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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사유 Jul 09. 2021

'지배'라는 이름의 벽 앞에서

확성기, 저격병과 '12 Rules for Life' / 잠시, 멈춤

 잠시, 멈춤 매거진은 필자 커피사유가 경험한 문학 및 예술 작품들, 즉 도서, 영화, 그림, 음악 등으로부터 얻은 생각들을 모아두는 공간입니다.

 더 많은 생각을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저자의 블로그를 방문해주세요.


 얼마 전 누군가가 나에게, 고등학교 문학 수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소설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보았다. 잠시 생각을 해야 될 정도의 질문이기는 했으나 다행인지 해답을 찾는 것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는 소설가 구효서의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라고 그 질문을 던진 이에게 잠시 동안의 공상 영역에서 가져 나온 결실을 돌려주었다.


 한편 그 결실이라고 하는 것에는 몇 가지 발견하리라 의도하지 않았던 몇 가지의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는 구효서의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라는 작품이 나에게 남긴 여러 가지 깊은 인상에 대한 기억들이었는데,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여 해당 소설이 나로 하여금 '신선했다'라는 용언(用言)으로 수식하고 싶다는 욕구를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소설일 정도로 기존의 틀을 깨는 독특하면서도 생소했던 '보고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짧은 시간의 공상 영역에서 재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신선했던 기억을 떠올렸던 것도 잠시, 나는 이윽고 이렇게 기분 좋은 '신선함'에 대한 기억과는 대조되는 어떤 또 다른 것을 발견하고는 그에 따라 순간적으로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고 말았다.


 내 기분을 침몰시킨 것은 단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었다. 그것은 두 가지의 기억이 혼합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이루는 첫 번째 기억이라는 것은 고등학교 문학 수업 시간에 내가 어떤 단어 하나에 너무 큰 반감을 가진 덕에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구효서의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에 대한 일반적 해석과는 거리가 다소 있는 어떤 다른 해석을 시도해서 몇몇 이들에게 비웃음을 받았던 기억이었고, 두 번째 기억이라는 것은 첫 번째 기억을 유발시킨 Jordan B. Peterson의 '12 Rules for Life (12가지 인생의 법칙)'이라는 책의 내용이었다.




'12가지 인생의 법칙'에 대한 이의


출처: https://i.ytimg.com/vi/t-kfIb1dp1w/maxresdefault.jpg


 Jordan B. Peterson이 쓴 '12 Rules for Life'를 읽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1차고사 영어 시험 때문이었다. 시험 범위에 아주 화려한 문장으로 대한민국의 한 과학고등학교를 다니는 모든 학생들의 진땀을 흘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이 책의 본문이 포함되게 되면서, 나는 싫든 좋든 이 책의 본문에 대하여 아주 꼼꼼하게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이 책의 전문(全文)이 시험 범위에 포함되지는 않았고, 오직 'Stand Up Straight With Your Shoulders Back'이라는 절만이 시험 범위에 포함되었는데, 저자는 이 절에서 '어깨를 피고 똑바로 서서 당당하게 걸어다니는' 자세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바닷가재의 서식지 분쟁 과정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호르몬의 작용 과정, 그리고 그 호르몬이 바닷가재의 자세에 미치는 영향을 차례로 설명한 후, 논의를 사람의 경우로 확장하여, 호르몬이 인체의 자세나 태도 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까지에 달하는 방대한 저자의 문장을 해석하는데 꽤 애를 먹었지만, 그래도 긴 해석 끝에 찾아낸 그의 논증을 별다른 문제없이 따라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진 내용을 읽었을 때, 나는 매우 거대한 반발의 감정이 나도 모르게 심연의 어딘가로부터 화끈하게 몸 전체를 달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원문)

"And this brings us to a third erroneous concept: that nature is something strictly segregated from the cultural constructs that have emerged within it. The order within the chaos and order of Being is all the more 'natural' the longer it has lasted. This is because 'nature' is 'what selects', and the longer a feature has existed the more time it has had to be selected – and to shape life. It does not matter whether that feature is physical and biological, or social and cultural. All that matters, from a Darwinian perspective, is permanence – and the dominance hierarchy, however social or cultural it might appear, has been around for some half a billion years. It’s permanent. It’s real. The dominance hierarchy is not capitalism. It’s not communism. either, for that matter. It’s not the military-industrial complex. It’s not the patriarchy – that disposable, malleable, arbitrary cultural artefact. It’s not even a human creation; not in the most profound sense. It is instead a near-eternal aspect of the environment, and much of what is blamed on these more ephemeral manifestations is a consequence of its unchanging existence. We (the sovereign we, the we that has been around since the beginning of life) have lived in a dominance hierarchy for a long, long time. We were struggling for position before we had skin, or hands, or lungs, or bones. There is little more natural than culture. Dominance hierarchies are older than trees."


(해석)

"그리고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 번째로 오해하기 쉬운 개념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자연은 뭔가 그 속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구성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라는 생각이다. 혼돈 속에서의 질서와 존재의 질서는 그것이 더 오래 존재할수록 더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선택하는가’라는 물음을 수반하기 때문이며, 어떤 기능이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더 오랫동안 선택되면 더 오랫동안 남아있게 되고 – 생명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능이 육체적인지 생물학적인지, 혹은 사회적인지 문화적인지는 상관이 없다. 다윈학적(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지배 계급’은 영구적인 것이다. 사회적이거나 문화적인 것이 생겨나, 긴 기간 동안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지배 계급’은 영구적이다. 그것은 실재한다. ‘지배 계급’은 ‘자본주의’도 아니며, ‘공산주의’도 아니며, 이것은 또한 군사적이거나 산업적인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임의적으로 만들어낸 쉽게 사라질 수 있는 ‘부르주아 사회’ 또한 아니다. ‘지배 계급’은 심지어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다. 그렇게 심오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이것은 환경에 있어 거의 영원한 측면이며, 변하지 않는 존재의 결과로 인해 보다 변하기 쉬운 현상들로 인해 지워지는 것들 중 하나이다. 우리(여기서 ‘우리’라고 하는 것은, 최초의 생명체부터 지금까지의 생명체를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는 긴 시간 동안 ‘지배 계급’ 속에서 살아왔다. 우리는 피부나 손, 폐나 뼈를 가지기 전부터 자신의 위치를 두고 다퉈왔다. 문화보다도 보다 조금 더 자연적인 것은 ‘지배 계급’이며, 이들은 ‘나무’보다도 오래된 것이다."




 위의 글에서 내가 너무 큰 반감을 가져버리게 된 단어는 다름 아닌 '지배'라는 단어였다. 당시 나는 이 부분을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닌가 싶어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어 보았지만, 그 모든 반복 끝에 얻어낸 결론은 나의 이해는 틀리지 않았으며 저자는 확실히 '지배 계급(Dominance Hierarchy)'은 현재까지의 관찰에 의하면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현상', 즉 달리 말하여 가장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 따라 저자는 물론 글의 뒷부분에서는 오늘날의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신조 - 우리가 이러한 '지배 계급'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위해 싸우고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도전 정신 - 를 강조하고 있었으나, 지금도 그러하듯 예전의 나 또한 불행히도 그 논증이 성립하도록 하는 어떤 전제에 별로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마 이 시점에서 몇몇 독자분들은 나에게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지배 계급은 Jordan B. Peterson의 서술처럼 가장 오랫동안 현존하고 있는 '추상' 중 하나 아닌가? 가장 '자연적인 것'이 바로 이 지배 계급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에 적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인생을 매우 피곤하게 사는 나로서는 그러한 질문 자체가 이상하게 들리며 예전에도 그렇게 들렸을 것이다. 특히, 구효서의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에 대한 나의 이해로 다시 돌아가면 더더욱 그러하다.




관계 속 또 하나의 관계: 지배

출처: https://lawcorner.in/wp-content/uploads/2019/10/Abuse-of-Dominant-Position.jpg


 Jordan B. Peterson의 기술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 당시의 나는 '지배'라는 단어에 굉장히 집착했고, 그 집착은 당시 문학 수업 시간에 다루고 있었던 구효서의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라는 소설에 대한 나의 시각을 결국 지배하고 말았다. 즉, 나는 이 소설을 조금 이상할지는 모르겠지만 '지배'의 관점에 '지배'되면서 읽어버리게 된 것이었다.


 구효서의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에는 작중 총을 맞은 정길훈이라는 이등병이 동일 계급의 이두익에게 사고였지만 사실상 사살당한 뒤에 작성된 여러 보고서 - 이를테면 사고 경위서, 목격자와 피해자 주변 인물의 증언서 - 와, 그 보고서에 간섭하고 있는 '엄상사'라는 인물의 메모가 등장한다. 이 소설을 읽을 당시 그러한 요소, 즉 이런 '엄상사'라는 역시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의 간섭은 나에게 바로 이것이 '군대'라는 조직에서 피해자 '정길훈'의 죽음을 축소 및 은폐하려는 태도가 아닐까하는 일종의 직감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 '엄상사'라는 인물이 남긴 메모의 간섭은 윗선에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는 자신보다 하위 계급의 담당자에게 보고서에서 어떤 부분을 빼고 또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그 내용에 대한 서술을 변경하라는 지시까지 포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반감은 소설의 그 부분을 두어 번 되풀이해서 읽는 와중에도 점차 커져서, 결국 나의 생각은 이런 '엄상사'의 행태는 결국 현대 군대의 권위주의적 형상과 결합된 '상명하복'이 강요되는 '군대'라는 조직의 특성의 연상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생각은 문제의 질문에 도달했고, 그 결론으로서 얻어진 또 다른 질문 - 아주 암울한 질문 - 에 이르기까지 되어 버리고 말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우울의 발단이 된 문제의 질문은 "왜 그 수많은 군인들은 '상명하복'에 지배되는가?"라는 것으로, 우울과는 오히려 거리가 멀어 보이는 비교적 평범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 답으로 스톡홀름 증후군을 생각해보다가 문득 '법이 그런 식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자, 법은 적어도 기본적으로는 민중에 의해 설계되고 제정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군인을 포함하는 민중이 그 스스로에게 불리한 법을 제정할 리가 없다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가정이 사고를 비집고 들어오면서 무언가 꽤 불편한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불편한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답은 사실 우리가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물론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지배'를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것도 맞지만, 사실 그 실면은 '정권 심판'의 정도에서나 드러나는 정도일 뿐이며, 사실 우리 스스로가 실질적으로 지배를 조절할 수 없지 않느냐고. 즉, 우리는 시스템에게 지배당하는 영향이 더 높은 개인일 뿐이라, '벽'에게 지배당하는 '알'들일 뿐이라 군인들, 그리고 심지어 우리들까지 '상명하복'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그러면 여기서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나는 그 불편한 목소리를 맞받아쳤다. 맞받아친다고 말한 것이기는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시점에서 나는 이미 목소리의 말이 맞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군인들은 상관의 말과 그것을 거부하면 스스로에게 떨어지는 형벌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있으며, 나를 비롯한 모든 이들 - 이를테면 학생들이 무서워하는 학생 주임 선생님부터, 가족과 친척, 모 회사의 중역들, 삼성의 회장, 국회의원과 국무총리, 그리고 대통령 - 은 (적어도 명목적으로는) 법에 의한 지배를 받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불편한 목소리가 나에게 반환한 대답은 나의 예상에서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타(他)."




 목소리의 의외의 대답에 당황한 나였지만, 나는 목소리의 논증을 어떻게든 거부하고 싶은 내적 심리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어서 목소리의 대답 속에 품은 자기 모순을 드러내는 식으로 그의 주장을 무너뜨리리라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만일 타(他)가 우리를 지배하는 시스템이라면, 모든 타(他)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지배의 존재를 보장하는가?"


 그러나 이 질문은 목소리를 위한 질문이었으므로, 독자 여러분들을 위하여 이 질문에 대한 다른 표현 방식도 병기해야 할 것 같다.


 "타인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지배의 존재를 보장하는가? 즉, 서로 상호작용하는 두 개인이 있다면, 이들 두 개인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지배 관계를 포함하는가?"


 그 당시의 나는 두 개인 사이의 모든 관계가 지배 관계를 포함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아주 확고했으므로, 이제 목소리가 드러난 그의 논점의 모순으로 인하여 자멸할 것이라 예상하며 목소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조금 지나 돌아온 목소리의 대답으로 인하여 자멸한 쪽은, 목소리가 아닌 나였다.


 "그렇다."


 완전히 제대로 당한 나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


 "어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과정을 생각해보라. 동등하게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주의 깊게 듣다 보면 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학생과 선생님의 관계를 예로 들어보도록 할까. 이 경우는 당연히 시험 문제의 출제권과 학생부의 작성 권한을 가지고 있는 선생님이 일반적으로 더 '센 사람'이라고 인정되며, 자본주의 사회라는 이 사회 전반에서도 임의의 두 개인을 선택하더라도 '경제적 수준'의 차이가 항상 존재하므로, 더 '센 사람'을 우리는 선별할 수 있다. 아무리 민주주의 사회를 외치고, 차별을 철폐하는 수많은 제도와 법을 마련하는 사회지만, 당장 '대통령'과 '나'를 비교해보라. 대통령이 더 센 사람이 아니던가? -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개인 사이의 관계에서는 '누가 더 힘이 세고, 누가 더 힘이 약한지'는 손쉽게 판별할 수 있다. 이러한 관찰 결과는 두 개인 사이의 어떤 관계는 반드시 '지배 관계'를 포함한다고 결론을 내려야 하는 당위성을 입증해주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지 않은가?"


 말문이 막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은 아주 오랫동안 흘렀다.




'지배'라는 이름의 벽, 그리고 그 앞의 나


 그렇게 나는 목소리와의 논쟁에서 진 대가로 꽤 오랜 시간을 우울한 생각에 시달려야 했다. 만약 목소리의 주장이 맞다면, 즉 모든 관계가 필연적으로 지배 관계를 내포하는 것이라면 나의 꿈 중에 하나가 아주 철저하게 좌절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좌절되는 꿈은 다름이 아닌 나 나름의 유토피아로 정의된 하나의 세계였다. 그 세계의 이름은 '모든 사람의 관계가 대등한 사회'였다.


 고등학교의 오랜 경쟁에서 오는 극심한 피로감,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 속의 수많은 생존 경쟁이 원인이 되어 만들어진 추상이자 어떤 가치에 해당하는 이러한 유토피아가 좌절된다는 것의 의미를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평등을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들의 의미 자체가 전적으로 부정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즉, 유토피아의 좌절은 곧 많은 이들이 꿈꾸는 '모두가 평등하며, 그 누구도 상처 받지 않는 세계'의 실현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었고, 그런 세계를 쫓는 이들은 모두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고 선언하는 행위 그 자체였다.


 ... 지금도 이 인식은 계속되어서, Jordan B. Peterson과 구효서의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는 여전히 나를 좌절시킨다. 어쩌면, Jordan B. Peterson의 말대로 '지배 계급'은 불가피한 것이며 나는 이것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여전히 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패배의 인정을 모르는 인간인 듯하다. 논리가 가져다준 이 암흑 속에서도 나는 어떻게든 끝까지 목소리와 Peterson, 구효서의 결론을 부정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련의 '반기'를 이제 들 수 있지 않은가라고 다시 있는 힘을 다해 반박하고 있다. 그들의 논리가 지배 계급의 불가피성을 계속 나에게 확인시켜준다고 할 지라도, 나는 여전히 이를 계속 부정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당신들은 '지배 계급'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고민한 것 같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들의 전제를 부정한다고,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그 영역을 개척하고 위치를 구축했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힘에 의해 수많은 질서와 체계가 무너졌으니, 나는 그 인간의 힘에 다시 한번 일말의 희망이라도 품어보겠다고. '지배 계급' 또한, 인간의 힘으로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라고, 애써 변명하고, 또다시 변명하고 있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적어도 여전히,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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