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을 읽고
순간은 가상의 개념이며, 현재의 어떤 사건도 금방 과거가 되어 버린다. 인간이 현재를 '잃어버리며' 사는 이유다. '그때 그 일을 했었더라면'이나,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있다면'이 모티프인 작품이 많은 건 바로 그래서 아닐까.
그뿐만 아니라 시간은 인간 존재와 실질적으로 묶여있기도 하다. 한 명의 인간은 그 자체로 과거의 총합이고, 그의 모든 부분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제약 아래 있다. 과거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형성되던 시점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의식하며 사는데, 바로 여기서 추억이 소중하단 감각이 생겨난다.
따라서 기억하는 행위야말로 삶의 본질이다. 'you are what you eat'이라는 잘 알려진 문장을 'you are what you remember'로 고쳐 쓴다 해도 동등한 만큼의 심오함이 담겨있다. 인간의 경험이 기억 세포로 치환되고, 쌓여나가는 과정으로 인생을 정의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서술은 화자 머릿속 기억 그대로를 죽 퍼내어 늘어놓는 방식이다. 마치 꿈 이야기를 하듯, 꼬리에 꼬리를 물며 소재가 넘어간다. 시간이 뒤죽박죽이고, 화제 전환은 갑작스럽다. 하지만 기억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이 오히려 적합한 방법일지 모른다. 인간의 한 부분을 이루는 데이터 더미를 쌓여 있는 형태 그대로 펼쳐 놓는 식. 이것을 기승전결 틀 안에 집어넣으려는 시도가 문제일 수 있다.
쓰여있는 내용은 대개 사소한 것들이다. 이들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앞서 말한 시간의 비가역 속성과 함께, 시각, 후각, 미각이 합동으로 빚어 낸는 재해석 과정 덕분이다. 감각의 털실로 하는 기억의 뜨개질이라 할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커다란 빛을 발하며, 그 매개는 생기 있게 세상 모든 것을, 아무리 자잘한 것이라도 모조리 흡수하던 어린 시절 감각기관이다. 감각은 작은 것도 크고 의미 있도록 유입되는 정보량을 극적으로 증가시킨다.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이다. 예를 들면 사색을 통한 사고 형성과정이라든지, 알려지면 민망할 가정사라든지, 공유하기 어려운 소재들로 가득 차 있다. 익숙함의 풍경이 습관의 형태로, 자신만의, 혹은 가까운 사람과만 공유했던 좁은 범위 세계에, 두터움을 형성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작품을 이렇게 개인사 기록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내면세계의 방대함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된다. 사실 누구나 머릿속에 '잃어버린 시간의 찾아서' 같은 대작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프루스트에게는 그것을 끄집어내어 활자화할 문필력이 있었다는 점이 다만 차이라 하겠지만.
가장 중요하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순간에 작동하는 미감에 대한 이야기다. 말하자면 이미지, 향기, 형태, 인상, 또 환상 같은 요소들을 인지하고, 가치를 알아보는 과정을 그렸다. 대개 이들 요소엔 휘발성이 내재되어 있으나, 미를 감지하는 능력이 날아가지 않도록 잡아준다. 두고두고 기억케 하고, 심지어는 비슷한 상황일 때 잠시 과거로 넘어가게까지도 만든다.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시선에 뒤따라오는 '해석'에 대해서도 지적해야 한다. 화자는 모양, 햇살, 인상 뒤에 무언가가 숨어있는 것처럼 느꼈다 회상한다. 숨은 것을 지각하는 일은 어렵지만, 혹 이것이 가능했을 때 모호한 기쁨과 도취감을 느꼈다고도 말한다. 이런 종류의 경험은 삶의 다른 요소와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차원을 부여받고, 앞날의 작가 활동에 자양분이 될 것이다.
독자는 이 장황한 이야기는 대체 무엇인가 질문해야 한다. 햇볕의 찬란함,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느낀 황홀함, 소소한 일화가 만드는 따사로운 안정감 등등. 표면적으로 풍경, 인물, 사건을 접했을 때 일어난 마음의 기록이라 하겠지만 작품 바깥에서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을 화자, 또는 프루스트를 떠올려 보면 그 이상이 담겨있단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훗날 작가가 됨이 암시된 점과 관련하여, 그를 성장시키고 마음이 자라나게 했던 콩브레에서의 경험들, 그렇게 형성된 자신의 일부에 대한 소개로도 읽혔다. 누군가는 읽기 어렵다, 혼란스럽다, 갈피 잡기 어렵다 불평하겠지만, 이 모든 게 화자에겐 그저 정체성의 일부인 것이다. 아마도 그가 느끼는 장면들의 무게만큼이 바로 작품의 가치가 된다 보면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