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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보로 Sep 15. 2017

영화 보고 딴소리

분노의 시대를 건너는 법, 영화 <분노>

감성 스릴러를 표방하는 이상일 감독의 <분노>를 누군가가 믿음 또는 신뢰에 대한 영화라고 쓴 글을 봤다. 일견으로 동감하지만 전적으로 그렇다고 하기엔 납득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영화 제목이자 영화 속에서 살인자가 현장에 남겨 놓은 피로 쓴 글자 ‘怒’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요시다 슈이치의 원작 소설을 뒤적이진 않았는데 영화는 영화 자체로 받아들이고 싶었나 보다.


말 그대로 초호화 캐스팅(이라고는 하지만 일본 영화/드라마 쪽 사정에 밝지 않은 사람에겐 무의미할 것)이다. 게다가 음악은 무려 사카모토 류이치가 맡았다. 이런 진용으로 영화를 만든 이른바 자이니치 교포 3세 이상일 감독은 아마도 행복했으리라. 이상일 감독의 영화를 처음 접한 건 <69>였다. 전공투 세대의 실패담을 개인사와 접목한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의 감성을 그런대로 잘 포착해냈던 걸로 기억한다. (류는 앞으로 직접 메가폰을 들지 말기 바란다) 어쨌든, 내가 주목했던 건 오키나와 에피소드였다. 왜냐하면 영화가 오키나와에 이르러서야 영화 속 ‘분노’가 와 닿기 시작했으니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일본(본토)에 대한 오키나와의 울분을 전적인 주제로 삼은 건 아니지만 간과하기 어려운 메시지는 분명 있다.


태평양 전쟁의 A급 전범이지만 몇 년 후 석방되어 정계 복귀했던 일본 우익의 대부, 심지어 자민당을 창설한 장본인인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가 바로 현재 아베 신조 일본 총리다. 이른바 ‘잃어버린 20년‘―과거에는 10년이었는데 어느새 20년으로 늘어났다.―동안 일본은 진짜로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아마도 다테마에(겉으로 내세우는 명분)가 아닐까 싶다. 속내(혼네)는 비록 극우일지라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는 그런 최소한의 다테마에가 그나마 일본 사회의 브레이크 역할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베 내각 이후 일본은 다테마에 따위는 이제 벗어던지고 폭주를 시작한 지 오래다.


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못 밖은 평화헌법을 바꾸고(이를 ‘해석개헌’이라는 기괴한 말로 부른다.) 자위대가 언제든지 한반도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들었다. 더구나 한국과 중국을 상대로 영토 분쟁에 기름을 붓고 있다.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또 어떤가. 이처럼 폭주하고 있는 아베 내각은 그럼에도 아베노믹스라는 그럴듯한 떡밥으로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라고 썼지만 지난 한국의 10년을 되돌아보면 우리도 할 말은 없다.)


아무튼, 일본의 우경화로 가장 큰 피해를 받는 지역은 오키나와다. 물론 오키나와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게 지속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지역이긴 하지만 민주당 하토야마 내각이 공언했던 미군 기지 현외 이전 방침은 물 건너간 셈이며 아베 이후 거세지는 우경화 바람에 오키나와의 폭압은 그치지 않고 있다. 영화 속 오키나와 소년의 아버지가 집을 며칠 비우며 나하 시에 간 이유는 바로 오키나와 미군기지 철수 시위 때문이다. 소년은 말한다. 그런다고 바뀌는 게 무엇이냐고. 분노를 몰랐던(혹은 포기했던) 소년은 여자 친구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수치심 그리고 믿었던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분노로 치닫는다.


어쩌면 이상일 감독에게 <분노>는 살인 사건의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스릴러 구조는 맥거핀이고 오키나와의 분노를 통해 현재 일본의 상식적 시민들의 분노를 쏟아낸 게 아닐까란 상상을 해본다. (사실 한국이 오키나와고 오키나와가 한국이다. 이 얘긴 나중에 다시 할 예정) 그래야 ‘怒’가 이해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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