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아픈 손가락인 첫 손녀
남아선호 사상으로 아들을 좋아하신 우리 할머니
예외가 있었는데.. 첫 손녀인 내가 예외였다.
할머니가 제일 좋아한 큰아들에게서 태어난 첫 손녀
할머니가 본인의 딸인 고모 다음으로 제일 좋아한 여자였다.
물론 나도 처음부터 마냥 좋아하신 건 아니셨던 것 같다. 어릴 때 잠들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
"네가 아들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네가 아들이었음 얼마나 좋았겠니? "를 자장가처럼
이야기하신 할머니셨다.
그 이야기를 너무 들어 짜증이 났을까?
초등학생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다가 듣는 저 말이 너무나도 싫었다.
아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저 말을 자장가처럼 듣고 있는 나도 싫었고 그 넘의 아들 지긋지긋했던 것 같다.
벌떡 일어나 불을 켰다. 그리곤 할머니한테 소리쳤던 것 같다.
"엄마 배에 다시 넣어서 아들로 바꿔달라고 해라 할머니, 내가 딸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아빠한테 다시 만들어라 하라고!!! 다시는 아들 이야기하지 마세요! 손녀 안 할 거니깐!!! "
너무 속상하고 화난 어린아이의 절규여서 그랬을까?
아님 첫 손녀라서 애지중지한 손녀딸인데.. 그 손녀딸이 울면서 소리쳐서 그랬을까,,
알 수는 없지만 그날 이후로 할머니는 나에게 한 번도 아들 타령을 하지 않으셨다.
[ 할머니는 이 일을 기억을 하고 있으셨는지.. 왜 그랬는지 이 글을 쓰면서 궁금해졌다. ]
아들은 아이였지만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할머니 손에 귀하게 자랐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작게 먹으면 행여나 쓰러질까.. 밥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 우리 엄마를 나무라시며
어떻게든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하셨고
자고 있으면 과일을 깎아 입안에 넣어주셨다.
맛있는 게 있음 몰래 숨겨놓으셨다가 날 보면 입에 넣어주기 바쁘셨고 유일하게 할머니에게
용돈을 받는 손녀였다.
할머니 따뜻한 아랫목을 내어주고 밤이 먹고 싶다는 이야기에 삶음 밥을 밤새
칼로 벗겨내어 한입에 먹기 좋게 만들어 주시던 할머니셨다.
커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할머니의 손길은 여전히 날 향하고 있었다.
친정집에 가면 여든이 넘으신 나이에도 내가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꼭 끓여주셔야 했고
밥 맛이 없어 누워있으면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방에 넣어주셨다.
나는 늘 받기만 해서였을까?
사실.. 할머니가 날 많이 아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동생이 친정에 올 땐 밥솥에 밥이 없었던 적도 많았다고 하고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내가 누워있는 방에 넣어줄 때 동생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하더라
하;; 저 나이에도 차별을 하다니.. 대단한 우리 할머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노령연금을 받고 나라에서 주는 돈을 꼬깃꼬깃 모아서
어느 날부터인가 나한테 쌀팔아서 먹으라며 (햅쌀 사 먹으라며) 돈을 주셨다.
서른이 넘어 애 둘 엄마가 여든이 넘은 할머니께 용돈을 받다니..
처음엔 화들짝 놀라며 안 받는다고 했으나 돈을 던지고 가시는 할머니 덕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에게 이 사실을 말하니
우리 집에서 용돈 받는 건 나뿐이니 받으라고 했다.
시집가서 힘들게 사는 건 아닌지, 늘 걱정이셨고 할머니가 줄 수 있는 건 얼마든
내어주고 싶은 첫 손녀이기에 할머니 마음을 모른 척하지 말고 받으라고 하셨다. 그래야 할머니가 행복하다며
내가 마지막까지 용돈은 받은 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싶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도 주셨으니...
할머니의 넘치는 사랑을 받았지만
엄마와 동생을 대하는 모습에 좋았던 할머니가 많이 싫어지긴 했으나
안다.. 할머니가 첫 손녀를 생각하는 마음을...
어느 날
초등학생이었던 동생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 할머니방엔 여자 사진이 없는데... 유일하게 있는 게 언니 사진이다. 아나?
할머니는 언니만 좋아한다. "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할머니 방엔 할머니가 좋아하는 아빠, 작은 아빠, 손자들의 사진만 있다는 것을
그 중간에 유일하게 내 사진이 있었다.
그렇게 남아선호 사상이 가득한 할머니에게서 첫 정은 소중했던 것 같다.
나에게 할머니가 미움과 사랑이 공존하지만 소중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