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오시는 손님들은 카페 알바생을 음료 만드는 NPC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큰 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풀어놓는데, 그 이야기가 사랑과 전쟁보다도 스펙타클하고 반전영화보다도 흥미진진하다.]
정말 맞다. 카페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물론 엿듣는 게 아니라 듣기 싫어도, 들려오는 그 이야기들이다.) 그 인생사가 한 편의 시요, 영화요, 드라마요, 다큐멘터리다. 많은 작가들이 카페에서 일하는 이유가 백색소음으로 집중이 잘 되어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다 한다. 괜히 그러는 게 아니다. 정말 카페에는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동안 내가 카페에서 일한 시간을 합치면 10년이 훌쩍 넘는다. 본업이 따로 있지만 생계를 위해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그 정도의 경력이 쌓였다. 한 곳에서 쭉 10년을 일한 것은 아니지만 카페라는 특정 장소에서 긴 시간 동안 근무하다 보니 나에겐 카페 자체가 삶과 인생, 그리고 사람에 있어서 여러 깨달음이 공존하게 된 곳이다. 이제는 우리의 일상 속에 깊숙이 스며든 카페. 내가 그곳에서 만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샷 추출 시간은 20 ~ 30초 사이가 평균적으로 적당하다.
처음으로 일을 시작했던 카페는 대형 프랜차이즈였다. 당시 그 카페 오픈 시간은 8시였는데 항상 8시 5분 즈음에 오시는 40대 정도의 남성분이 계셨다. 짙은 남색 모자를 눌러쓰신 그분은 늘 한 방울 정도의 웃음을 머금은 어눌한 말투로 이렇게 주문하셨다. "핫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그리고 창가에 있는 고정된 지정석에 앉아 창밖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시다가 9시 30분-10시 사이에는 꼭 나가셨다. "감사합니다." 하고 눈인사를 건네며 퇴장하는 그의 어리숙한 말투는 출근한 뒤 한 숨 돌릴 때가 되었다는 일종의 알람이었다.
애석하게도 그분은 알바생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기 딱 좋은 캐릭터였다. 외국인들이 서툴게 한국말을 하는 듯한 말투, 모자 사이로 보이는 살짝 떡 진 머리, 작은 키와 통통한 체형에 뒤뚱거리는 팔자걸음. 무엇보다도 때때로 오픈 알바생보다도 더 일찍 와서 기다리는 썩 반갑지 않은 손님.
일은 안 하는 것 같은데 대체 뭐 하는 분일까, 매일 같이 아메리카노를 마실 돈은 어디서 나는 걸까 (대형 프랜차이즈였기에 심지어 그렇게 저렴한 편은 아니었다.) 일 하기 싫고 수다는 떨고 싶은 알바생들에게 그는 심심풀이 땅콩으로 삼기에 적당한 가십거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르바이트생이 궁금증을 참다못해 물어봤다며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미국에서 살다 왔는데 홀어머니 모시고 지금 단 둘이 산대. 근데 어머니가 조금 아프신가 봐.
그 말을 들은 모든 아르바이트생이 반신반의했다. 핫 아메리카노를 말하는 그의 발음이 썩 좋진 않았는데... 그래도 묘한 리듬의 그의 말투가 교포 특유의 한국어 발음과도 유사했기 때문에 어, 진짜 미국에서 살다 왔나? 싶었다. 근데 어떻게 자기 이야기를 해 주셨네? 하고 누군가가 물어보니 그 아르바이트생이 말했다.
미국 살다 온건 그분한테 들은 거고 어머니 아픈 건, 어머니랑 통화하는 거 옆 테이블 치우다가 들었어. 미국에서 모닝커피를 늘 마셨는데 여기 커피가 거기 커피랑 맛이 제일 비슷하대.
이 말을 들은 나는 아, 왠지 어머니가 아프셔서 어쩔 수 없이 한국 들어오신 것 같네 라고 말했다. 창 밖을 꼼짝 않고 바라보던 그의 빈 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매일 같이 듣던 "핫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가 없어지자 조금 허전하다 싶을 즈음에 그가 나타났다. 처음엔 그인지 못 알아봤다. 모자를 벗은 그는 조금 침울하게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여전히 살짝 떡진 머리, 익숙한 말투에 괜스레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오랜만에 오셨네요 하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는 바닥을 쳐다보며 예, 일이 좀 있어서요. 하고 뒤뚱거리며 지정석에 가 앉았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하고 이야기하자 그는 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아메리카노를 가져갔는지 신경 쓸 겨를 없이 오픈 준비를 끝내고 밀려오는 음료 주문을 만들어냈다. 몇 차례나 다른 손님들의 음료를 픽업대에 올려놓았는데도 그의 아메리카노는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그대로 있었다. 힐끗 창가 쪽을 쳐다보니 그는 음료를 찾아갈 마음이 없어 보였다. 핫 아메리카노는 점점 식어가고 있었기에 나는 직접 커피를 가져다 주기로 했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하고 테이블에 머그컵을 살며시 내려놓자 그가 아.. 감사합니다.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을 보는 순간, 늘 아르바이트생들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주문을 하던 그가 오늘은 바닥만 쳐다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쌍꺼풀 없는 커다란 그의 눈이 빨갛게 달아 올라 있었다. 직감적으로 그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알았다.
그러나 사무적으로 맛있게 드세요 하고 돌아서는 것 밖에 내가 딱히 그에게 건넬 말은 없었다. 나는 그의 사정을 모르는 아르바이트 생이고 그는 그저 오픈 시간 전에 카페를 찾아오는 얄궂은 손님인 관계였을 뿐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손님 1인 그의 벌건 눈을 외면하고 돌아섰다.
정신없이 음료를 만들다가 무심코 그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는데 웬일인지 그가 창밖이 아닌 반대쪽 의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붉은 노을 같이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과 표정은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시골 어귀에 있는 나무 장승같았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결심한 것 같기도 한 묘한 인상이었다. 분명 말은 하고 있지 않았는데 그의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바쁜 타임이 지나가고 한시름 돌리며 스탭실에서 물을 마시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입구 쪽을 바라보자 나가는 그의 등이 보였다. 픽업대에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그의 핫 아메리카노가 처량하게 올려져 있었다. 늘 건네던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없이 그렇게 그는 그 날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카페에 오지 않았다.
내 직감과 달리 그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어머니가 쾌차하셔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 그곳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는 거 일수도 있다. 그는 늘 이 곳 창밖으로 미국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겠지. 홀어머니를 모신다는 그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커피를 마시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그의 벌건 눈 속에 있던 건 외로움이었다. 미국에 대한 외로움인지, 사람에 대한 외로움인지, 어머니에 대한 외로움인지 난 알 수 없다. 그저 그에게 그 날,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 줄 수 있는 한 잔의 핫 아메리카노를 건네주지 못한 게 두고두고 미안할 뿐이다. 미국 어딘가의 야외 테라스에서 짙은 남색 모자를 쓰고 살짝 떡진 머리를 한 채 "핫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