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일 우리가 통 속의 뇌라면?
1. 통조림이 된 천재과학자를 아시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 <나무>에는 '뇌가 된 과학자'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한 위대한 과학자가 스스로의 뇌를 순환장치와 양분액이 담긴 수조에 넣어, 수백년간 살면서 탐구를 해나간다는 이야기다. 이 과학자의 가족은 그를 소중히 모시며 대대손손 그의 존재를 자손들에게 가르쳤는데, 세월이 좀 흘러 문제가 생긴다. 12대손 쯤 되니 이제 아무도 이 조상님의 살아있는 뇌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고, 거실의 장식처럼 놓아두었던 것이다.
과학자의 후손인 어린 꼬마 아이가 있어, 하루는 부모님이 외출한 사이 이 과학자의 뇌를 갖고 놀기 시작했다. 소금과 식초, 케첩 등등을 과학자의 뇌, 아니 과학자가 남긴 통 안에 붓기 시작한다. 기존의 안정화된 양분액의 성분이 아니라 새로운 화학성분들이 들어오니 과학자의 뇌는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자극에, 완전히 새로운 지식의 영역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마치 강력한 근육강화제를 맞은 운동선수처럼 과학자의 뇌는 수천 수만가지의 진리를 깨우쳐간다.
그러나 과학자가 우주 삼라만상의 진리에 가까워질수록 자손 꼬마아이의 장난도 심해져, 마침내는 뇌를 꺼내서 바닥에 집어던지고야 만다. 입도 눈도 귀도 코도 손도 발도 없어 외부와의 소통이 차단된 과학자의 뇌는, 키우던 개에 의해 잡아먹힌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다른 여러가지 <나무>의 단편집 주에 왜 이 이야기에 유독 내가 관심을 갖는지, 예전엔 미쳐 몰랐는데 조금 공부를 해보고 나니 이 단편의 이야기가 인간의 존재에 대한 꽤나 본질적인 사유를 담은, 보편적인 이야기였다는 걸 알게 됐다. 역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에는 보편적인 가치가 담겨 있다고 할까.
"통 속의 뇌"는 서양철학의 존재론 탐구에 있어서 꽤나 유서 깊은 비유다. 혹시 우리가 통 속의 뇌라면? 이라는 가정으로,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이 모든 것이 뇌 속에서 이러나는 사고의 작용이므로 혹시 우리가 사실은 실제 육체를 가진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사육되는 존재일 뿐이라면?
바로 그런 가정을 담아낸 영화의 초급편이 <트루먼 쇼>, 심화편이 <매트릭스>다. 두 영화 모두 우리의 인식이 허구에 불과하며, 실재는 그와 다른 무엇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하는 데카르트의 멋진 철학 명제에 대한 카운터 펀치. 생각하고 있는 나는 그 존재만으로 과연 의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나의 생각 자체가 무언가에 의해 조작되고 있다면?
내가 고등학생일 때 매트릭스 1편이 나와, 세상이 온통 뒤집어진 것인 양 매트릭스가 이 '통속의 뇌' 비유에 담긴 존재론 철학을 얼마나 깊이 있게 담아낸 것인지 아냐며 책도 나오고 강연도 열리고 야단법석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러한 전문가들의 경악은 환생이나 호접몽, 구운몽 등 이미 동양철학에서 실재와 비실재의 문제가 흔히 다루어진 참이라 우리나라에선 대중의 지지를 받진 못했다.
이 글 역시 그러하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통 속의 뇌에서 일어난 사건을 우리 인간들의 삶에 비추어서, "사실 우리도 모두 매트릭스에 갇힌 통속의 뇌 아니야? 하는 질문은 아니다. 그보단, 이 글은 뇌가 된 과학자 그 본인에게 관심이 있다. 소설 속에서 과학자는 식초와 소금, 케첩 등에 절여져서 수천 수만가지의 진리와 우주 저삼라만상의 원리를 모두 깨우쳤다고 하는데, 과연 과학자의 그 순간의 각성은, 그때 깨달은 진리들은 참인가? 아니면 단순히 강력한 화학반응으로 생겨난 혼자만의 착각일 것인가?
문학적 관점에서 이 과학자가 깨달은 지식들은 참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취한 글의 구성이, 그가 마침내 먼 후손에게 버려져 개에게 먹히는 아이러니 구조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가 깨달은 모든 지혜가 한낱 착각이었다고 해석하고 개에게 먹이는 것과, 아니면 그가 깨우친 모든 진리들이 정말로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을 그런 것이었다고 해석하고 개에게 먹이는 것의 아이러니함은 크게 다르다.
그러나 반대로 과학적 관점에서는 과학자의 진리가 참일 수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한 지성으로 우주의 삼라만상을 깨우친들, "어떻게 그것이 참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때부터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논리로 변하여 낱낱이 해부되어야만한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반박 불가능한 명제가 되기까지의 세월을 견뎌내어야 하는 것이다.
과학자가 마지막의 순간 깨달은 것은 진리였을까 한낱 환상이었을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 다시 실재와 허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된다. 다시 우리 이야기에 집중해보도록 하자. 과학자가 마지막에 깨달은 것이 진리인지 참인지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참과 거짓, 삶과 가치
과학자의 삶은 가치있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육체를 버리고 오로지 지식만이 존재하는 세계로, 영생을 바라며 들어갔다. 그리고 성공했다. 그는 수백년간이나 더 살면서 자신만의 완전한 진리의 세계를 살았다. 비극적으로 개의 먹이가 되는 일만 겪지 않았다면, 그는 비록 타인과의 교류를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완벽한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에 어떤 가치가 있냐고 묻는다면, 그의 삶은 적어도 타인에게는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가 조금이라도 가치로운 존재였다면 고작 거실의 장식품으로 쓰이다가 어린 아이의 놀잇감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영생을 위해 육체를 버린 선택은 그 스스로를 타인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과학자가 스스로의 그러한 삶에 만족을 했다면? 그럼 또 질문은 재미있어진다. 타인과의 교류를 포기한 것이 바로 그가 선택한, 어쩌면 그가 바라던 거싱었다면 타인에게 가치를 갖고 갖지 못하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치 벼랑 위에 세워진 수도원에서 신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지며 한 평생을 살던 옛 수도사들처럼.
그러나, 또 이렇게 수도사에 비유를 하면 과학자의 입장은 굉장히 난처해진다. 과학은 종교가 아니기때문이다. 진리는, 과학은 종교가 아니다. 철학조차도 한 사람의 사고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완성된 자기의 생각, 자기의 철학은, 그것을 반드시 타인에게 풀어내어 검증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자의 삶은 최종적으로 가치가 없는 선택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가 깨달은 것이 참이든 거짓이든, 어느쪽이든 무의미한 것이다. 타인과의 교류를 택한 그 시점에서 그는 인간의 육체만 버린 것이 아니라, 과학 자체를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이란, 진리란, 스스로의 생각으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토론, 논쟁, 검증을 통해 이룩된다.
이런 논의의 결과는,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가치는 타인과의 관계, 교류에서 발생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다시 종교라는 절대자의 관점이 아니라면, 상당히 그렇다. 예를 들어 천문학적인 부를 지닌 사람이라면, 그가 자신의 부를 인식하는 방법은 타인의 상대적 빈곤을 인식할 때 뿐이다. 높은 성취를 이룬 사람이라면, 그 성취를 이루기까지의 나약했던 자신의 모습과의 비교를 통해 삶의 가치를 인식하는데, 이 때의 이전의 나의 모습은 철학적으로, 타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타인과의 교류는 삶의 가치를 발생시키지 못한다. 어떤 부자는, 빈곤한 사람을 인식하고 "거지들." 하며 비웃을 수도 있다. 어떤 천재는 일반 대중을 보고 "어휴 어리석은 자들."하며, 스스로의 몸을 통 속에 가둬 타인과의 교류를 차단하고 혼자만의 영생을 추구할 수도 있다. 타인과의 좋은 교류 방식이 있고, 나쁜 교류 방식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봉사나 기부일 수도 있고 협동과 소통일 수도 있다. 요점은, 타인과의 교류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점검하고 드높일 방법을 "일일신우일신"해가는 것.
3. 가치로운 삶의 첫걸음
가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타인과의 가치로운 교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그렇다면 어떤 방식이 가능할까? 나는 다시 뇌가 된 과학자에게로 잠시 이야기를 되돌리고 싶다. 다른 사람과의 교류 그 자체로 말이다.
타인과의 교류라는 방식은 "실천"이다. 그러나 실천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인식"이므로, 먼저 실천 이전에 우리의 인식을 갈고 닦는 것이 필요하다. 게다가 이 글이 대상으로 하는 교사들의 직업적 실천은 지식을 조리해서 학생들에게 편하게 먹이는 것이니,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지식을 탐색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기 전에 자신의 교육 실천에 대해서 가치를, 점검하고 따져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을 가치롭게 하기 위하여 타인과의 교류를 하기 전에 먼저 거쳐가야 할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를 조목조목 따져보는 것으로, 특히 타인과의 관계맺음을 나뭇가지로, 지식의 해석과 가공을 줄기로 하는 교사라는 사람들에겐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다.
그리하여 모든 이에게 중요한 글쓰기라는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교사에게 글쓰기란 무엇일까? 교사가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의 인식을 다듬어 더 나은 실천을 이끌어내고, 더 나은 지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그를 통해, 자신의 삶의 가치를 부단히 향상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본격적인 교사의 글쓰기에 대한 논의에 앞서서 세가지, 글쓰기의 소용을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나의 생각의 옳고 그름을 확인할 수 있다.
2. 타인과 교류의 장을 연다.
3. 세상을 보다 올바른 길로 이끌어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