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맛은 없었어!
"아빠 아빠, 케이크 만들자아1"
"어...아! 만들까?"
아내가 회식으로 늦게 오는 날이었다. 나와 아이 둘이서 맞는 저녁 시간. 집에 와서 본격적으로 몸을 풀기 시작하던 딸이, 방방 뛰면서 케이크를 만들자고 외친다. 보통, 케이크를 만들자고 하면 거실에 있는 목조 케이크 장난감을 말한다. 그 장난감을 가져다가 초를 뽑거나 꼽거나, 케이크 조각을 나누거나 접시에 얹거나 하며 논다.
그런데 오늘따라, 동백이는 방방 뛰기만 할 뿐 케이크 장난감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나는 침실에 앉은 채로 아이와 말을 주고 받다가, 세번째인가 네번째인가, 케이크 만들자는 말을 듣자 불현듯,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빠랑 케이크 만들까?"
"응? 응! 좋아!"
내가 벌떡 일어나며 손을 잡자, 동백이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응! 하며 강한 동의의 의사를 나타낸다. 마음에 꼭 드는 일이 있으면 마치 화이팅을 외치듯 하는 몸짓. 자신의 뜻과, 접하게 된 감정이 딱 맞아 떨어지니 나오는 자연스러운 동작이리라. 그리고 나는,
"이리 와."
"응!"
이리 문득 갑자기 분주해졌다. 싱크대 앞으로 식탁 의자를 끌고 와 아이를 세워준 뒤, 나는 계란이며 우유, 밀가루를 꺼내고 볼을 아에 앞에 두었다. 케이크를 만들자니, 케이크를 만들게 해줘야지. 팬케익 가루는 없지만, 뭐든. 뭐라든. 이제 불이 뜨거운 줄 알고 요리가 위험한 줄 이해한 아이에게는, 마침내, 제 입에 들어갈 음식을 손수 만드는 각별함을 즐기게 할 일이다.
"이야아아아아~~~!"
"이야아아아아~~~!"
"이야아아아아~~~!"
"......"
"이야아아아아~~~!"
"이야아아아아~~~!"
"이야아아아아~~~!"
"아빠가 할게."
"아냐 내가 할게~."
"......"
참자. 참아야지. 동백이는 아빠가 거품을 내겠다는데도 한결같이 자기가 하겠다며 성화다. 거품기를 주니 더욱 열성이다. 물론 아이의 힘과 속도로는 거품이 올라올 리는 없다. 어차피 재미로 만드는 것이라 얼마나 맛있게 될까 싶긴 하다만, 조금이라도 거품을 내서 부풀려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을 모르고, 따님께선 한사고 자기가 반죽을 젓겠단다. 히유. 잘 났어 정말.
다음주면 딸이 태어난지 만 35개월이 된다. 한달 뒤면 세살을 채운다. 지금까지 잔병치레도 거진 안하고, 감사히도 삼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이제 아이와 보낸 시간들이 어느덧 까마득해진다. 1000일을 넘긴지도 오래. 그리고 그 기억은 빼곡히 차올라 있으니 어떤 기억들은 수 천 겹이나 앞선 기억의 책장 뒤에 남겨져있다. 볼살이 얼굴에 그득하던 150일. 처음 걷기 시작하던 300일. 아장아장 어린이집으로 걸어가던 500일. 그 많은 기억을 비료 삼아, 벌써 삼년이라니 감사하고 기특하기도 하지. 그리고 그 딸이 이제는,
아빠 손에 이끌려 팬케익을 뒤집고, 아빠의 소중한 마늘절구공이를 가지고 밀대 삼아 밀기도 한다. 프로주부의 딸로 세 해를 채우더니, 이제 주방에 있는 이것 저것들 못 휘두르는 것이 없다. 저 마늘절구공이는, 클레이 장난감을 조물조물 갖고 놀겠다며 어느새 꺼내 가 내가 매번 설거지를 꼼꼼하게 해야 하는 물건이 되어버린이 몇 주가 되었다. 그래서 손잡이 쪽에 미세하게 클레이 조각이 끼어있긴 한데, 상관은 없다. 우리 동백이는 지금 팬케익을 밀고 있다기보단 그 위에 굴리고 있는 상태다. 의미불명의 행위인데 뭐...그만큼 신이 나신다는 거겠지.
주방에 선 아빠의 모습을 매일 보고 자라는 딸의 삶은 어떤 것일까. 태어나면서부터 밤에는 내가 아이를 재웠다. 그래서 동백이는 엄마보다 아빠인 나를 더 따르는 편이다. 그런데다 이제 만 세살을 채우니 남성과 여성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좋은 점은 수영장 등에서 엄마가 씻겨야 하도록 아내와 나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아빠와 엄마의 구분이 아이의 인식에 자리잡으면서 한사코 아빠에게만 안기고, 엄마를 거부하는 일은 또 여전하다. 아직 한 없이 가볍기만 한 아이의 무게를 난, 그리워하고 그리워할 일이 언제고 오겠지.
"내가 내가."
"......"
"내가 할 거야."
"아니...먹는 게 아니라...올려야지..."
원래의 계획은 팬케익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사실상의 크레이프를 네 등분, 겹쳐서 올려주고 싶었고, 그 사이사이 아이스크림을 올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동백이는, 아빠의 계획 따위보다는 자기가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더니만 한 두번 숟가락질로 마침내 자기가 아이스크림을 퍼먹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자, 이제 아이스크림을 부지런히 자기 입에 넣는다.
"아, 잠깐만 동백아. 여기 올려야돼."
"내가아 내가 먹을 거야. 내가 다~~ 먹을 거야."
말도 잘해. 그런데 말은 드럽게 안들어. 이것도 내 딸 다운 태도다. 원래 이 시기가 자발성이 하늘을 찌를 시기라곤 해도, 영 겁도 없이 세상 다 자기가 해봐야겠다고, 그리고 아이스크림에 대해선 특히나 자기가 다 먹어버리겠다고. 그래서 아빠는 지금 속이 터진다. 사...사진...완성 사진...찍어야 하는데....
녹아...버렸잖니...
내가 네살 아이와 아이스크림으로 다툴 일인가 싶다. 간신히 약간의 아이스크림을 건사해서 아이에게 케이크를 만들어주었다. 사나이 김동백. 만 1062일. 케이크 만들다. 이 한장의 사진을 멋있게 남기고 싶었지만, 아이스크림을 제 때 쌓아올리지 못해 그만 이미 다 녹아버렸다. 그럼 뭐 어때. 오는 길이 보람찼다. 여러 개의 비디오, 몇개의 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사진도 영상도 아닌 우리의 소중한 기억이 남았다. 사나이 김동백이. 아빠랑 처음으로 케이크를 만들어본 기분은 어떠니.
"생일 축하 합니다아아아아아."
불꽃 같은 30분이, 작은 촛불 하나와 함께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런 건 꼭 아빠를 닮았다. 아빠도 너만할 때 맨날 부엌을 기웃거리다가 엄마한테 고추 떨어진다는 소리를 몇번이나 들었는지. 그러니 다음엔, 부디 아빠가 거품 정도는 내게 해줬으면 해. 아빠는 요리랑 네가 먹는 거엔 그래도 좀 진심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