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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두 codu Aug 25. 2022

<.사.누.최>에 아쉬운 점

솔직한 후기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너무나 많은 호평을 받은 영화지만, 나는 사실 불호에 가깝다. 정돈된 리뷰는 썼으니 여기에 솔직한 생각도 털어내려 한다.

https://brunch.co.kr/@codu/77



얄팍한 주인공

영화를 보고 처음에 든 생각은 '너무 얄팍하다'는 것이었다. 연출이나 음악, 대사, 연기는 흥미롭고 매력 있다. 그래서 영화로써는 재밌으나, 인물 특히나 주인공이 너무 얄팍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주인공 율리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나 내면의 이끌림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이 흥미와 호기심은 의대에서 심리학 그리고 사진으로 옮겨간 직업적 선택으로도 나타나고, 남자 친구를 만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이 충동적 선택들은 성적인 면에서 특히 거침이 없다. 율리에가 왜 그런 진로를 선택하는지에 대해서는 짤막한 내레이션이 전부지만, 심리학 교수와 관계를 가지고 사진의 모델과 스킨십하는 모습은 성실하게 보여준다. 이 사람은 진로 고민보다는 성적 관계에 집착하는 것이 분명한 듯싶다. 적어도 그런 면만을 보여준다. 나는 율리에라는 사람이 더 궁금했을 뿐이다. 그의 남자관계가 아니라.


율리에는 왜 글을 쓰고 싶어 졌을까? 사진을 찍는 모습은 악셀의 아픈 얼굴을 찍어줄 때 말고는 평상시에 거의 나오지 않는데 사진은 어떤 식으로 찍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며 뭘 좋아할까?(마약, 남자 말고) 나는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율리에보다 악셀이라는 사람이 어떤지를 더 잘 알고 있어서 조금 슬펐다.


주인공의 성장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가 '로맨틱 코미디' 인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성장'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이 영화는 율리에의 사생활, 즉 섹스 라이프에 대한 것만 나온다. 사진이나 글에 대한 생각이나 열정, 혹은 자가 자신에 대한 탐구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가 연애에 비해 율리에라는 사람이 나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서, 아니 나를 찾아가는 모습을 연애를 통해서만 보여주어서 아쉽다. 연애는 삶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나는 그의 연애밖에 본 것이 없다. 좀 더 자신에 대한 숙고를 할 만한 일이 달리 없었을까? 악셀의 죽음이 그렇게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도 그 많은 좋은 말들은 악셀의 말이지 율리에의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는 성장을 동반하나 감독은 주인공의 개인적 성장에 거의 관심이 없는 듯하다. 율리에는 자신을 조연처럼 느끼게 만드는 남자와 헤어지고 옆에 있으면 "완전한 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남자 에이빈드를 만난다. 어떤 남자도 여자를 완전하게 만들어줄 수 없다. '남자와 같이 있는 나'가 완전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홀로 온전하게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된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도 어느 정도 그렇게 생각했다. '현장에서 스틸컷을 찍으며 직업적 자아성장을 했구나' 생각했다. 그 배우가 에이빈드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정말 왜 굳이 이런 장면을 넣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이 장면은 율리에를 쓸쓸해 보이게 만들었다. 굳이 전 애인의 가족을 바라보는 얼굴을 잡으면서. 어떤 씁쓸함과 성장을 보여주려 한 것 같지만,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은 율리에가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타협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여성의 경험 후려침

물론 모든 사람들이 자기모순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꼬집어 내는 것은 유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이 다른 여자들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율리에를 긍정하는 것은 이 영화의 문제 중 하나다. 왜 환경보호와 페미니즘을 비웃나 의아하다. 두 가지 사안 모두 동참하지 않으면 “최악의 인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에이빈드와 악셀은 이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반발하는 반응을 보인다. 마치 '우리가 최악의 인간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고 너네가 유별나다'는 듯이. 아마 이것을 그저 유머로 넘길 사람이 많이 있겠지만 나는 그냥 넘길 수 없다. 이 영화 속 포스트 페미니스트와 비슷하니까. 소수의 의견을 조롱하는 것은 코미디나 유머가 될 수 없다. 그저 혐오다. 율리에는 여성차별에 대한 자각이 있지만 내적인 모순에 빠져있다. 이에 대한 관점은 간간이 드러난다. 감독은 여성들의 자기모순을 부각해 웃음 요소로 삼기를 반복한다.


영화를 보며 놀랐던 점 중 하나는 율리에에게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대학 친구가 자신이 남자와 동거하는 것을 부러워하는 눈치라며 연락을 끊었다. 그 외에 만나는 친구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애인의 친구들이 전부다. 파티에서 만난 낯선 여성들에게도 삐죽한 말만 늘어놓는다. 남자 친구를 만나는 것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데, 율리에의 인생에서 '친구'와 '우정'이라는 큰 영역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인물은 반쪽짜리가 되어버렸다. 율리에가 마지막 장면에서 혼자 사진 작업을 하는 것이 다소 쓸쓸해 보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남자들과 있을 때보다는 훨씬 안정적이지만 뭔가 부족해 보인다면 그건 여성과의 관계다.


남자 친구와 아기를 갖는 문제는 극 초반부터 계속 언급되어 왔던 문제다. 나이 든 남자가 어린 여자와 교제하며 아기를 갖는 일을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하지만 율리에는 여기에 계속 대답을 피한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고 혼란스러운 상태다. 결국 양쪽 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 남자 친구를 만났지만 실수로 임신이 되어버렸다. 율리에는 자기 자신보다 자신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를 걱정한다. 자신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임신중절은 고려해 보지도 않는다. 결국 아이는 유산되고 율리에는 묘하게 안도한다. 하지만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불안을 가볍게 넘겨도 되는 것일까? 유산을 그저 '끝나서 다행인' 상황, 성장의 한 과정으로 가볍게 그려도 되는 것일까? 염려스럽다.



몇몇 마법 같은 연출과 의식을 가로지르는 대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아쉽게 느껴진다. 여자에 대한 얕은 이해로 여성의 성장을 그리는 것은 조금 섣부른 일이 아니었나 싶다.

만약 성장 영화를 좋아한다면 이 영화는 추천하지 않는다. 연애와 관계에 관심이 많다면 추천하는 영화다.


당연하지만,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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