2021

찰나의 기쁨들이 모여 '삶'이 된다

영화 <소울 SOUL> (2021)


소울(Soul)


뉴욕의 한 중학교에서 밴드부 선생님을 하고 있는 '조 가드너'(제이미 폭스)는 재즈 뮤지션이 되어 무대에 오르는 것을 꿈꾼다. 동경하던 연주자인 '도르테아 윌리엄스'와 함께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조는 들뜬상태로 길을 걷다 맨홀로 떨어지게 된다. '태어나기 전 세상'에 도착하게 된 조의 영혼은 고집스럽게 태어나기를 거부하는 영혼인 '22번'(티나 페이)과 만나게 된다. 22번은 불꽃을 찾지 못해 지구 통행증을 얻지 못했다. 두 영혼은 22번의 불꽃을 찾아 조의 영혼을 지구로 보내는 계획을 세운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태어나기 전에 준비해야 하는 것




'태어나기 전 세상'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들은 성격을 형성하고 태어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영혼들이 채워야 할 항목에는 '불꽃'이라는 것이 있다. 어린 영혼들은 불꽃을 찾는데 도움을 줄 멘토와 짝이 된다. 대부분의 영혼은 멘토의 인생을 볼 수 있는 '당신의 전당'과 지구에서 영감을 주는 모든 것을 모아 놓은 '모든 것의 전당'에서 이 불꽃을 찾는다. 하지만 영혼 번호 22번은 간디, 테레사 수녀, 칼 융 등 지구에서 훌륭하다는 위인들을 멘토로 만났음에도 불꽃의 빈칸을 채울 수 없었다.


22번은 태어나기를 거부한다. 22번은 지구는 시시하고, 삶은 별 것 없고, 어떤 일도 흥미롭지 않다는 굳센 신념을 갖고 있다. 지구에서 훌륭한 위인이었던 이들도 22번 앞에서는 역정을 내고 만다. 하지만 여느 멘토들과 달리 평범하다 못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조를 보고 22번은 호기심이 생긴다. 22번은 이 무의미하고 한심한 인생을 사는 인물이 왜 그리 살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한다.


22번의 자기 회의와 무기력한 냉소는 현대인들에게 익숙하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 이 감정이 휘몰아치는 시기가 있는데, 우리는 이를 흔히 중2병이라 부른다. 22번은 가보지 않은 세상, 겪어 보지 못한 삶에 대한 두려움과 동경에 세월이 지남에 따라 쌓인 지식과 굳은 의지까지 더해졌다. 22번의 강한 에고는 자신을 규정짓는 위인들의 말에 더욱 굳건해진다. 사실 22번은 누구보다 삶을 멋지게, 아주 멋지게 살고 싶은 영혼이다.


단풍나무 씨앗은 22번이 지구에서 조의 몸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찾은 불꽃의 상징이다. 불꽃은 사진 찍기나 연주 같은 능력, 삶의 의미, 이루어야 할 목적이 아니다. 삶을 사랑하는 감각이 바로 불꽃이다. 우리는 모두 삶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영혼들이다. 순간을 느끼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우리가 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그거 하나뿐이다.



재능이라는 환상



조는 재즈밖에 모르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불꽃이 연주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작품 중반까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적성과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고, 그것이 불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초등학생 때부터 재능을 발견하고 연마해 직업을 가지는 것을 자아실현이라고 여긴다. 꿈과 장래희망을 동의어로 사용하며 꿈의 범위를 좁히기도 한다.


'나에게 아무런 재능이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나의 재능은 도대체 뭐지? 적성은 뭐지?'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골몰하던 매 순간 우리는 실패자가 되는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22번이 조의 몸을 통해 얻게 된 불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삶의 원초적인 기쁨이다. 조는 음악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기적일 정도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이발사 '데즈'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밴드부 학생 '코니'에게 해준 순수한 응원은 조가 아니라 22번이기에 할 수 있었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맛을 느끼고, 바람을 느끼며, 순간순간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이 22번에게는 있었다. '어쩌면 내 불꽃은 하늘 보기나 걷기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22번의 말은 정답이다.


'바다'라는 것을 찾고 있어요.
무슨 소리야? 여기가 바다야.


조는 몸을 되찾아 원하던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도르테아 윌리엄스 콰르텟의 멤버가 된다. 조는 내일도 이곳에 와서 같은 공연을 하면 된다. 하지만 조는 기대하던 감정과 다른 허무함을 느낀다. '이제부터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행복은 이미 지나가고 있다.



즐거움과 집착의 균형


태어나기 전 세계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영혼이 오는 공간도 존재한다. 공중에는 무언가에 집중해 '무아지경'에 빠진 영혼들이 떠다니고 있고, 아래에는 불안과 집착으로 '길을 잃은 영혼'이 된 거대한 모래더미 같은 영혼들이 스산하게 거니고 있다. 22번은 이곳에서 '문윈드'를 자주 만난다. 그는 '국경 없는 신비주의자들'의 중심인물로 멋진 배를 탄 선장의 영혼을 하고 있다.


실제 '문윈드'의 몸은 뉴욕 거리에서 광고판을 돌리고 있지만, 이 곳에서는 길을 잃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명상을 하는 점성사, 티베트 신전의 연주자 등이 그와 함께 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문윈드에게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낙오자 혹은 괴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누구보다 힘차게 다른 이들을 구원하고 있다. 반면 길을 잃은 영혼에는 '또' 헤지펀드 매니저가 있다고 말하며, 사회에서 찬양하는 물질적 성공이 우리의 영혼을 삶과 단절시킨다는 점을 짚고 있다.


영혼의 건강함은 외부의 사회적 평가와는 무관하다. 신비주의자들의 현실은 어떨지 몰라도 영혼만은 밝은 에너지로 가득하다. 이들은 집중과 몰입을 통한 무아지경의 경지를 넘어 공간 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길 잃은 영혼들과 비슷한 상태이기도 하다. 집중과 즐거움이 집착으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살면서 겪는 즐거움, 불안, 집착으로 영혼의 모습이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때문에 즐거움과 집착의 사이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순간에 온전히 깊은 집중을 할 수 있다면 타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두려움을 딛고 삶으로 나서면 보이는 것들


22번은 두려움이 커져 길을 잃은 영혼이 되었을 때 조를 삼켜버린다. 그 어두운 소용돌이 안에서 조는 그동안 22번이 들어왔던 말을 보게 된다. 어른들이 무심코 내뱉는 평가와 비판은 무섭도록 아이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 긴 시간 동안 22번은 자신이 태어날 자격이 없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했고 이 생각은 태어나지조차 않은 영혼을 삶과 단절시켰다.


22번이 조를 삼켜버린 건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는 외침과도 같다.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알아달라는 마지막 발버둥이다. '내가 태어나는 게 틀린 일이면 어떡해? 태어날 자격이 없으면 어떡해?' 라며 무서워하는 아이의 얘기를 들어주고 손에 씨앗 하나를 쥐어주는 것. 그것이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조 역시 '당신의 전당'에서 자신을 보고 무의미한 인생이었다고 말한다. 계속되는 거절과 혼자 식사하는 모습까지 누가 보아도 쓸쓸한 실패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조는 같은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 한 순간도 무의미하지 않았으며 소중한 삶의 일부였다. 조는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불꽃이라고 여긴 공연 장면이 아니라 자신의 소중했던 일상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22번이 느꼈던 '삶'과 '삶의 기쁨'은 살아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들이다. 나무의 씨앗이 손에 날아들어 오고, 따뜻한 햇살이 포근히 감싸 오고, 바람에 낙엽이 춤추듯 흩날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거리에 가득 울리는 이 모든 따뜻하고 소중한 순간들이 우리의 불꽃이다. 살면서 이 순간들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불꽃'을 가지고 있다.





작품 속의 조가 맨홀로 떨어지고 '머나먼 저세상'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 영혼의 모습으로 어둠 속으로 떨어질 때 관객도 함께 그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선으로 이루어진 하얀 사각형을 지나 빗금으로 표현된 어둠 속으로 계속 떨어져 내리고 조 역시 입체적인 양감을 잃고 선으로만  표현된다. 조가 현실의 뉴욕 세계를 벗어나듯 우리 역시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관객에게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세계로, 작품 속 조에게는 삶이 시작되기 전인 태어나기 전의 세계로 공간이 바뀐다.


조가 사각형의 차원을 계속해서 지나쳐 태어나기 전의 세상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이미 그 공간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작품의 가장 마지막 순간 제리가 포탈을 열어 조를 지구로 보내줄 때 우리 역시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다. '어떻게 살 것이냐'라고 묻는 제리에게 조는 '순간순간을 살겠다'라고 답한다. 관객은 그 질문과 답에 자신의 삶을 대입해 생각해 보며 작품 속에서 나오게 된다.


픽사 애니메이션의 탁월한 점은 언제나 좋은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한다. 다시금 애니메이션의 매력과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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