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과 시그널
학교 안에서 한창 일을 많이 하던 시절, 같은 부서의 부원이기도 했던 선생님과 몇차례 "학부모의 학교 참여"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나는 학부모의 학교 참여가 신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이는 학부모의 학교참여가 "백해무익"하다고 말헀다.
이런 논의는 쉽게 판가름이 난다. 이론적 논리적으로 보편적 당위성을 주장하면, 개별 주관적 근거에 의존한 상대방의 견해는 반박이 쉽지 않다. "교육은 공적인 것이다. 학부모의 학교 참여를 통해 학습자 주권을 교육에 폭넓게 반영해야 하며, 일부 학부모의 교권침해 등의 문제는 더 많은 학부모의 학교참여를 통해 순치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에, 그이는 여러번 불편한 감정을 토로하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로 나는, 학부모의 학교 참여로 인해 매우 곤란한 일을 자주 당했다.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수업 및 평가 재구성"이다. 공교육의 공정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사교육 영향을 낮추어야 한다. 교사 수준에서 그 일을 하려면 수업에 학습자들의 참여를 늘리고 수업에 근거한 평가를 첨예하게 수행해, 수업 외적인 사교육 요소, 특히, 반복적 문제풀이의 개입 효과를 낮추어야 한다.
1학년에 자리 잡고 벌써 7,8년째 그 작업을 크고 작게 해오다보니 인근에 학생들 앞에서 날 씹어대는 학원 선생님들도 계시다 한다. 그도 그럴것이, 학원 선생님들에게 있어서 인센티브는 한 개의 학교의 수업과 평가에 충실하게 자신의 수업을 이끌어가는 것에 있지 않다. "학원 수강생=강사의 소득"인 구조 앞에서, 학원 선생님들은 여러 학교의 학생들을 받고자 하는 동기가 생긴다. 그럼 여러 학교의 학생들에게 각 학교의 기출문제를 묶어서 하나의 문제집으로 만든다. 학원 선생님 수준에서의 "기출 변형" 예측은, 각 학교 간 출제 경향성 차이로 보정될 것이라 기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매년 수업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니 나의 작년 수업과 출제, 올해 수업과 출제가 다르다. 현장에서 퍼뜩퍼뜩 수업을 고치고 새로운 설명을 더하니, 매주 매주의 수업이 다르다. 이런 수업 재구성을 지도하는 학급 내에서 균질화하고, 최종적으로 평가를 공정하게 치르는 것이 합리적인 수업과 평가 운영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이렇게 수업과 평가가 진행되면 일단 학원 선생님들이 피곤하고, 그 다음으로 학부모들이 고단하다. 고등학교에서 내신은 자녀의 미래에 직결되는 문제인데, 평가의 경향성을 알지 못하고, 출제 방향을 예측할 수 없으니 교사와 학부모, 학원 선생님 사이에 정보불균형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부모와 학원 선생님들이 협력하여, 교사의 수업 재구성이 "평가 공정성"을 침해한다며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시험이 끝나고 나면 학원에서 시험지를 뜯어본다. 그래서 티끌만한 오류라도 찾는다. 시험지에 오류가 없으면 수업에서의 편차를 찾는다. 그래서 같은 학년을 지도하는 교사들 간의 수업의 사소한 차이라도 발생하면 그것을 학부모가 받아서 대대적으로 공세를 가한다.
작년엔, 내가 작성한 수업 자료를 다른 선생님께 공유해서 학생들에게 제공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같은 자료를 받긴 했으나, 설명이 달랐다"라며 평가가 불공정했다고 주장한다. 올해는 초보적인 학습자료와 문제풀이를 아이들에게 배부했더니, 그것이 다른 학생들에겐 배부가 되지 않았다고 시험을 꼬투리를 잡는다. 문제풀이를 조금 더 시켰기 때문에 시험에서 유리할 수만 있다면 교사가 왜 굳이 수업을 할까. 하는 나의 반박은, 학교 관리자들의 벽에 막혀 학부모들에겐 닿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하는 최악의 불이익은 "저학력 학생"들과 "사교육 비참여 인원"의 피해다. 사교육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에 반발을 하니, 자연스럽게 사교육 비참여 인원들에게 돌아가야 할 교육과정 재구성의 혜택이 줄어든다. 그리고 교육청의 시책으로 "기초학력미달예방지도"를 해야하는데, 작년엔 이런 일이 있었다. 영어로 신문 기사를 작성하는 활동이었는데, 말 그대로 기초적인 영어 표현을 모르는 아이가 있었다. 상위권 학생들의 변별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간단한 설명을 진행했다. 그랬더니 득달같이 다른 반 아이들이 달려들어와 불공정을 외친다. 그 일로 나는 죄인이 되었다. 이러니, 기초학력미달예방지도라는 것을 교사가 할 수 있을까?
이상의 상황에 대한 나의 생각은, 여전히, 학부모의 학교 참여는 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기꺼이 내 수업을 전부 공개하고, 언제든 나에게 수업 자료를 제공하라고 한다면 모두 제공할 수 있다. 다만, 내가 이런 짓을 하면 학교의 다른 선생님들이 견디질 못한다. 문제는 학부모의 학교 참여가 아니라 교사의 분열상과 그것을 통합하지 못하는 학교 관리자들의 리더십이다.
교사는 분열하는 반면, 학부모의 단결된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학부모들의 핵심적인 생각은 "교육의 불공정"이다. 이것이 너무나 확고한 신념으로 굳어져있고, 그것을 보완하고자 하는 정책적 실천적 노력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초반부터 보수집단들로부터 수시 제도에 대한 온갖 공세가 가해지면서 혁신교육으로 쌓아올린 교사와 학부모, 학생 간 수평적 연대가 붕괴된 것도 한 요인이 되고 있지만, 그런 외부 요인보다는 우리 교사들의 문화가 경직되고, 외부의 상황 변화에 대처하고 있지 못한 점이 더 크다. 이런 조건 하에서 학부모는 "불공정한 교육 환경에서 내 아이의 이득을 최선으로" 하려는 행동을 고착화한다. 초등학교 단계부터 그런 문화, 담론, 목격을 경험해 온 학부모들에게 교사들에 대한 신뢰? 교육과정 재구성에 대한 이해? 공교육에서의 사교육 변인 통제? 글쎄...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그 대신, 학부모들은, "불공정한 학교교육에 맞설 어머니들의 저항"이라는 신념에 더욱 똘똘 뭉쳐가고 있다.
지금 나의 신세가 그렇다. 나는 "지도 학급에만 특혜를 주고, 다른 학급에는 불이익을 주는 이기적인 교사"로 학원과 일부 학부모들에게 찍혀있다. 내가 수업 때 어떻게 열과 성을 다하고, 평가에선 엄격히 공정성을 발휘하는지, 또, 어떻게 합리적으로 수업과 평가를 연계해, 학습자들이 학교 수업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알차게 쓰도록 하는지는 학부모들에게 고려되지 못한다.
이런 입장이 되니 수업 때 평가와 연계된 말을 입도 벙긋 못한다. 수업 때 가르친 것을 시험에 내는 것이 지당하건만, 오히려 수업 때 가르친 것을 평가 때 출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2020년 코로나 1년차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쌓아올린 나만의 디지털 융합 수업 재구성 자료들 역시 학생들에게 투여되지 못한다. 팔 다리 다 잘린 상황에서 건조하게 설명만 하고 교실을 나와야 하니, 수업 시간이 20여분씩 남는다. 아이들을 앞으로 끌어내 영작도 시키고 문법 문제도 풀도록 해야 하는데 말이다.
과연 교사의 분열상은 해소될까?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물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긍정적이다. 놀랍게도 말이지. 지금의 교육 보수화 기류 역시 다시 진보적 교육 아젠다와 함께 조정될 날이 올 것이고, 더 나은 학교장 리더십 아래에서 수업의 공공성을 증명할 기회 역시 찾아올 것이라 생각한다. 학원 선생님들은 평가에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수업과 평가를 분리해 최선을 다해 평가하면 될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아직 마음이 꺾이지 않았고, 굴육스러운 사과를 몇번 반복했지만,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서서히라도 움직일 충분한 의지가 남아있다. 더 나은 시기가 마침내 온다 해도, 그때에 우리 학교의 선생님들은 더 나이를 드시고, 더 갈라져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그때는, 그때 나름의 길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학부모와 교사가 이리 갈라지고 있는 시대에 학교의 내신 평가를 부정하고 직접적으로 성적에 개입까지 하려는 시도로 인해 불편함을 겪고 있음에도,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비교적 원인과 결과가 뚜렷하게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도 명확하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학부모의 학교참여는 그 길이 열려있어서가 아니라 열려있어야 할 문이 열려있지 않기에 다른 길로밖에 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학부모의 학교참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그럼으로써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온갖 일들을 막는 방법도 매우 명료하게 우리 앞에 놓여있다. 아무도, 굳이 그 짐을 지려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교육은 오늘의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다시 또 교실로, 의지를 가지고 들어간다. 가는 길 여기 저기 장애물이다. 그러나 장애물을 넘어서서라도, 아이들은 배워야 하고 나는 가르쳐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