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을 떠나보낸 이해찬 1세대, 그리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사람의 소회
"그런데 이 이해찬 1세대는 뭐고?"
스물 셋의 6월이었다. 학생운동권을 기웃거리다 뒤늦게 군대에 간 나는 훈련소부터 몇번이나 쓰던 자기소개서를 다시금 작성해서 중대장에게 제출했다. GOP를 담당하는 21사단, 소총부대에까지 흘러들어온 자원으로선 희귀한 서울 4년제 자원이었다. 그런 나를 행정병으로 쓰기 위해 별도로 신병 면담을 하기 위해 불려나간 길이었다.
"어...그, 1999년에 고등학교 1학년이 이해찬 교육부장관이라고, 그 사람 교육정책이 적용된 학번을 이해찬 1세대라 부릅니다."
"흐음..."
중대장은 초임이었다. 24살에 임관해 이제 28살쯤 되었을 것이니 1999년과 2000년 사이, 이해찬 1세대라는 말이 요란하던 시절 그는 한창 ROCT 임관을 준비하던 시절일 테니, 세상 일에 감감하긴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 무관심하더라도, '이해찬 1세대'가 뭐냐는 물음에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이해찬 1세대는 청년시절의 나를 규정하는 말이었다. 1999년의 고등학교 1학년부터 적용된 교육 정책에 따라 토요일에는 격주로 완전히 자율화된 교육프로그램이 운영되었다. 우리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며 삼겹살을 구워먹기도 하고, 학교에서 하루 종일 잡담을 하고 만화도 그리고 놀았다. 4시에 학교 수업이 종료되면 시작되는 방과후수업은 교과 중심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취미활동이 개설되었다. 나는 일본인 선생님에게 일본어 방과후를 들었다. "좋아하는 것만 잘 해도 대학 갈 수 있다"라는 정책비전 아래, 우리는 2년 뒤 맞이할 대학 입시에서 당구학과, 애니메이션 학과 등을 찾아보곤 했다. 우리는 수시입학 제도의 첫 적용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해찬의 교육개혁은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무너졌다. 김대중 정부의 교육경쟁 완화 정책에 따라, 1999학년도부터 수능 난이도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2000학년도에는 그보다 쉽게, 2001학년도에는 역대 최저 난이도 수준으로 만점자가 속출하였다. 이는 내신을 반영한 수시 제도를 위한 밑거름이었건만, 보수언론은 이런 '쉬운 수능' 정책을 쌍수들어 반대했다. 그리고 2000학년도 수능의 쉬운 난이도와 변별력 하락이 기화가 되어, 이해찬 교육부장관, 교육부총리는 자리에서 물러난다.
나에게 이 일련의 사건은 세상과 나를 규정하기에 충분한 계기가 되었다. 세상을 알아가는 토대를 쌓던 17살 소년에게, 교육경쟁의 지옥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한 일련의 교육개혁은 분명히 합리적이고 납득 가능한 논리에 기반하고 있었다. 내신을 반영한 수시 제도는, 중학생 시절 우리 학급의 반평균을 높여서 담임교사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대규모 컨닝을 주도하던 나로서 훨씬 합리적인 학사운영을 가능하게 했을 뿐더러,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과목에서 사교육없이 1년 내내 단 한문제도 틀리지 않도록 수업과 시험에 기울인 노력이 대학 입시라는 결실로 거두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도록 하기도 했다.
이해찬의 교육개혁은 2026년 현재로서는, 아니 이미 보수당 이명박 정부에서 2010년부터 추진된 창의적체험활동과 '인턴교사제'를 이용한 다양한 방과후수업, 입학사정관제를 활용한 심화된 수시제도 등, '오래된 미래'가 되어 현실에 안착하고 있지만 2000년 당시로서는 한국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통용되기 어려웠다. 김대중 정부가 국민적 교육열을 뚫고 '쉬운 수능과 무너진 변별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돌파할 역량도 부족했다. 그렇게 이해찬 교육개혁은 교실에서 '소거'되었다. 1999년, 이해찬 1세대로서 충분히 의미있는 학교생활을 보내던 나는 2000년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선, 0교시를 넘어선 -1교시 수업의 추천 대상이 되어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6시 30분부터 수업을 들었다. 총천연색의 학교는 다시 회백 잿빛으로 변했다.
그 후로 나는 자기소개서를 쓸 때가 있을 때마다, 나를 '이해찬 1세대'라고 규정했다. 그 말은 부조리한 세상으로 인해 무너진 학교교육의 피해자라는 당사자성을 외치는 것이었다. 언론은 나를, 우리 세대를 '단군 이래 최저 학력'이라 불렀지만 나는 이 경험으로 인해 언론의 부도덕함을 이해했고, 우리 교육의 취약한 토대를 발견했으며, 내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세상과 맞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의 수구적 권력은 나를, 우리를 '이해찬 1세대'라 부를 때 사악한 악의와 교묘한 언술적 기술을 듬뿍 담아 조롱했지만 나는 그 말을 늘 떳떳하게 사용했다. 나는 이해찬 1세대이다. 너희가 조롱했던, 그리고 너희가 두려워해야할.
그 길을 걷고 걸은 후에 나는 지금도 학교에 머무르며 교육을 이야기하고, 연구자가 되어 교육이 어떻게 휘청거리며 오늘까지 왔는지를 탐색하고 있기도 하다. 늘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교육에서의 민주주주의가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상상한다. 때로 정치는 이런식으로 사람을 일구어낸다. 내가 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거나 한 적은 없으나, 그가 뿌린 씨앗이 우리 교육에, 우리 민주주의에, 지금 이렇게 꽃피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나는, 그에 머무르지는 않으려 한다. 더 나은 교육과 더 나은 민주주의를 상상하며 교실에서 또 책상 앞에서 고민하고 쓰고 말한다. 이것이 나의, 이해찬 1세대로서 뿌리내려진 삶이다. 한 사람으로 불리게 된, 자신을 부르게 된 사람으로서의.
먼, 너무나 멀리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토록 짙게 내 삶에 내리깔린 그의 그림자를 보며, 시대의 거인이었음을 실감한다. 뒤늦게 올리는 추도사에 그를 존경하는 마음을 듬뿍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