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게 느리게 느적하게
좀이 쑤셨을 것이다. 여섯시간을 차에만 있었으니 얼마나 아이는 힘들었을까. 오는 길에 진주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아침 여섯시반에 집에서 나와 차에서 비몽사몽한 상태로 왔으니,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따님께서는 아빠의 무릎을 내내 떠나지 않았다. 남해에 당도한 것이 대략 오후 두시. 날씨가 청명한 동안에 먼저 카페에 들러 한 숨을 돌리니 아이는 이제 제 세상을 만났다. 카페 안을 누비며 스터러를 털어서 한 줌 가져오고 벽에 걸린 사진과 그림을 만지겠다고 의자 위로 올려달란다. 힘들었을 테지. 타박하는 일 없이 열심히 놀아주었다.
치앙마이에서 열흘을 보냈다. 그리고 남해에 일주일을 묵기로 했다. 여름방학 휴가를 치앙마이 하나로 끝내긴 아쉽고, 남해에 진득하니 묵어본 일도 없어서 겸사겸사 결정하게 된 일정이었다. 원래는 가정집을 빌려서 묵을 생각이었는데, 몇군데 후보지와 경합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쏠랑 그 집을 가져가버렸지 뭐야. 하릴없이 다른 후보지 중 하나를 골라 오늘 아침에 출발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집이 썩 마음에 든다. 넉넉한 넓이의 복층 집이 여수 방향으로 내려다보이는 훤한 오션뷰다. 이런 좋은 시설의 펜션들이 이제 전국에 너무나 많이 지어져 과잉공급으로 고사되는 곳이 드물지 않다. 그 덕분에 객으로서는 조금 저렴하게 올 기회가 생겼다. 치앙마이에 출발하기 전쯤엔, "아 그래도 일주일을 남해는 좀 과한가?"하며 취소할까 생각도 했는데, 오길 잘했다. 오길 잘했다. 아기는 숙소에 오자마자 복층 계단을 열댓번을 오르내리며 에너지를 소진하기 시작한다. 그래 잘했어. 열심히 움직이며 진을 좀 미리 빼거라.
짐을 풀고 한시간여를 쉰 뒤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남해는 길어야 2박 정도 묵어보았다. 생각보다 넓은데다가 독일마을과 상주은모래 해변이 있는 동쪽 지역을 중심으로 여행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실 가본 곳은 매번 한정적이다. 이번엔 일주일 정도, 편하게 쉬러 왔기 때문에 느긋하게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사실, 아이가 태어나고 함께 다니면서는 강제로 느린 여행이 될 수 밖에 없다. 아이의 낮잠 시간을 지켜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열두시부터 한시까지, 조금 이른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자는 규칙적인 일과를 지켜오고 있다. 이 일과를 지켜주어야만 우리도 편하고 어린이집 선생님도 편하고 아이에게도 좋다. 아이가 조금 더 어릴 때는 차에서도 어찌 어찌 자 주었기 때문에 그런 낮잠을 무시하고 아이를 끌고 다녔지만 이제는 그리 되지 않는다. 졸리면 전력으로 자기를 재워달라며 "코-"하며 고갯짓을 한다. 재워주지 않으면 왜 재워주지 않는지, 왜 자기를 괴롭게 하는지 화를 낸다. 이제는 알만큼 알고 알아들을만큼 알아들을 시기가 되었으니, 당장 아이를 눕혀주어야 한다. 최소한 카시트에는 앉혀주어야 한다. 카시트에선 그나마 잔다. 그런데 오늘은 글쎄, 먼 길 오는 동안 피곤하지도 않았는지 숙소에 와서는 계단만 신나게 오르내린다.
그것이 다행스러운 것은 그나마, 치앙마이에서 열흘을 있는 동안 아이의 바이오리듬이 현지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치앙마이는 두시간 늦다. 치앙마이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원래 여덟시에서 아홉시 사이엔 자던 녀석이, 열시, 열한시를 넘겨서야 자기 시작했다. 오늘은, 다행이다. 여덟시를 조금 넘겨 아이가 잠에 들었다. 하루의 긴 여행, 숙소에서의 계단 오르내리기 운동, 스트레스를 발산할 수 있었던 저녁 외출 등의 힘이다.
우리는 남해에 별 일 없이 왔다. 계획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편하게 잘 쉬다 가면 된다. 불행히도 태풍의 북상 경로에 딱 걸려있는 위치라, 수요일부터 비바람이 크게 걱정은 되지만 뭐어, 우리에겐 계단이 있지 않은가. 여건이 되면 놀고, 아니면 쉰다. 그러기 딱 좋은 곳이 남해다. 3일 정도론 짧지만 일주일은 긴 여행지다. 그나마도 여름에 한번, 10월에 한번, 겨울에 한번 와서 어지간한 곳은 둘러본 곳이다. 태풍이 지나면 아이랑은 느긋하게 바다에서 놀려주다가 재우고, 오후에 같이 산보를 나가는 단촐한 일정이 될 것이다.
저녁으로 찾은 곳은 피잣집.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남해가 워낙 벽지인데다 서쪽은 그나마도 관광객의 발길이 더딘 편이라, 우리가 여섯시 나절에 갔는데 거의 마감 언저리였다. 죽죽 찢어서 피자를 포크에 꼽아주니 아이가 열심히 먹는다. 그런데 요녀석이 요즘은 몇번 씹어보고서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퉤퉤 뱉는데, 피자 한쪽 가까이를 잘 먹더니 어느새 고개를 돌리고 몰래 뱉고 있었다. 아까워라. 맛난 피자인데 아이에게 물려주었다가 나와 아내만 배를 덜 채웠다.
아이가 요즘 이런다. 이젠 눈치를 보고 교묘하게 행동을 하는 것도 배우는지, 아빠 엄마가 싫어할 것 같으면 몰래 하곤 숨는다. 이틀 전에도, 내가 출근해서 잠시 일을 보고 있는데 아내에게 사진이 왔다. 선물 받아서 이따금 생각나면 먹곤하는 영양제 통이 있는데, 그걸 집어서 알약들을 싹 다 바닥에 뿌려놓았다. 그리곤 자기도 사고를 친 것을 아는지, 바로 침대로 들어가 숨더란다. 그게 웃겨서 아내는 사진을 찍었고, 나는 그럴거면 직작에 좀 빨리 먹어치우지 않았냐는 핀잔까지 같이 들어야 했다. 요즘은 이렇다. 괜스레 아빠 욕을 먹인다. 말썽을 부리기 시작해, 바닥에 있는 자갈돌을 입에 쏙쏙 넣지 않나, 더러운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오질 않나. 아니, 나~는 어릴 때 안 이랬는데 대체 당신 닮아서 이러나? 라며, 서로를 쏘아본다.
그래도, 눈치를 보는 만큼 눈치가 빨라, 이제는 왠만큼 아빠와 장난도 쳐준다. 산책 중에 예쁘게 소라를 배열한 곳이 있어 아이를 앞에 세웠다. 제방 위에 올리니 아이는 썩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엔 사진을 찍도록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춤을 추며 흥을 돋우자 아이도 같이 춤을 추어 준다. 춤을 추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깨달았다고 할까. 아이가 알아서 먼저 몸을 움직일 때가 많다. 지금까지는 내가 아이의 율동에 맞추어주는 일은 없었는데, 예쁜 포토스팟을 찾았으니 아빠가 먼저 몸을 움직이며 춤을 제안한다. Shall we dance? 아이는 기분이 좋아지더니 이제 온갖 포즈를 잡아준다.
다만 남해의 아쉬운 점은, 이토록 바다가 망망히 넓은데, 해수욕장이 많지는 않다. 아니 뭐, 서해처럼 백사장이 좌아악 깔려있는 곳이 삼면 바다에 그리 흔하지 않긴 하다. 우리가 숙소를 조금 애매한 위치에 잡은 걸 탓해야할 문제겠지. 그래서 저렴한 것이기도 하겠다. 가까운 해수욕장까지 차로 10여분. 그리 어려운 길도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작은 포구가 발달했지 해수욕장이 많지 않다. 그나마 가까운 몽돌해안이 어촌의 비릿한 내음이 진동해, 아이가 벌써 알고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별 수 없지. 시간을 내 멀리 가야겠다.
밤은, 그렇게 저문다. 이 고약한 녀석이, 저녁도 피자로 얼추 먹고, 숙소로 와서 과자를 또 먹고 하더니 분명히 배가 부른대도 "맘마"를 10분 넘게 끈질기게 외친다. 오늘 막 도착해서 쉬다가 저녁을 먹고 온 상황인지라 나는, 밥을 해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다른 걸 먹여보기도 하며 아이를 달래는데 끝내 이 녀석은 맘마를 달란다. 어떻게 하란 말일까. 성화에 더는 견디지 못하고 쌀을 씻어서 급하게 밥을 했다.
그런데, 밥을 차려주니 열무김치만 몇 점 집어먹고는 밥을 한 입 딱 먹고 바로 퉤퉤퉤다. 퉤퉤퉤. 김치도 퉤퉤퉤. 김에 싸준 밥도 퉤퉤퉤. 그러더니만 졸리다고 계단을 올라 침대로 가선, 가서는, 글쎄, 우유를 달라고.
아니, 야, 밥 먹을 땐 안먹더지! 하고 아빠도 화를 내보지만, 무슨 수가 있을까. 끝내 아이는 10여분 칭얼대다가, 마침내는 우유를 뜯어먹고야 잠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이를 재우고 나서 지친 몸을 이끌고 거실에 모였다. 각자의 하루를 정리하며 긴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