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아 Mar 08. 2024

이런 남자는 또 처음이네?

”그때 솔직히 너한테 끌렸었어. 그리고 지금도 그런 마음이야.“

줄라이를 다시 만난 날,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바로 고백을 하게 되었고...


준과 나는 헤어졌다. 마지막으로 나를 배웅해 줄 때까지도, 그는 아침을 챙겨주고 짐을 들어주며 살뜰히 챙겨주었다. 점점 작아지는 준의 모습을 창밖으로 한참 바라봤다. 좋은 마음만 남기고 싶다 다짐했지만, 새로 생긴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도 느껴졌다. 


그 뒤로도 여행을 이어갔지만, 상당히 지쳐있다는 걸 깨달았다. 춤을 춰도,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도 마음이 금방 회복되지 않았다. 너무 힘든 날에는 친구들에게 얘길 털어놓고 울고,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이런저런 맛의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어떤 맛은 참 어처구니없게 달아서 재밌었다. 그것도 내키지 않을 때면, 눈에 태양의 잔상이 남을 때까지 노을을 한참 바라봤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줄라이와 만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로 아는 것도 별로 없이 내가 참 좋아했던 걔. 3년 전에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한 걔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솔직히 준에 대해서 잊고 싶은 마음에서도, 새로운 만남을 내심 기대했다.


우리는 번화가에서 만나 그의 집으로 함께 가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서 왠지 초조해서 강가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채-영?”

“아이고!”


멍때리고 있는데 외국인이 정확히 나를 부르는 음성에 너무 깜짝 놀랐다. 거의 넘어질 뻔한 걸 걔가 받쳐주면서, 인사를 했다.


“와, 예쁘게 하고 왔네. 너에 비해 나는 거지꼴인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줄라이는 수줍게 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거지꼴이라기엔 꽤 섹시해 보였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손사래를 쳤다.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그가 생각보다 낯설어서 나도 우물쭈물했다. 우리는 머쓱하게 말을 붙이며 거리를 거닐었다. 


줄라이는 거리의 음식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주려고 나에게 뭘 자꾸 사줬고, 내 리액션을 잔뜩 기대하는 눈치로 바라보았다. 하지만..맛 없는걸...거짓말을 못 하는 나는 그냥 그렇다고 솔직히 내뱉었고 줄라이를 좀 실망시켰다.


“넌 정말 만족시키기 어렵구나!”


나야말로, 니네 유럽 놈들은 맛을 모른다고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아직 낯설어서 조금 참았다. 간식만 먹고 아직 밥을 제대로 안 먹어서 돌아다니던 차에, 줄라이가 또 뭔가를 보고는 나를 이끌었다.


“아, 이거 여기 사람들은 자주 먹거든.”

그건 특별한 것 없는 조개찜이었는데, 약간 간간하긴 했지만 맛있었다. 내가 만족스러워 보이자 줄라이는 웃으며 날 놀렸다.


“드디어 좀 마음에 드세요?”

“아유, 네네. 감사합니다.”

“우리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 4년 정도 되었나?”

”그런데, 나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어.“

”뭔데?“

”그때 마지막에 같이 있을 때, 너가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기 싫어했던 거 같아서. 

혹시 무슨 이유가 있었어?“

‘니야 니..’


참 난처한 질문이었다. 난 쓸데없이 솔직한 사람인데, 줄라이가 빼도 박도 못하는 질문을 한 것이다. 그때의 나는 줄라이가 좋아서 집에 가기가 싫었다. 암만 생각해도 미묘한 기류를 느꼈던 것 같은데, 얘도 지금 그게 궁금해서 묻는 건가? 싶었다. 머리가 좀 복잡했지만, 역시 나는 솔직히 말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내키면 해야 하는 사람이었는지라, 결국 운을 띄웠다.


”그러니까 좀 민망한데. 그래도 좀 말하고 싶어.“

줄라이는 짐짓 놀란 표정으로 차분히 내 말을 기다렸다. 나는 걔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어딘가 귀퉁이를 보면서 말을 뱉었다.


”그때 너에게 끌려서 집에 가기가 싫었어. 그리고 지금도, 좀 비슷한 감정이야.“

줄라이는 무척 놀란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어색한 정적이 이어지다가 줄라이가 이내 말을 돌리는 것이었다.


‘우와, 진짜 개망했다!’.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솔직히 유럽에서 하도 대시를 받아서 퍽 자신만만한 상태였는데, 막상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하니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염병.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잘 기억이 안난다. 


근데 망한 데이트는 보통 집으로 도망가면 되는데 우리는 같은 숙소에서 같이 잤다.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늘 나를 상냥하게 대해준 좋은 친구기도 했기에 마음을 다잡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친구로 즐겁게 지내보자’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월의 사랑을 떠나보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