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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호티브 Nov 11. 2018

#4 평생 대학생이고 싶었다 (2)

도시샤 대학에서

윤동주와 정지용


우리나라의 근대 시 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 교토에는 그들이 다녔던 '도시샤 대학'이 있다. 그리고 도시샤 대학 한편에는 도시샤 교우회 코리아 클럽에서 조성한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자리 잡고 있다.



홈 커밍 데이를 맞은 일요일의 도시샤 대학은 학생들과 가족들로 붐볐다. 저마다 학교 한편에 자리 잡고 담소를 나누거나 학생들끼리, 가족끼리 추억을 담은 사진을 남기느라 분주했다.


대학 외관을 둘러싼 벽이 일본 특유의 양식으로 되어 있어 대학 내부 역시 일본풍이 짙게 배어 있으리라 짐작했으나, 막상 대학 안으로 들어오자 붉은 벽돌들로 지어진 기독교 혹은 천주교에 건물 양식에 영향을 받은 듯한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어 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풍겼다. 세련된 느낌의 교토대학교와는 다르게 고풍스럽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름다운 도시샤 대학 안, 학생들에게 '한국의 시인의 시비를 찾아왔습니다'라고 묻자 한 학생은 흔쾌히 나를 직접 시비 쪽으로 안내해주었다. 대학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옆으로 정지용 시인의 시비 역시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시비에는 자필 원고의 글씨가 그대로 새겨진 <서시>가 정지용 시인의 시비에는 교토를 그린 <압천>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궁화와 태극기, 두 분께 전하는 방명록이 마련되어 있었다. 방명록에는 저마다의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을 향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나 역시도 역사의 한 기틀이 된 그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감사의 인사를 적고는 근처 벤치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


자기소개서와 면접의 단골 질문 중에는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도전했던 일'이라는 질문이 있다. 이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주저 없이 '학생회장을 역임했던 일'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내 인생의 모든 게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 터닝포인트 역시 '학생회장을 역임했던 때'라고 답한다. 내 인생은 이 일을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순수하게 학교와 사람을 좋아했던 20살의 나는 어느새 훌쩍 자랐다. 그리고 4학년을 앞둔 시기에는 지금 하고 있는 여행을 위한 휴학과 학생회장 출마 사이에서 고민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나의 가치관은 물론 성향까지 뒤바꿔 놓았다. 아주 많이.



나는 학생회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곳에서 배운 것이 너무나도 많기에, 학생회라는 조직을 더욱 좋은 방향으로 성장시킴과 동시에 나 역시 마찬가지로 성장하고 싶었다. 나의 출발점은 리더가 되어보고 싶은 단순한 권력욕이 아닌 이 단체에 대한 애정이었다.


나는 대학을 '작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학생회는 사회와 가장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학생회는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실질적인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곳이다. 학생회가 기업이 원하는 전문적인 역량을 길러 줄 수 있는 단체는 아니지만, 대인관계가 중점이 되는 사회생활에 있어 자신의 성격과 방식을 진단해보고 고쳐나갈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임은 분명하다.


내가 이 단체에 속하며 배우고 쌓았던 것이 많았기에 보답하고 싶었다.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내 인생에서 이 정도의 확신과 이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덤볐던 일은 없었다. 나는 이 일에 매력을 느껴 좋아했고, 인생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 확신했다. 포기하게 된다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던,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신념을 멋지게 그려보고 싶었다. 그렇게 출마하게 되었다.



나는 모든 일의 결과는 스스로가 설정한 가치만큼 돌아온다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학생회장이라는 자리를 엄청난 가치가 있는 일이라 여겼다. 누군가가 나에게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을 쥐어주고, 나를 따라주고 믿어 준다는 일. 그것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를 국회의원만큼, 대통령에 비견될 만큼 막중한 자리라 설정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막중한 책임감을 한껏 실어 떠안았다.


그리고는 조직의 목표과 이상적인 리더상을 설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한 조직의 목표는 '존재 의의 달성'이었다. 학생회는 학생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기구이자 모든 일에 투철한 봉사정신의 함양이 필요한 기구이기 때문에 이 존재 의의를 달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맡은 '학회장'이라는 리더는 개인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과시하는 것이 아닌,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시험하고 시행착오 끝에 반성하며 더 나은 결과물을 얻을 때까지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책임져줄 수 있는, 모두에게 든든한 버팀목이고 싶었다.


그렇게 출발점에 섰던 나는 서서히 본연의 나를 지우고 내가 설정한 그 '학회장'이 되었다.



그렇게 임기가 시작됐다. 정말 자신 있게 모든 것을 다 바쳤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력했다. 아마 이렇게 혼자 어딘 가에 걸터앉아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여 정리하는 습관은 그때부터 생겨난 것 같다.


회의가 있을 때면 몇 주전부터 전달해야 할 것들,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들을 틈틈이 정리해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작은 부분까지 세세하게 준비했다. 주어진 임기 안에 최대한 많은 것들을 학생회 부원들에게 전해주고 싶었기에.


그 시절의 나는 고작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좁디좁은 고시텔에 혼자 자취를 했다. 그리고 그 방 안에서 혼자 맥주 한 캔을 뜯어 놓고 고뇌하며 몇 달 후에 있을 행사까지 하나하나 고민해가며 정리하고 준비했다. 아무 보잘것없었던 나를 리더로서 믿고 따라 주는 이들, 나에게 이 자리를 맡긴 이들에게 많은 것들을 보답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해 나 자신을 배신하기 싫었다. 정말 귀중한 일이라 믿었기에.



그때부터 나는 개인이 아닌 전체를 보는 습관을 가졌다. 항상 전체적인 분위기를 생각했고, 모두가 만족하고 수긍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이끌고자 했다. 누군가에게 더, 누군가에게는 덜 나눠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적절히 유지할 수 있게끔 나 스스로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했고, 감정을 절제했다. 일종의 강박관념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무언가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함께 한다는 느낌보다는 스스로가 어딘 가에 겉돌고 있다는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그러나 무시했다. 그런 것들을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사소한 것들은 무시하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이뤄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위기는 기회다


그렇게 빠르게 속력을 내는 열차는 쉴 틈 없이 달렸다. 그러던 와중에 위기가 닥쳐왔다. 모두가 걱정하는 사안이었고, 나 역시도 갈피를 잡지 못할 만큼 혼란스러웠다. 그때도 나는 나를 지웠다. 내가 설정한 리더상이 있기에, 나 보다는 그들을 먼저 생각하고자 했다. 그들이 걱정하지 않게끔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책임을 져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 위기를 통해 우리가 더욱 단단하게 뭉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그들에게 '위기는 기회다'라고 말했다. 세차게 흔들렸던 우리지만 우리는 정말로 그것을 기회로 만들어 더욱 빛나는 조직을 만들어 나갔다.



그맘때 즈음 나는 사랑을 시작했고, 이별을 경험했다. 나는 너무 욕심이 많았고, 급했고, 서툴렀다. 나는 사랑을 하면서도 여전히 학생회장이라는 일이 좋았다. 나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오만이었다.


닮고 싶었다. 그 사람이 가진 성격과 취미, 취향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내가 잊고 있었던 것들을 깨닫게 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아마 내 그릇이 너무 작았던 탓이었을까? 그렇게 나는 지는 봄꽃처럼 짧고 아련했던 그것을 놓쳤다. 돌아보면 나는 그때도 마찬가지로 내가 아닌 내가 설정한 '학회장'이라는 역할 속에 갇혀있었다.



그렇게 어떻게 지나갔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한 학기가 끝났다. 나는 너무 큰 짐들을 스스로 안고 시작했고, 내가 짊어진 무게들은 지나오며 마주한 위기와 상처를 더해 더욱 무거워져 급하게 달리다 멈춰 선 나를 약속이라도 한 듯한꺼 번에 덮쳐왔다. 나는 그것에 짓눌렸고, 아파했다.


그렇게 나는 일종의 번아웃 증후군에 걸려버렸다. 모든 일에 무기력해지고, 자신감이 없어졌다. 긍정적인 미래를 생각했던 나는 점점 다가올 끝을 더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두려웠다. 내 모든 것을 바친 이 1년이 끝나게 된 다음에 존재할 내 모습이. 내가 정말 절실히 노력했던 1년이 다른 이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1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허망해했다. 그것들을 떨쳐보려 방학 내내 아르바이트에도 열심이었지만 한 번 떠오른 잔상은 도무지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댈 곳이 필요했다.


그러나, 돌아보았을 때 나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스스로를 가뒀기에. 내가 설정하고 몰입했던 '학회장'이라는 역할엔 감정적으로 나약한 모습이라곤 없었기 때문에.



나는 외롭고 고독한 자리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었다. 누가 강요라도 한 듯이 강박관념에 빠져 있었다. 강해야 한다고 나를 가뒀다. 나는 그렇게 그 안에서 혼자 벽을 더 단단하고 높게 세워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곳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자각했을 때, 이미 벽은 너무 높아져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학기가 찾아왔고,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게 남은 것은 학생회 하나뿐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일에 더욱 집착했다. 나는 내 감정의 도피처를 일로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과도할 정도로 그것에 집착했다.


전처럼 힘차게 무언가를 할 수도 없었다. 부원들이, 친구들이 부르는 자리에도 쉽사리 나갈 수가 없었다. 내가 가진 나약한 감정들을 들키기 싫었다. 그들이 실망할까 봐. 나 때문에 전체적인 분위기가 망가져 버릴까 봐. 그들이 생각하는 내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을까 봐.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 같은 이유 때문에 나는 혼자가 되는 편을 선택했다.


그렇게 다른 약속이 있다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혼자 좁은 방 한편에 걸터앉아 고민하는 나날들을 보냈다. 나는 내가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너무나도 내향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모두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서 나를 숨겼지만, 정작 내가 기대야 할 때 나는 너무도 공허했다.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었다. 누군가 확인해주길 원했다. 지금까지 잘해오고 있다고, 네가 최고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는 내 힘듦을 털어놓는 것에 서툴렀고, 전체를 생각하느라 멀어진 이들에게 다가가는 법을 몰라 갈팡질팡했다. '내가 갑자기 이래도 되나?', '나를 어색해하진 않을까?' 하는 일련의 생각들에 사로잡혀 망설이는 동안 나는 점점 혼자 고민하고 해결하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다음 연도에 학회장에 출마하기로 한 후배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이 정말 잘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형처럼 하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일을 못하더라도, 성과가 나지 않더라도 우리끼리 재미있는 학생회를 만들고 싶어요."


그 말을 듣고 돌아온 날, 내가 정해 오고 쌓아온 것이 맞는지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마 그 후배는 느꼈을지 모른다. 내가 어딘 가에 겉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어쨌든 마음은 놓였다. 본인 만의 확고한 목표가 있어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1년이 끝났다. 나는 아직도 정답을 모른다. 사람들은 나를 '성공했다'라고 생각했을까? 내가 목표로 하고 보이고 싶었던 것들은 그대로 전달이 잘 되었을까?


그 1년 동안 나는 정말 많은 것을 경험했고, 방황했고, 변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점점 그 시절의 나를 지우고 원래 활발했던 나를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과도하게 몰입했던 1년에서 벗어나 잃어버렸던 것들을 찾고 있다.


나에게 혼자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왜 그리 바보 같냐고 말해주는 동기와 후배 친구들과 내 옆에서 늘 나를 지켜주고 응원해주던 소중한 부학생회장, 같은 일을 하던 단과대학 학생회 친구들. 그리고 한 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던 나를 아무런 의심 없이 리더로 믿어주었던, 그때를 그리워하며 좋았었다고 말해주는 학생회 친구들. 나는 그들에게 감사하고 보답할 방법을 찾고 있다.


그리고 점점 서툴지만 전체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감정을 담아 다가가고자 노력해보고 있다. 아직은 어색하기만 하다. 나는 스스로 쌓아 올린 벽을 무너뜨리고 있는 중이다. 아직은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른다.


정말 애증의 1년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처음 설정했던 것만큼의 가치를 얻었음을 점점 느끼고 있다. 그 시간이 힘들었지만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면 나는 어떠한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


나는 더 배우고 싶다. 아직도 새벽 공기가 어수룩하게 내리면 그 시절을 그린다. 이제는 벗어나라고들 말하지만 이렇게 잠깐 벤치에 앉아 젖어볼 수 있을 만큼만이라도 계속 그 시절이고 싶고, 나를 돌아보고 더 다듬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은 평생 대학생이고 싶다. 그렇게 내가 성장했으니까.





● 함께 한 플레이리스트


offonoff - Overthinking

제이문 - 안정

MAC MILLER - ROS


● 함께 한 영화


<동주>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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