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과정 시험 보기 위해서 작성했어요
라캉은 사회적 구조 속에서 살아가야 할 인간에게 발생하는 개인의 욕구와 사회적 요구 사이의 간극을 욕망이라 정의했다. 개체의 존재 근거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있다고 본 라캉이었기에 개인의 욕구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요구로 충족되거나, 사회적 요구로 인하여 제약되며 이 간극은 절대로 메워지지 않는다. 충족된 욕구는 다시 새로운 욕구를 부르고 사회적 요구에 의한 제약으로 항구적 욕망의 지속 상태를 우리는 경험하며 살아간다.
라캉이 제안한 개인의 욕구와 사회적 요구, 욕망의 패러다임은 사회적 갈등의 중요한 축인 인간의 욕망이 재화의 생산이나 분배와 같은 물적 구조의 왜곡에 선행하는 문제임을 시사한다. 욕망은 이익이나 소유에 대한 관념보다 훨씬 깊은 우리의 본능의 영역에 자리하며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부모의 무한한 사랑과 보살핌이 그렇듯 주체 그 자신에게 있어서 존재의 원천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 자신의 의의를 찾아내며 충족된 욕망에 머물지 못하고 다시금 새로운 무언가를 욕망한다. 이러한 존재와 욕망의 관계에 대하여 헤겔과 호네트는 인정투쟁이라 명명했다. 존재의 근거를 확립하기 위한 실천으로서의 행위가 인간의 핵심적 동인일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욕망은 흔히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다. 플라톤은 욕구(에피데모스=appetite, desire, 욕망)가 신체적인 욕망의 충족을 중심으로 이해하여, 정신과 구분되는 육체의 거칠고 제어하기 어려운 속성으로 인해 매우 불안정한 영혼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았으며, 이성의 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집단 중 건전한 일부에게서는 이러한 욕망의 통제가 금욕주의 실천 등으로 드러나오기도 햇다. 그러나 사회 계층이 분화하고 지속적으로 욕망을 충족해가는 소수가 지속적인 욕망의 결핍을 느껴야하는 다수를 통제하는 구조가 보편화되자, 이러한 이성에 의한 욕망의 통제는 도덕이나 윤리, 법과 제도로 강제되었다. 이는 전근대 사회 내내 무지한 대중과 계몽을 이룬 지도층이라는 인식을 타당화하고 확산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다수의 국가공동체에서 대중은 교육의 필요성조차 없는 존재로, 권력과 종교의 통제에 절대 순종해야 할 종복으로 간주되어왔다.
국가의 승인과 지원을 배경으로 하는 비교적 근대적인 대규모 학교가 생겨났을 때까지도 대중에 대한 욕망 통제의 필요성과 교육 기회의 제한은 유효했다. 동서양의 상류층을 위한 교육과정이 엄연히 하층민의 실용학문과 대조적으로 학교에 자리 잡았으며 상류층의 교육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함양하는 인문교양교과가 중심이었다. 이러한 구조는 자본을 축적한 부르주아 계층의 형성과 상류층 편입에의 욕망,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종교와 철학의 권위 손상, 근대적 국가체계로의 전환 등에 영향받아 서서히 붕괴되어간다. 오늘날 현대의 학교에는 인문교양교과가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지 않으며, 이성에 의한 욕망의 통제는 큰 의의를 갖지 못한다. 그 반대로, 다수의 사회는 욕망의 추구를 합당한 것으로 이해하고 교육 또한 이러한 욕망 실현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도록 용인한다. 그로 인해 학력경쟁, 교과와 지식의의 왜곡, 학교 교육의 각종 병폐와 학습자 아동들의 불행한 아동 청소년 시기가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어왔다.
어떻게 천년 이상 욕망을 통제하도록 이성을 함양해오던 학교 교육이 지금 욕망의 무한한 확장을 위하여 복무하는 도구가 되었을까? 교육은 학습자의 욕망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객관성과 타자성에 대한 이해가 필수가 되는 이성 영역이 주관성과 자의성을 수반하는 욕망에 복무하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가장 우려가 되는 것은 욕망의 영향으로 이성의 작용이 왜곡되는 일이 일반적으로 발생하고 이를 다시금 이성의 작용으로 합리화되는 현상이다. 그것은 전근대의 계층화된 사회구조에서 권력층이 욕망 실현을 위한 행위를 주되게 해나가면서도 이성의 표상이 되었던 양상이 현대적 규모로 확대 재생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소황제와 같은 욕망 실현의 주체, 인정투쟁의 주체로서 다음 질문에도 답해야 한다. 욕망과 감각의 영역, 이성과 실재의 영역은 우리 주체 내부에 혼재하는가? 아니면 각기 병립하는가? 이 질문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사회적 구성체로서 욕망의 배경 구조에 대해서, 우리의 지식과 감각의 구조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올바른 판단과 실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의 왜곡, 마비 속에 욕망이 어떻게 뒤틀리는지에 대한 성찰이 오늘날 여러 사회공동체의 학교에 얹혀어쟈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선 욕망과 이성은 혼재하고 있다는 증거가 다양하게 포착되고 있다.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더 저렴한 물리적 교통 및 이동수단으로 인해 우리는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사회적 관계망의 판도 위에 살아간다. 과거와는 다른 인정투쟁의 장이 열리고, 욕망을 충족하는 방식도 예측할 수 없게 변하고, 새로이 태어난다. 여기에는 욕망의 충족을 위하여 원본을 복제하는 것도 반드시 포함된다. 앤디 워홀의 팝 아트 속 무수히 많은 복제들은 현대인이 타인을 거울 삼아 욕망을 부풀리며 흉내내는 현상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을 통한 욕망의 통제, 아니 적어도 순치를 추구하는 전통적 학교교육을 학습자와 학부모들이 우습게 여기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교육은 학력의 상징물이라는 도구적 목적 외엔, 학습 주체들의 욕망 충족과 인정 투쟁에 거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문제는 교육 주체인 교사들과 교육 당국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이성이 왜곡되며, 학교를 둘러싼 구조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학교교육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국가 단위의 욕망의 구조를 통해 바라볼 때 더욱 쉽게 형태를 드러낸다. 대한민국 교육의 온갖 문제에 대하여 각자가 복잡하게 원인을 제시할 수 있지만, 국가 자신의 욕구와 국가공동체의 요구들, 이 간극에서 발생하는 국가의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교육을 바라본다면 유의미한 시사점을 여럿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행정 편의주의라는 욕망, 계층구조의 온존이라는 욕망, 예산 절감과 노동효율성 향상이라는 욕망. 이러한 국가 단위의 욕망들로 인해 학교교육이라는 문제의 본질은 가려지고, 그에 대한 이성적 접근은 차단된다.
그러므로, 나는 교육과 욕망의 관계를 탐색하며 먼저 욕망이 무엇인지 그것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탐색하고자 한다. 욕망은 개인의 내부 문제인가 사회적 형성물인가? 욕망은 어떻게 교육을 왜곡하고 영향을 미치는가? 욕망에 의한 이성의 왜곡은 우리를 어떤 인간으로 만드는가? 국가는 이러한 욕망과 이성의 구조 속에, 학교교육을 어떻게 이끌어가는가? 이에 결부되는 국가의 욕망은 무엇인가? 학교 정책과 의사결정에 어떻게 국가와 사회공동체의 욕망은 담기는가? 한국사회는 이성 중심의 제도권 교육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사실상 일소된 국가로서, 해방 후에는 욕망과 인정 투쟁의 격전지라 불릴만한 양상을 보였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교육학 연구자로서, 우리 교육의 무수한 문제의 원인들 가운데 하나로서 욕망을 주제로 탐색하는 것은, 무척이나 보람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