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밥에 대한 찬사

아이가 첫 쌀밥을 입에 넣는 순간의 그 진한 감정

by 공존

배가 고픈 아이는 의자에 앉히자마자 소란을 피우며 두 팔을 벌려 자기 밥상을 내려치기 시작한다. 아빠가 밥공기를 들고 마주 앉으면 아이는 살구씨만한 입술을 앙 하고 벌린다. 아빠는 흰 쌀밥을 숟가락에 아주 조금 살짝 떠 아이에게 물린다. 아이는, 늘 먹던 말랑말랑한 아기용 숟가락이 아닌 어른들이 쓰는 은색 쇠숟가락을 와락 입에 물더니, 그것을 빼내려고 하는 아빠와 힘겨루기를 한다고 단단히 물고서 피시시 웃는다.


아이의 작은 입에 큰 숟가락이 물렸으니 양쪽 입고리가 쭉 찢어져, 안그래도 웃는 모양새. 이윽고 숟가락을 빼내고 나면 아이는 처음 맛보는 흰 쌀밥의 이물감에 “응?” 하고 의아하다는 반응을, 그 다음엔 팥알만한 흰 이로 흰 쌀밥을 오물오물 무느라 마치 사탕을 빨아먹는듯한, 휘파람을 부는듯한 입모양을 한다. 그리고 잠시 뒤엔, 입 안에 쌀밥의 달콤함과 구수함이 번지자 좋아서 손뼉을 친다. 입술 사이로 삐져나온 쌀밥을 집던 손이라 밥풀떼기가 붙어있어, 그것을 보는 아빠와 엄마는 빵 하고 웃음이 터진다. 그리고 아빠 엄마의 웃음에, 아이는 더 크게 웃으며 손뼉을 친다.


아마도 이것은, 이 땅에 살아온 사람들이 품어온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깊숙한 자리에 차지하고 있는 감정. 아이가, 처음으로 흰 쌀밥을 입에 머금는 순간.


나는 잡곡을 늘 먹는터라 흰 쌀밥을 먹을 일이 많지 않다. 식감이 좋아서이기도 하고 밥을 빨리 먹는 편인 식습관 탓에, 그나마 잡곡이라야 씹어삼키며 천천히 먹는다. 적어도 콩은 필수, 보리에 현미까지 최소 3곡, 많게는 귀리에 찹쌀까지 5곡은 쉽게 넘는다. 평생 흰 쌀밥만 먹어온 아내가 나에게 시집을 와, 해주는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고생이다. 그래서 나와 아내에게 흰 쌀밥이란 더욱 멀리 있는 물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하얀 쌀밥을 입에 머금는 그 순간, 아이의 첫 탄생처럼 그것은 나에게 단지 그릇에 담긴 밥이 아닌 생의 시작으로 다가왔다. 밥에 담긴, 그 오랜 이야기들.


풍요와 사치가 미덕이 된 오늘날 한 그릇의 흰 쌀밥이 갖는 의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보릿고개를 넘기며, 허리가 뽑혀나가는 고통을 참으며 모판을 나르며, 한 여름 타는 햇볕 아래 매일 같이 피때기를 뽑아내며 다리에 붙은 거머리를 떼어냄으로써 얻어지는 감정. 추석 전 수확되는 조생종이 아니라 온 들판이 노랗게 물드는 양력 10월의 가을 걷이로 수확되는 중생종을, 갓 도정해서 한 아름 가슴에 품어서 집으로 달려올 때 느끼는 설레임이다. 가을걷이 된 햅쌀. 그것은 반찬도 필요 없이 제 스스로가 밥도둑이다. 한참이나 달디 단 흰 쌀밥을 뜨순 기미와 함께 삼키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물 한사발, 그리고 김 몇장을 챙겨 상을 차려 앉으면, 그때부터 배가 터질만큼 밥은 내 입안으로 들어간다.


그날까지의 하루 하루. 폭풍우치는 밤을 꼴딱 밤을 지새우고 동이 트자마자 논으로 달려가 물꼬를 트고 쓰러진 벼를 다시 세우는 농민의 하루. 하루 종일 논일을 해 허리가 뽑혀나갈만큼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와, 뻘과 진흙을 씻어내고 방 안에 들어가면, 두 볼이 피둥피둥 붉게 살찐 아이는 내게 안기고, 그때 농민은 하루의 시름을 아이의 품에 녹여내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가을걷이 된 흰 쌀, 아주 싱싱하고 달고 차진 그 쌀밥을 한솥 지어, 마침 팥알처럼 작은 이가 가지런히 솟아오른, 막 걸음마를 하려 하는 아이를 품에 안고, 뜨순 밥을 후 후 불어 아이에게 물려본다. 아이는 흰 밥알을 입에 머금는다. 그리고 씹고, 웃는다. 삼킨다. 아이가 잘 걷고 잘 자고, 옹알이를 떼는 등 부모의 기쁨은 가이없다만, 아이가 잘 먹는 순간의 행복에 비할 것이 또 없다. 그것도, 가을걷이 된 흰 쌀밥을 아이에게 처음으로 물리는 순간의 기쁨이라면.


숟가락이 계급 차별의 상징이 된 시대에도, 그 숟가락에 담기는 이야기는 여전히 진실되다. 모든 부모는, 아이가 배부르게 먹길 바라며 미음을 쑤고, 밥을 짓고, 숟가락에 올린다. 아이가 걸음마를 하고 이도 날 때쯤 되면 부모의 손에서 숟가락을 잡아챈다. 자기의 힘으로 밥술을 드는 때가 아이가 처음으로 쌀밥을 먹을 때다. 여기까지의 한 해 살이. 아빠와 엄마의 하루 하루가 만들어낸 한 해. 그리고 한 해의 농사로 만들어지는 한 그릇의 흰 쌀밥. 여기서, 다시 생은 시작되고, 또한 어버이는 지금까지의 노고와 시름도, 앞으로의 염려와 걱정도 잠시 떠나보내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이의 살구씨만한 입이 오물오물 밥을 머금는, 이 한 순간.


그때에 우리는 발 붙이고 사는 이 땅의 기억에, 지금까지의 우리의 모든 감정에 닿는다. 다시는 오지 않을 첫 한 숟갈, 첫 한입의 쌀밥, 그 기쁨의 순간. 그리고 아이가 평생을 살아가야 할 시간들과, 평생 먹어야 할 쌀밥에 대한 마음을. 아이가, 내내 밥그릇 그득하게 밥을 먹도록. 숟가락엔, 새로 한 흰 쌀밥이 내내 뜨끈하도록.


아이의 따듯한 밥 한그릇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 부모가 되는 일의 다른 이름일진저.


흰 쌀밥에 아삭이고추 하나 다 먹고 냉수를 들이키는 폭풍 12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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