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으로 만든.
"음 맛있어."
"흐음. 많이 먹으렴."
썰어주고 남은 김밥을 후루룩 입에 넣은 뒤 나는 냉장고로 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두개의 비요뜨를 꺼내왔다. 그리고 바깥양반 옆에 앉아 티스푼을 손에 들고 뚜껑을 땄다.
"오빠도 이거 먹지."
"난 됐다. 니나 먹으렴. 남기던지. 안싱겁니?"
"약간. 그런데 괜찮아."
바깥양반은 냉장고를 비워야 하는 주부의 마음은 모르고, 마트에 들를 때마다 사자며 고른 비요뜨를, 기회가 생긴 참에 치우는 내게 빈소리를 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녀석은, 절대 나에게 오징어순대를 남겨주지 않을 것이란 것을. 그나저나, 싱겁다니. 원래 간장도 조금 찍어먹어야할 녀석이긴 한데. 소금을 덜 넣은 모양인 것이 다음엔 좀 유념해야겠다.
"...야."
"응? 왜?"
그리고 예상대로, 바깥양반은 오징어순대의...귀와 맨 아래 접힌 부분만 남기고 자리에 일어난다. 그렇지 이녀석이 나에게 한조각을 양보할 리가. 그러나 뭐 어때. 나는, 비요뜨 두개를 다 먹은 뒤에 접시에 남은 두 점을 먹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아이와 함께 출근준비를 해야지.
"오빠, 뜨끈한 짬뽕 국물 먹고싶지 않아?"
"흠...가는 길에 시장 들를까."
바깥양반이 벚꽃을 보겠다며 나와 아이를 끌고 나가, 카페에 앉아 한가롭게 바람을 맞으며 물었다. 나는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짬뽕을 먹은지가 좀 오래되었기도 하고, 종종 짬뽕 만드는 상상을 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치킨스톡. 코스트코에서 별 생각 없이 산 조미료인데 요즘 이걸 쓰는 재미가 쏠쏠하다. 미역국에도 넣고 순두부찌개에도 넣고. 할튼 집에서 이것저것 요긴하게 쓴다. 그리고 짬뽕을 예전부터 만들고 싶었음에도 만들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그 치킨스톡을 써보지 않았다가 최근 다양한 조미료를 쓰게 되면서 미원과 치킨스톡, 다시다 셋을 조합해서 국물을 내는 재미를 붙였기 때문이고 이윽고 오늘 마침 짬뽕을 먹고 싶다고 하니 이 어찌 명분도 적절하니 짬뽕을 끓일만한 때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니까...오늘, 짬뽕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집에 오는 길, 마침 저녁이라 시장의 어물전이 장사를 정리하던 참이라, 오징어 두마리와 쭈꾸미 한바구니, 동죽을 샀다. 동죽을 5천원어치만 달라고 했는데 넉넉히 담아주시길래, 그 옆에 오만둥이도 조금만 담아주면 안되겠냐고 했더니 공짜로 한주먹을 휙 넣어준다. 나이스.
그리하여 집에 와서 동죽, 우삼겹과 대파로 먼저 기름과 육수 베이스를 내고, 고춧가루, 치킨스톡, 미원, 다시다로 국물을 만든 뒤 마지막으로 오징어짬뽕까지 투하. 나는 짬뽕탕을 만들어 밥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바깥양반은 라면 면발을 먹고 싶다고 한다. 뭐, 좋은 일이지. 그리하여 바깥양반게는 짬뽕라면. 나는 짬뽕밥으로 저녁식사.
"잠깐만 나갔다 올게."
마침, 오늘 저녁시간에 당근 거래가 있어서 나는 먼저 식탁에 아이와 바깥양반의 밥만 떠주고 후다닥 집을 나섰다. 아이 장난감을 팔고, 집으로 올라와 맛있는 한끼.
오래 기다린 짬뽕이다. 늘 만들려고 했는데, 치킨스톡을 사고 나니, 해물을 사는 것도 어련한 일이어야지. 동죽과 쭈꾸미는 딱 반반씩만 썼다. 그러나 쭈꾸미는 쭈꾸미대로 쓸 일이 있고, 동죽은 또 쓸 일이 있을 것이고...그나저나, 한글을 깨치기 전부터 쭈꾸미를 먹어온 나에게, 딱 봐도 알배기가 아닌 것들을 알배기라고 속인 어물가게 젊은 주인들은 내가 이번에 기억해둘 테다.
그리고 본론. 오징어 두마리를 사, 한쪽 다리만 샀다. 어물가게에서 "잘라드릴까요" 묻길래 "오징어 순대 만들건데 속만 따주세요"했더니 아주 나이스하게 오징어를 손질하고 뼈까지 빼주셨다. 쭈꾸미...로 날 화나게 하지만 않았더라면...
바깥양반은 누룽지 오징어순대에 아주 환장한 사람인데, 일요일에는 근처 아파트에 야시장이 열렸다기에 가서는 누룽지 오징어순대를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오징어순대 한마리에 15000원. 아휴야. 오징어가 금값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 만원에 두마리를 사와서 찹쌀을 불림과 함께 볶아서 빨리 익혀내고, 당면, 당근, 양파, 대파, 다진 오징어다리로 빠르게 속을 채웠다.
그래서 슥슥, 오징어 순대도 완성.
저녁을 먹은 다음 설거지와 함께 오징어 순대까지. 7시쯤 집에 와서 어느덧 아홉시를 넘어간다. 아이와 바깥양반은 방에서 휴식 중이고, 나는...나는, 이걸 찜기에 넣는 것으로서 마침내 휴식이다. 그래도 보람이 있다. 만원에 두마리의 오징어 순대가 나왔으니, 내 노동이 1시간에 2만원의 가치를 창출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좋은 일은, 이 또한 내가 기다려온 요리라는 것.
오징어순대가 터무니없어진 재작년부터, 나는 늘 오징어순대를 하고 싶었는데 이유 없이 미루고 있었다. 이번에 마침내 만들어 아주 속이 시원해.
늘 그렇지만, 만들고나면 별것도 아니다. 딱 하나, 괜찮은 가격에 생물 오징어를 사는 게 고민인데, 이마저도 오늘 짬뽕과 함께 만드니 가격에 대한 고민도 사라졌다. 맛있게 짬뽕을 만들어먹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만드는 오징어 순대. 저녁 시간에 하루 날잡아 함께 만들기가 딱이야.
다음날 아침.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차갑게 식은 오징어순대가 칼을 대는대로 슬슬 잘린다. 한가지 고민이라면, 누룽지를 만든다고 팬에 기름을 두르고 굽는 가운데 오징어가 다시 한번 줄어들어버릴 것이고, 그래서 순대가 터져나오지 않을 적절한 두께를 찾는 것 뿐인데...그것까지는, 처음이라 모르겠다. 일단 오늘 한마리만 해보고 내일 또 한마리를 구울때 해봐야지.
어제 순대속을 만들고 납은 찹쌀밥은 김에 싸서 계란에 한번 부쳐뒀다. 튀김을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럴 여력까진 없어서, 간단히 계란김밥 서타일로만 하는 걸로. 바깥양반이 드라이를 하는 동안 계란김밥과, 오징어 순대를 치익치익 그을려가며 굽는다. 요리를 하고자한 나의 열망과 그것을 먹고자 하던 바깥양반의 열망이 결합된 오징어순대. 요리를 하는 건 이런 보람있는 일이다.
최근에는, 나이가 40대 중반이 되어서 그런 것인지 이런 삶의 모양새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하곤 한다. 매주 두세번씩 대학원을 가, 아이의 칭얼대는 목소리를 전화 너머로 들으며 밤늦게 집에 오는 일. 운동을 젖혀두고 밤낮으로 문서나 읽는 일. 이렇게 해서 얻어질 박사학위는 나에게 무슨 길을 밝혀줄 것인가, 그러는 사이에 이렇게 글을 쓰고, 음식을 장만하는 일은, 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무엇에 더 성심을 쏟아야 할까 등등. 대개는, 가족이 우선이라는 뻔한 답이 제안되지만 내 경우엔 그렇지도 못하다. 인생에 한번 겨우 주어질 공부의 시간인데 여기에 소홀한 것도 문제이고, 종합적으로 이 모든 삶의 흐름이 촉박하고 타이트한 것에, 다른 과실이 없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 자체에도 뭔가 의의는 있다 싶고.
뭐 그런, 기다림이 해결해줄 고민에 대해서다. 어쨌든 그 기다림은 어젯밤과 오늘 좋은 결말을 맞았다. 내일 아침에도 바깥양반에게 주어질 또 한그릇의 누룽지 오징어 순대와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