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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호티브 Jan 17. 2019

#10 아는 것은 힘일까?

모르는 것은 약일까?

이따금씩 그런 날이 있다.

간사이 와이드패스를 사용해 교토역에서 기차를 타고 3시간을 달려 시라하마로 향하던 날이었다. 시라하마의 백색 해변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가고자 했던 아름다운 노천온천은 공사 중이었고,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다른 온천도 목요일 휴무라는 간판만이 가득했다. 해가 지자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사진에서 보았던 엔게츠도의 일몰을 보기 위해 돌아가는 기차까지 놓쳐가며 한 시간 반을 기다렸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일몰은 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실패 투성이인 날이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자 버스 정류장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왕복 6시간이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신오사카 역에 도착한 뒤 교토역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을 때, 문득 창 밖에 비친 나를 보는데 내가 너무 한심하고 못나보였다. 평소에는 그러한 감정을 잘 느끼지 못했는데 모자란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와 이내 허점투성이로 가득한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쳐 있는 것을 보았다.

이따금씩 그런 날들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런 날은 내가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많이 알아간 날이었고, 나에 대해 무언가를 많이 느낀 날이기도 했다.


모르는 것이 힘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내가 지금보다 어렸던 시절을 자주 그리는 이유 중 하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을 대하고 온전히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몰랐기 때문에 덤빌 수 있었고, 몰랐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둘 무언가를 알아갈수록, 더 많이 알기를 원할수록 나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서툴도 부족한 존재였는지 알아가는 것이 내 자존감을 깎고 있다고 느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지에 조사하다보면 떠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그 나라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는 척척박사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지금은 우리가 알고자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고, 알 수 있는 범위는 상상 이상으로 방대하다.


SNS가 발전하면서 이제는 방 안에 누워 세상 모든 사람의 삶을 구경할 수 있다. 예전에는 방 안에 누워 고민하던 것을 일어서서 도전하던 나였다. 그러나 손바닥 만한 핸드폰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고 나자, 방 안에 누워 내가 했던 고민과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다 몇십 년 뒤의 내 미래까지 그려보고는 현재의 내가 얼마나 뒤처져 있는 지를 느끼고 좌절한다. 


나보다 어리지만 앞서 나가고 있는 사람, 정말 이 분야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화면을 통해 손쉽게 만나다 보면 '내가 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 능력이 되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할까.', '여태까지 나는 뭘 하고 살아온 걸까.'라는 물음에 부딪히며 결국 쏟아지는 고민에 밤을 지새 다음 날을 완전히 망쳐버리곤 한다.

물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 난 면만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SNS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차라리 이런 게 없었다면 나는 조금 더 모름의 용기를 가지고 도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시작도 전에 앞을 가로막는 듯한 이 기분은 언제 느껴도 꺼림칙하다. 너무 많이 알아버렸기에 무기력해지고, 너무 많이 알아버렸기에 내가 하는 행동들 중 사소하고 무의미한 행동들은 재빨리 버려진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어느 순간 공허함과 허탈감, 절망감만이 곁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되곤 한다.


아마 우주의 신비를 풀어헤치던 학자들이 인간이 우주 속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였는지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자포자기해버리는 것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 건가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 걸까? 아니, 방 안에 누워 작은 화면 속으로 세상을 쉽게 알게 돼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 알고 나니 아쉽다. 나는 모르고 싶다. 원하던 걸 모르던 시절이 확실히 나았다.


알고 싶어서 알려했지만 알고 나니 모르고 싶다니. 참 아이러니다. 인생의 판도라 상자는 미리 열어보는 게 아니었다.


혜안을 줘.

그래서 혜안을 가지고 싶다. '중용'이라는 단어를 지금에 와서 되뇔 줄이야. 넘치는 정보들 중에 자극과 아이디어만을 받아갈 수 있는, 그 정도의 선을 지킬 수 있는 명쾌한 방법은 없는 걸까.



참 자존감이 남아지고 있다고 느꼈지만 괜찮다. 이것도 한순간의 고민일 뿐일 테니까. 나는 다시 나를 믿고 잘 살아가겠지. 새벽녘의 넋두리일 뿐일 것이다.




● 함께 한 플레이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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