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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Aug 28. 2023

원전의 비극, 후쿠시마 이후의 삶

http://m.pressian.com/m/m_article/?no=68652#08gq

(프레시안에 기고된 서평이다. 책이 담고 있는 주요 쟁점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이 글을 읽기 전에 먼저 읽는 것이 좋을듯하다. 물론 가장 좋은 일은 책을 읽는 것이지만.)


 마침내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사고 원전에서 발생한 방사능 오염수의 방류를 결행했다. 이 사태가 현실화되면서 이미 몇주 전부터는 수산물의 소비 감소, 사재기 현상이 다발했다고 한다. 그간 방사능에 대한 우려를 억지로 잊어버리고 수산물을 소비하고 살았어도, 이제는 더욱 위협은 크고,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나는 오래 전 읽은 이 책을 떠올렸다. 그래서 해묵은 독후감이지만, 다시 꺼내어 돌이켜본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의 앞과 뒤에서, 일본 국민 당사자가 아니었던 우리는 무엇을 잊고, 외면하고 살아왔을까. 또, 이제 피해 당사자로서 더욱 큰 방사능의 위협을 받고 살아야 할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성찰해야 할까. 인접국에 멜트다운 중인 원자로가 있는 현실에서 후쿠시마 이후의 삶이란, 애초에 무엇이었을까.



 일본의 최인접국이라는 지리적 문제, 그리고 각종 무역과 여행 문화로 얽힌 현실에서 우리가 후쿠시마 문제에 대해서 이토록 무관심했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는 것은 적잖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것이 단지 일본에서 터진 원자력 사고의 영향이 미칠 것에 대한 우려 뿐만이 아니라 20기 이상의 원전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어떤 국민적 합의와 그 이전의 성찰 그리고 소통이 부재했던 현실을 또한 동시에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전 참사의 공포를 느끼며 책을 읽었던 나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된 아이러니한 현실을 상기하면, 망각과 외면이 얼마나 원자력 발전이라는 괴물을 키워왔는지를 자성케 한다. 원자력발전이 가지고 있는 근본의 문제가 바로 숙의의 부재로 인한 국가 공공시스템의 붕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해 왔다면 나 또한 공범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그 발생 이전, 원전의 형성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국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국가의 주요 사무에 대하여 반드시 필요한 토론과 합의가 부재했던 사안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두번의 원자폭탄 폭격이 있었던 나라이고, 전후 오랜 시간 원폭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어필해 왔다. 한국의 동란과 분단을 포함하여 동아시아 전체를 세계대전의 파고 속으로 밀어넣은 최악의 전범국가인 일본이 원폭으로 인한 피해자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원자력 기술이 불온한 폭력 그 자체라는 점에 근거한다. 미국과 소련은 원자폭탄을 마구잡이로 생산해내며 냉전을 진행했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세계 시민들은 언제 자신이 이 광기의 희생양이 될지 모르는 공포에 신음했다. 냉전이 한참 고조되어 가던 1960년대에 제작된 영화 <혹성탈출>은 시리즈 전체가 원자폭탄과 그것이 만들어낸 광기에 대한 안티테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일본은 한편으로는 원폭의 공포를 호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원자력 발전소를 마구잡이로 건설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시점에서 일본에는 전국에 총 54기의 원전이 가동중이었다. 그리고 원전 사고 이후 전국의 원전을 가동중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력공급에 큰 지장이 없었을만큼 원자력 발전소는 과잉 상태였다. 소수의 판단착오로 인하여 국가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을 초래한, 앞으로도 초래할 수 있는 원자력발전 기술이 어떻게 이처럼 비이성적으로 난립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원전이 국가 체제의 합리성과 정당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다.


 일본은 원자력발전소 건립을 하면서 어떤 국민적 합의과정을 가졌을까? 한국의 석학 한홍구, 서경식 그리고 일본의 지식인 다카하시 데쓰야는 그 과정이 철저히 국가주의의 산물이었다고 말한다. 화력발전의 비용과 공해를 비교하며 원전의 저비용 고효율을 강조했지만 원전과 폐기물의 통제에 필요한 비용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국가 공동체 전원의 자본으로 운용 및 유지되는 사업임에도 말이다. 지역별로 발전소를 민영화하고, 국민들의 세금이 소수 자본가들의 전유물이 되는 과정에서도 원자력 발전의 존재의 이유과 타당성의 근거는 논의되지 않았다. 공동체 전체가 부담하는 막대한 사회적 자본에 대한 합의과정 없이 국가가 위임된 권력을 일방적으로 행사한 것이다. 과연, 한국은 이러한 과정을 '다르게' 밟아왔을까?


 비키니섬 원폭실험과 체르노빌 원전사고에 흥분하며 국제사회에 문제를 제기한 일본이 동시에 원전을 우후죽순 늘려나간 것은 한홍구 교수가 지적한대로 “피폭 내셔널리즘”과 “핵을 보유한 정상국가”의 욕망이 동행하는 이중성을 보여주면서 민주국가가 어떻게 국민들의 의사를 체계적으로 배제하며 폭력을 행사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책은 우리의 제주도 4.3 사건에서 자행된 학살, 용산참사로 논의를 이어가며 합의가 부재한 국가의 폭력을 비판한다. 책이 쓰여진 이후의 일이지만 일본 올림픽을 위하여 후쿠시마 일대 지역 주민들의 귀환을 강제했던 상황 또한 합의과정 없는 위임권력의 행사와 국민배제의 생생한 풍경이다. 


 즉, 특히나 일본에 있어서 원전은 나가사키 폭격에서부터 후쿠시마 사고까지, 원전의 존재 이전부터 1차 종결과 그 이후까지 전 과정이 철저히 반민주적인 국가권력의 남용과 함께 소수 기득권 집단의 전횡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더욱 참담한 것은, 후쿠시마와 같은 초대형사고가 아니면 이것은 동아시아의 그 어떤 국가에서도 발견되고 진단될 수 없는 문제란 것이다. 국가권력의 폭력으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기피전략. 그 결과는, 파멸적이고 불가역적인 전지구적 환경 재앙으로서 우리 바로 옆자리에 현현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동쪽으로 일본의 민주주의의 낙후성을 비웃고, 서쪽으로 중국의 독재화를 냉소하지만 우리 또한 매 순간 합의없는 위임권력의 행사를 방관한다. 노후 원전의 부실공사로 인한 뉴스가 해마다 몇번씩 보도되지만, 일본의 참상을 보고서도 우리는 놀랍도록 무관심하다.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계획을 추진했지만 무작정 그것을 훼방놓는 당시 야당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은 작동하지 않았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 시키, 원전 수출을 큰 실적인 것처럼 홍보하며 원자력발전소를 국내에 증설할 때조차 우리는 이것이 가져올 사회적 부담에 대해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못했다. 국가에게 위임한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는지, 우리의 민주주의가 작동되는 수준이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이 가져오는 참상을 지금도 수시로 목도하면서 말이다.


 시민사회 거버넌스 수준의 담론이 아니고서라도, 원전의 비용에 대한 정확한 안내와 인식이 지금 당장 필요하다. 경관을 위해 전력을 탕진하는 인공 "빛" 축제를 전국 각지에서 열면서, 전기가 부족하다며 원전을 증설하는 것을 방관하는 이런 아이러니는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방폐장 건설로 지역 주민이 모두 저항하는 홍역을 몇번 겪고서도 우리 시민사회가 원자력기술의 정당성과 국가의 책임있는 태도에 대해 질문하지 못하는 것은 이제 언론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방사능의 공포는 꼭 동쪽 바다에서만 오지는 않는 것이다. 70년간 독재정권을 세번 네번이나 무너뜨린 한국의 민주성도 당장 내게 피부로 와닿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작동하지 않았다. 우리 스스로 매달 비싼 세금을 내며 원전 증설과 가동에 가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이 2015년부터 원전 재가동을 시작해 2030년에는 원전 가동율을 20%대로 끌어올리는 것을 추진중이라는 것이다. 지진과 태풍이 철마다 반복되는 열도에 십수기의 원자력발전소가 재가동되는데 그 발전소들은 대개 후쿠시마 사고를 터트린 도쿄전력과 다를 바 없는 민영기업들이 담당한다. 원전의 재가동에 필요한 국민적 합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음음 물론이다. 일본의 극우집단은 여전히 개헌을 통해 군사보유가 가능한 정상국가로 발돋움하는 것을 숙원으로 삼고 있다. 피폭의 충격을 원전 확장으로 갈음한 일본이 핵무기 보유까지 목표로 삼는다는 추정은 과도한 것일까? 책은 원전과 원자폭탄이 한몸임을 지적한다. 일본의 우경화가 다시 전체주의의 회귀로 수렴된다면, 지금 우크라이나 땅에서 희생되고 있는 러시아 남성 시민들의 비명이, 일본인들의 것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오키나와에서, 한반도에서, 일본 전역에서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이미 수십만의 생명을 앗아간 바 있는 그 정치집단이 부활하는 것이 아주 꿈같은 이야기는 아닌 셈이다. 아니, 원전에 관련된 모든 문제가 어쩌면 바로 그 정치집단의 소행일지도.


 일본의 사고와 그 이후를 보면서도 현재의 비용을 미래세대에게 전가하는 원자력기술에 대하여 우리 시민사회의 총체적인 노력은, 부재했다. 이전 정부의 정책은 기대에 못미쳤고, 현 정부의 정책은, 솔직히 미친짓거리다. 우리 또한 일본 국민들과 같은 시민의 집단 굴종으로 회귀했고, 그 결과는,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유출 지지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그뿐인가, 과거 원전을 더 짓기 위해 전력 고갈 같은 헛소리를 일삼으며 깨끗한 에너지라고 국민을 농락한 이명박 정부는 우리 민주정 사상 가장 큰 득표차로 당선되었다. 그토록 많은 희생과 손실을 경험하고도 원전에 대한 시민들의 시각은 달라졌던가? 현재진행형의 국가폭력을 방관하고 그에 합리성을 부여하는 당신도, 나도 공범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공범으로서 우리는 오염된 바다라는 어둡고 우울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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