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소용

(2) 글쓰기의 세 장점

by 공존

1. 나의 생각의 옳고 그름을 확인할 수 있다.

2. 타인과 교류의 장을 연다.

3. 세상을 보다 올바른 길로 이끌어나갈 수 있다.


앞서, 위의 세가지 장점을 글쓰기의 소용으로 짚었다. 이에 대하여 먼저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우리는 옳고 그름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게 산다.


이대남은? 남혐과 여혐은? 성평등은? 일베는? 국뽕은? BTS의 군대 문제는? 일본과의 관계는? 우리 교육의 문제는? 빈부격차는? 공정과 상식은? 나는 누구인가? 군대는 왜 존재하는가? 종교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그것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강렬한 신념을 갖고 있을 뿐, 그것에 대하여 자세히 실상을 논의하려 하면, 이내 손을 흔들며 돌아서 버린다.


많은 경우, "어려운 일" 이라거나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입장으로, 자신이 품고 있는 신념에 대한 성찰을 거부한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라면, 자신이 그에 대하여 충분히 숙고하여 규명할 수 있기 전엔 감히 주장하지 않는 게 좋고,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면, 말 그대로 상관이 없는 일이므로 함부로 입을 열어 떠벌릴 이유가 없다. 자신이 갖고 있는 강고한 신념, 그것을 주장할 의지만 있을뿐 그것을 부정당하는 수모를 감당할 용기는 없는 것이다.


글쓰기는, 나의 생각의 옳고 그름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집을 지어올리는 일이다. 삐뚤빼뚤 해도 되고, 길고 짧아도 된다. 어느쪽이든 스스로 문장이란 벽돌을 쌓아가다보면 스스로 알게된다. "어 이 집은 무너지겠네."하는 생각이 들며 글을 다시 고치게 된다. 마치 자기 집을 가꾸듯, 모래성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게 토대를 단단히 하고 성탑을 두껍게 세우듯, 내 생각을 담은 그 글을 차츰 차츰 다져나가게 된다.


나는 20대 시기를 하룻밤에도 백 개를 넘는 악플들과 싸우며 여러 날을 보냈다. 대학 커뮤니티와 블로그가 싸움의 무대였는데, 생각과 신념, 이상들이 부딪히는 공간에서 그러나 이게 꽤나 안전한 방편이라 생각했다. 누가 와서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도 아니다. 글 줄 얼마쯤 썼다고 주먹질을 하는 것도 아니다. 대개의 경우 선을 넘고 무례를 범하는 것은 상대방이었고, 나는 한결같이 생면부지의 타인들과 옳고 그름의 문제를 두고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내가 악플과의 싸움을 벌이던 나날 얻어낸 것은 승리감이 아니라, 어떠한 형태의 "배움"이었다. 내가 무언가 잘못된 주장을 할 때 가차없이 비판의 칼이 날아왔다. 그리고 석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넌지시 내 생각을 깨트려주기도 했다. 그저, 내 생각의 집을 지어 올리는 일을 반복했을 뿐인데 집단지성의 바다에서는 언젠가 한번씩 파도가 내 발밑으로 밀려들곤 했다. 그렇게 나는 혐오에 대해, 욕망에 대해, 국가주의와 몇가지 정치 사상에 대하여 별도의 학습을 거치지 않고도 "정돈된 견해"들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 소요된 것은 단지 책과 키보드 둘 뿐이었다.


그러니, 글쓰기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학습의 의의, 내 생각의 옳고 그름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는 일의 가치를 사람들이 감사히 여기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지만, 마치 굉장히 운동과는 먼 몸뚱이를 갖고 처음 헬스장에, 손목에는 사물함 열쇠를 감고, 들어가는 사람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옳고 그름에 대해선 이야기하길 두려워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글쓰기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20세기가 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 상대방의 뺨에 장갑을 던진 뒤 날을 잡아 총을 챙겨나왔다.


Duel from English Spy by B Blackmantle ill R Cruikshank1825.png 유럽인들 : 주님이 정의로운 자를 이기게 해주시겠지

두번째 글쓰기의 소용은 타인과 교류의 장을 연다는 것이다. 먼저 확인하고 넘어갈 것은, 여기서의 교류가 친교과 자존감을 위한 교류는 아니라는 점이다. 친교와 자존감에 굶주린 사람은 이미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냥 적당히 이미지를 잘 찍어서 아무 SNS에나 올리면 손쉽게 그것들을 품앗이하려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여기서 말하는 교류란 지혜에 기반한 교류다.


글을 써나가다 보면 차츰 나와 생각(감수성이나 취향이 아닌)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과 차츰 이야기를 이어가고, 고민을 열어가다보면 더욱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거기에서 새로운 경험도 쌓아나가게 된다. 문학이든 논작이든, 세상엔 여러가지 종류의 글이 있고, 글이란 것이 우리 삶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언어를 물질로 치환하는 일인 탓에, 반드시 그 글에는 타인과의 연결지점이란 것이 생긴다.


2009년이니까, 벌써 꽤 된 일이다. 정조가 신하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300여통이 발견된 바 있다. 당시까지의 역사학계의 연구에서는 심환지가 노론에 속하는 정조의 정적이었는데, 이 편지의 내용을 보니 사실 심환지가 정조와 맞선 것들이 모두 정조의 정국 구상이었음이 드러났다. 정조는 이 편지가 누설될까 두려워 반드시 읽은 뒤 폐기하라고 당부했지만 심환지는 재미나게도 그 편지들을 잘 모셔두었다.


인터넷 속어로 '일기는 일기장에' 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을 나름 열심히 썼는데, 그 글의 내용에 대해서는 논박할 가치도 없다며 아무도 읽지 않을 일기장에나 쓰라는 악담이다. 그런데, 아무도 보지 않을 일기장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비밀주택에 숨어든 한 소녀와 그의 가족의 삶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도록 단단히 일러둔 글이 밝혀져, 기존의 역사 이론을 뒤집었다. 글은 쓰여지면 그 순간 타인과의 연결고리로 작용하게 된다. 당장, 내가 내일 교통사고가 나서 죽기라도 하면, 남은 사람에게는 지금까지 내가 해 온 SNS의 낙서 조차도 소중한 나에 대한 기억이 될 것 아닌가.


나는 20대 시절 내내 무언가 전문적인 경험과 지식을 쌓지 않고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무리 날카롭고 예리하게 논리를 벼려내도 현상 이면의 실재를 보고, 그에 대한 논의를 접해온 전문가들과는 글의 깊이가 달랐고 단 한 문장도 그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마치, 헬스장에 나름 열심히 가서 매일처럼 몸을 다듬어도, 수년간 인고의 시간을 거친 조각같은 몸매를 가진 사람들에 비교할 수 없듯 말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도 꾸준히 쓰여진 나의 글에는, 잊을만하면 와서 사람들이 읽고, 내게 말을 걸어주었다. 잘 쓴 글엔 좋은 말, 못 쓴 글엔 격려의 말.


하니, 닫아두고 싶을 땐 닫아두어도 좋다. 물론 기왕이면 열어두는 것이 좋다. 내 생각을 정리해서 모아두면, 그것이 언제든, 언젠간, 타인과 만날 수 있는 징검다리들이 된다. 글쓰기는 매우 안전한 일이다. 누가 와서 주먹을 날릴 일은 없다. 누군가가 내 글을 헐뜯는다 해도, 그것은 내 글에 실제로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이니 그냥 비판은 비판대로 겸손히 받아들이고 고치면 될 일이다. 이런 매너를 배우는 것 또한 글쓰기의 소용, 그리고 타인과의 교류를 여는 과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번째 글쓰기의 소용은 세상을 보다 옳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허황된 말이지만 그 글쓰기로, 정권이 바뀌기도 하고 정말로 세상의 어느 한 구석이 조금쯤은 바뀐다.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이 바로 이러한 글쓰기들로 이루어진 공간이기도 하니까.


루터의 종교개혁은 카톨릭의 온갖 병폐에 대한 95개의 반박문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세상을 바꾼 대형사건이 한 사람의 글과, 그 뒤에 이어진 다양한 사람들의 실천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다. 국내 정치 이야기를 하기엔 조금 거시기 하니까 외국의 사례를 말하자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을 당선시킨 것 중 하나는 Buzz였다. 사회구성원들이 직접 만들어낸 커다란 "웅웅거림"이 아무도 예상 못했던 이변을 만들어냈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그들의 글쓰기가, 트위터에든 칼럼으로든, 온라인 상에 실제 데이터로 잡히는 규모를 만들어내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여론효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트럼프의 지지자들에겐 이것이 그들이 바라는 올바른 세상으로의 변화다.


그런데 사실 글쓰기를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세상이 여기까지 올바르게 변화해왔다는 증거다. 과거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오로지 권력자만 글을 써서 알릴 수 있었다. 조선시대까진, 조정에서 글을 써서 어디에 붙여놓으면 그것은 "방"이었다. 널리 알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조정이 아닌 개인이 글을 써서 붙이면, 그것은 "벽서"가 되었다. 글이란 게 벽에 붙어있으면 안되는데 감히 벽에 붙여놓았다는 뜻이다. 그 자체로 중대 사건이고 범죄였다. 근대에는 소수의 지식인, 전문가만이 쓸 수 있었다. 종이와 잉크, 인쇄기는 비쌌고 그 비싼 글의 생산은 소위 말하는 무지렁이들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대에는, 모두가 자신의 생각을 다양한 공간에 남길 수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자유로운 공간에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 해체되어간다는 뜻이고, 인류 역사의 진전이다. 글 하나 마음껏 쓰지 못하고 있는 이웃 독재국가를 보면 알수 있지 않은가. 글쓰기를 통하여 내 생각의 옳고 그름을 꾸준히 성찰해가며, 타인과의 교류의 폭을 넓혀나가다보면, 우선은 적어도 내 주변을 내가 바라는대로 바꾸어나갈 수 있다. 온라인에서 내 생각에 동의해주는 사람이 많다면(단, 이 동의는 자존감 품앗이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당연하지만.) 가족과의 쓸데 없는 감정소모가 조금은 편안해진다. 이것만으로도 큰 진전이다. 혹여 운이 좋아서 나와 생각을 동의하는 사람들과 만남을 가지고, 그들과 뭔가 의미있는 실천을 해나갈 수 있게 한다면, 그땐 변화하는 공간의 폭이 조금 넓어질 것이다. 그렇게 삶의 가치를 나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타인과의 교류공간, 그리고 세상으로 넓혀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난 점이 있다. 한번 교사라는 직업의 입장에서 이 세가지 가치를 생각해보자.


1. 나의 생각의 옳고 그름을 확인할 수 있다.

2. 타인과 교류의 장을 연다.

3. 세상을 보다 올바른 길로 이끌어나갈 수 있다.


교사가 하는 일은 학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지식이란 기본적으로 옳은 것으로 간주되나, 과연 교사인 우리는, 내가 가르치는 것이 옳다는, 그르지 않다는 확신을 갖고 있을까? 또, 글쓰기가 본질적으로 타인과의 교류의 길이듯, 교육 역시 본질적으로 아이들과의 교류이며, 글쓰기와 교육은 공히 세상을 보다 나은 길로 이끄는 것인데, 어쩌면, 글쓰기는 교사에게 매우 가치로운 일인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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