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언제 쓰는가

다독, 다작, 다상량 각자의 의미

by 공존

중간고사가 끝난 뒤 학교는 잠시의 소강상태를 맞는다. 체육대회와 현장체험학습 등으로 수업의 부담은 줄고, 대신에 몸으로 좀 놀아주는 시간이 잠시 늘어난다. 그렇다고 한가로운 시간이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 이때 밀린 일들을 좀 해야, 기말을 맞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3,4월에 진행한 수행평가를 채점하고 정리해야 한다. 5,6월에 진행할 수행평가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3월에는 공문이 없어서, 4월에는 중간고사가 코 앞이라서 미뤄뒀던 교육청의 정책업무들도, 치러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한가로울듯 바쁜 한주를 이번에도 보냈다.


비담임으로 행정부서에 종사하는 나는 5월에 일주일에 한번씩은 출장을 교육청 출장을 다녀왔는데, 그것을 다녀오면 앞뒤로 해야할 업무들이 새로 생겨났다. 당장, 출장 때문에 수업교체를 해야 하니 그 선생님들이랑 시간표를 맞추는 것도 일이요 출장으로 오가는 시간도 일이요 출장 때 뭐라도 보고할 것이 생기면? 그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나는 몇개 주요 사업의 담당자기 때문에 그 업무를 챙기느라 또 바빴다. 그러고 나니, 다음주에 당장 공개수업을 하란다. 교육청 핵심 정책사업이라 교육장님까지 내 수업에 와서 잠깐이라도 구경하고 간단다. 휴! 바쁘다.


그럼 내 글은 언제 쓰지? 하면서 퇴근을 하고 나면,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레를 돌려서 널고 아기를 재우고 나오면 9시다. 그때 뭔가를 하려해도, 몸은 지쳐있고 겨우 겨우 억지로 책상에 앉아도 손은 돌아가지 않는다. 집중력이 유지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닌 탓에 글은 봄바람도 불지 않는데 키보드 위에 휘날린다. 꾸벅꾸벅 억지로 글을 쓰다가 깜빡 깜빡 졸다가 정신을 차리면, 엔터와 스페이스, 여러개의 자모가 문서를 망쳐놓고 있다. 이것이 나의 대강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교사들의 일상이다. 특별히 여기에 육아가 더해지거나 다른 몇가지 일정이 더해지거나 빠질 뿐, 대부분의 현대인들과 같이 우리는 고단하고 여유는 걍퍅하다.


도대체 언제, 써야 하는가 나의 글이란.


글을 잘 쓰는 방법으로 세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다독과 다작과 다상량이다. 먼저 이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내 생각에는 글쓰기에 있어서 다독의 좋은 점은 문장의 매력, 즉 문체에 주로 관여한다. 다행히 교사의 경우 일단은 지식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이므로 뭔가를 읽을 시간은 제법 보장되는 편이다. 근무지에서 떡하니 책을 펴놓고 있어도 어지간해선 욕을 먹지 않는 것이 교사라는 직업이다. 문학이든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책을 많이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일부 사람에게, 글쓰기의 욕구가 생겨난다. 그럴 때 다독, 즉 충분한 독서와 동반되는 글쓰기는 대개 읽고 있는 책의 문체를 닮아간다. 하루키가 유행할 땐 다들 하루키처럼 글을 썼고, 범정스님의 수필이 유행할 땐 다들 웰든 호수에 앉은 것처럼 글을 썼다. 어려운 책을 읽으면 자연히 어려운 문장을 쓰게 되고, 쉬운 책을 읽으면 순한 문장을 쓴다.


다만 이러한 다독의 글쓰기에 있어서의 기여는 문장을 독자의 수준에 맞게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정도에 그친다. 교사로서는 독서는 자신의 공적 삶과 사적 삶을 조화할 수 있는 훌륭한 활동이지만, 독서만으로는 글을 쓸 수 없다. 자기의 삶과 생각이 배어난 나의 글을, 쓰고 또 써야한다. 그러므로 다독을 통해 다듬어진 문장을 넘어 하나의 글로써 완성되도록, 다작으로 나아가야 한다. 글쓰기에 있어서 다작은, 다독을 통해 얻어진 다채로운 문장이라는 씨앗을 하나의 글로써 엮어낼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마련케 해준다. 즉, 실제로 글을 완결짓기 위해선 그저 많이 쓰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도, 누구에게라도 다작이란 쉽게 할 수 없는 실천행위다. 왜 쓴다는 말인가? 글쓰기라는 중노동을 해야하는데 내가 당장에 출판계약이 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길고 긴 "다작"의 수련 동안 노동에 비하여 얻어지는 것이 없다. 당연히 열심히 쓴다고 해도 뭔가 보상이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다. 다독에서 다작으로 나아가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간은 한정되어있고 생활인으로서 또 직장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도무지 쓸 기회가 없고 쓸 시간이 없으며, 쓴다고 해도 얻어지는 것이 없다. 독서는 차라리 지식이 쌓이고 자신이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럼 다작에 대해선 잠시 뒤로 미루어두자. 다상량은 어떤가? 우리는 한가지 주제에 대하여 밀도있게 사고하며 사는가? 그를 통해 자신이 품게 된 문제의식을 다층적으로 살피고, 하나의 명확한 명제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러한 다상량의 의미는,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생각할 때 글쓰기에 있어서 다상량의 의의는 글의 깊이와 길이에 관계된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 또 생각하면서 스스로 비판을 가하고 반박도 해본다. 다양한 논거를 살피고 그것들로써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정합성을 검증한다. 이 문장이 어디선가 본 것과 같진 않은가? 이것을 하나의 글로 쓸 때, 군더더기가 너무 많아지진 않을까?


다상량, 즉 나의 글에 대해 미리 깊이 사고해봄으로써 글은 깊어지고, 또한 군더더기를 빼면서도 길게 쓸 수 있게된다. 다독과 다작, 다상량은 이처럼 나의 글쓰기에 다른 방식으로 기여한다. 다독을 통해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있게 되고, 다상량을 통해서는 문장이 아니라 글의 깊이와 완성도를 더한다. 그러나,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이니, 실제로 글을 쓰는 다작의 수련을 통해 이렇게 모아진 재료들을 나의 글로써 완성시키는 것이다. 다독은 교사에게 쉽다. 다작은 교사에게 어렵다. 그러나 다상량은, 노력에 따라 가능하다.


그러므로 내가 직장인이자 생활인인,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제안하고자하는 것은 다작이 가능한 시기까지 다상량을 꾸준히 노력해 나가자는 것이다. 다독과 다상량으로 우선 충분히 많은 땔깜들을 머리에 쌓아두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신비로운 것이라서 망각하는 일부의 기억을 제하면 무궁무진한 기억 용량을 자랑한다. 다상량을 하는 동안에는 이런 망상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자성도 이따금 들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의 대상에 대해 깊이 있게 사고하는 모든 과정이 이후의 글쓰기의 재료들로, 물감들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 글쓰기는 그와 같은 종합적 사고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상량을 이어가는 시기 동안에는 "언제 쓰는가"의 불안함을 품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팔릴 글이어야 한다. 읽힐 글이어야 한다. 그리고 다작의 고통 못지 않게 다상량 역시 충분히 고된 일이다. 운전을 하면서, 샤워를 하면서, 변기에 앉아서도 한번씩 내가 품고 있는 의문들을 상기하며 그에 대하여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그를 통해 언젠가 글을 쓸 여유가 생겼을 때 뽑아낼 풍성한 문장들을 미리 반죽해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독과 다상량을 반복하면 마음 속에는 점차 문장들이 쌓여간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시점에선 쓰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폭죽처럼 변하게 된다. 방학을 맞거나, 모처럼의 여가가 생길 때, 우리가 할 일은 노트를 펴고 어디든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굳이 완성을 하지 못해도 된다. 한 편의 글을, 우리가 목적한 바에 맞추어 쓰기 위해선 앉은 자리에서 몇시간 집중을 해도 부족할 시기가 온다. 몇날 몇일을 투자를 해야할 때도 온다. 그때가 되어야 팔릴 글이 되고 읽힐 글이 된다. 어차피 하루에, 한번에 글을 쓰기 시작해서 끝날 일은 아닌 것이다. 쓰다가 읽고, 다시 생각하고, 그렇게 하나의 글을 계속 오래 오래 다듬고 다듬다보면, 어느날엔 그 글을 더 이상 손대지 않아도 될 때가 온다.


나는 이백과 두보의 글쓰기를 즐겨 비유하는데, 이백은 일필휘지로 단숨에 글을 썼다고 하고 두보는 시 한수를 완성하기 위해 몇날 며칠을 끙끙 앓았다고 한다. 이백은 평소에 다독과 다상량하는 습관으로 미리 미리 깊이 생각을 해 온 것이고 두보는 다상량의 과정을 글쓰기를 하는 동안 함께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쁜 일상 속에 힘들게 하루 하루 글을 쓰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두보의 방식이라면, 그런 중노동을 나중으로 조금 미루어두고 우선 깊이 생각하고 나중에, 폭죽에 불을 붙이듯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글을 써내는 것이 이백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느 쪽이 더 나은 방식인지는, 각자의 판단과 성향이라 할 수 있겠지만 개인 생업이 있는 직장인들이 두보의 방식을 따를까는 의구심이 든다.


쓸 시간이 없다. 그것은 이 글을 쓰는 나도 마찬가지로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사색을 할 시간은 우리에겐 적지 않게 주어진다. 학창 시절엔 영어단어를 외우기 위해 단어장을 손에 들고 다녔지만 지금은 머릿속에 담아둔 글감을 잘 굴리기만 하면 된다. 글을 쓰기 위한 분명한 목적의식을 품고 내 글감에 대한 생각을 오래 하다보면 나중에 분명히 쓸 수 있게 된다. 또한, 다독이 아무나 하기 어려운 소양인 것처럼 다상량 역시 아무나 하기 어려운 소양이다. 글쓰기가 지치는 일인 것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몇날 몇일 품고 사는 것 역시 보상도 없고 지루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견딘 사람들이 글쓰기를 위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다상량을 할까, 궁금함이 떠오르겠지만 가장 좋은 것은 바로 내 앞에 닥친 문제일 것이다. 우리 교실, 우리 아이들, 나의 수업과 우리 교육. 세상에 쓸 것은 넘쳐나고 내가 해결해야 할 내 삶의 질문들 역시 넘쳐난다. 다시 첫단계로 돌아가, 일단 많이 읽다 보면 다상량을 위한 다양한 고민 거리의 실마리 역시 잡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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