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쁨의 미래 #2
하루 24시간 중, 수면시간을 제외하고 현대인이 가장 많이 시간을 쏟는 것은 단연코 일이다. 노조와 정치권의 노력으로 예전보다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현대인들은 가정보다 일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따라서 일에 대한 역사와 고찰은 바쁨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미래의 일과 바쁨의 앙상블은 기존과는 무척 다른 형태를 보일 것인데, 그전에 우선 일과 바쁨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살펴보자.
600만 년 인류의 역사를 1년으로 압축할 경우, 12월 31일 오전 6시가 돼서야 인류는 농경생활을 시작한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12월 31일 11시 40분이다. 즉,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인류에게 일은 생존을 위한 수렵채집 활동이 전부였다. 따라서 자급자족을 통해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할 경우, 추가적인 일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 당시 일을 통해 느끼는 바쁨은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속성을 가진다.
하지만 약 1만 년 전부터, 농업혁명과 함께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일을 통한 바쁨의 속성은 변화한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잉여 생산물을 저장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일은 좀 더 규율화 됐고 지속성을 가지게 됐다. 이때부터 먹을 것이 풍부해지고 내일의 생존에 대한 확신이 생기며, 인류의 시간관은 조금씩 미래로 치닫기 시작했고 일을 통한 바쁨은 스멀스멀 자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당시 일의 주류였던 농업은 자연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바쁨의 정도가 지나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씨를 뿌리고 수확의 계절이 지나면 겨울에는 사람들이 일을 할 수가 없기에 휴식을 취했다.
일과 바쁨의 속성은 약 600년 전,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된다. 15세기 인클로저 운동이 시작된 이후, 토지에 울타리가 쳐지고 사람의 손이 거의 필요하지 않은 모직업이 발달하며 농민들은 점차 도시로 쫓겨났다. 당시 상황을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무어는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라고 표현했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촉발되고 공장에서 일하는 임금 노동자들이 늘어나며, 일은 곧 생활이 됐다. 대량 생산을 통해 양산된 것은 공산품뿐만 아니라, 바쁨이었다. 당시엔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대부분을 일하면서 착취당했다. 이때의 일은 바쁨의 촉매제가 됐고, 강제적인 속성을 가졌다.
비인간적인 착취를 견디지 못한 노동자들은 19-20세기에 걸쳐 노조를 결성했고, 투쟁을 통해 합법적인 조직으로 인정받으며 상당한 처우개선을 이끌어냈다. 고용주의 지나친 착취를 법적으로 금하는 제도들이 (주 40시간 법정 근로시간 등) 생기고, 마침내 사람들은 일에서 비롯된 바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이후, 일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쁨의 지배를 공고히 했는데 이는 육체노동에서 지식 노동으로의 전환과 높아진 여가의 기회비용 때문이다.
우선, 20세기 정보화 시대에 지식노동의 형태가 확산되며 일은 점차 만성적인 행태를 보인다. 육체노동자는 땀 흘려 바쁘게 일한 후, 일터에서 벗어난 순간 일에서 분리된다. 물리적인 연장 및 일터가 없으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식노동자는 일과 사생활을 분리하기 쉽지 않다. 두뇌가 곧 연장이며, 시공간 물리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일을 할 수 있기에, 일상생활이 곧 업무의 연속이고 늘 “스위치 온” 상태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생산성의 계량화가 용이한 육체노동과는 달리, 지식노동의 생산성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에 지식노동자의 바쁨의 기어는 쉬지 않고 돌아간다.
또한, 높아진 여가에 대한 기회비용 또한 바쁨에 한몫을 한다. 워커홀릭이나 번아웃 증후군은 상대적으로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 노동자에게서 나타나는 질병이다. 가령, 시급이 수십 만원에 달하는 대형 로펌 변호사와 시간당 최저임금 수천 원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을 비교해보자. 이 경우, 한 시간을 일하지 않는 데서 발생하는 기회비용은 많게는 백 배까지 차이가 난다. 따라서 일하지 않고 쉬는 것은 곧 돈 벌 기회를 놓치고 있는 셈이며, 높은 소득을 올리는 직업일수록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회비용을 많이 부담하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고소득 직종이 오랜 시간 일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때 20세기 이후 바쁨이 산업혁명 초기와 비교 시 가장 다른 점 중 하나는, 자발적인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류가 수렵채집 생활을 끝낸 이후, 일은 바쁨의 주요 원천으로 입지를 다져왔다. 하지만 이러한 일과 바쁨의 양상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앞두고 있는데, 기술의 발달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점차 일에서 비롯된 바쁨을 비자발적으로 잃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을 필두로 한 기술은 육체노동에 이어 지식 노동자의 영역을 서서히 잠식해나가고 있다. 미래엔 장기 고용을 보장하는 일자리보다는 프리랜서, 파트타임 형태의 유연한 고용이 점점 많아질 것이고, 노동자의 교섭력은 약해질 것이다. 실제로 인간 고유의 공감, 소통, 창의력이 요구되는 일부 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 일은 기계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고 수많은 공신력 있는 기관들은 전망한다.
역사적으로 기계와의 대결에서 인간은 늘 한계를 드러냈다. 이와 관련 유명한 일화로, 19세기 터널 공사에서 드릴이 사용되고, 노동자들이 해고 위기에 몰리자 가장 힘이 셌던 노동자 존 헨리는 기계와의 대결에 나섰다. 결국 존 헨리는 기계와의 터널 뚫기 대결에서 간신히 승리한다.‘역시 기계는 인간을 이길 수 없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존 헨리는 이 대결에서 지나치게 기력을 쏟은 나머지 죽고 말았다. 당시 사람들은 느꼈으리라.‘인간이 기계를 이기려면 정말 죽을 만큼 열심히 해야 하는구나’라고. 기계는 육체활동을 넘어 체스, 퀴즈, 바둑까지 인간 챔피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지적 활동으로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낙관주의자들은 말한다. 기술의 변화는 늘 있었고, 변곡점마다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고 기존의 일자리를 대체해왔기에 앞으로도 문제없다고. 실제로 농업->제조업->서비스업으로 주력 산업이 바뀌는 과정에서, 직업 재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쉽게 일터를 옮길 수 있었고, 전체 고용의 파이도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의 변화는 기존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변화를 주도하는 IT 산업이 전통산업 대비 많은 인력을 고용할 필요가 없는 구조고, 직업 재교육의 속도가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IT 기업들은 금융, 운송, 소매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파괴적 혁신을 통해, 전통의 강자들을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동화를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때문에 많은 수의 직원이 필요 없다. 예를 들어, 아마존은 34만 명을 고용하며 230만 명을 고용하는 월마트가 지배하던 소매 영역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 넷플릭스는 한 때 8만 명이 넘는 직원들을 보유했던 비디오 시장의 강자 블락버스터를 붕괴시켰지만, 현재 고작 3-4천 명 남짓한 직원을 고용할 뿐이다. 테슬라와 우버는 각각 3만 3천 명과 1만 2천 명의 직원을 고용하며, 전통 자동차 산업의 판을 뒤집고 있다. 참고로 폭스바겐의 직원 수는 63만 명이다. 에어비엔비는 고작 2-3천 명 남짓한 직원으로 전 세계 호텔 산업을 흔들고 있는데, 호텔 재벌 힐튼 그룹은 17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각각 72만 명과 17만 명을 고용하며 디지털 광고를 양분하고, TV, 신문, 라디오와 같은 전통 미디어 매체는 속수무책으로 이들에게 광고수익을 뺏기고 있다. 인터넷 전문 은행 찰스슈왑은 1만 6천 명을 고용하며 전통 은행들을 위협하는데, 미국에서 가장 큰 은행 중 하나인 웰스파고의 경우 27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직업 재교육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마저도 교육 수준 및 숙련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계층에겐 요원해 보인다. 예를 들어, 20세기 농부는 쉽게 볼트를 조이는 공장의 노동자가 될 수 있었고, 이들은 다시 서비스직으로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급변하는 환경 속, 자율 주행차, 키오스크, 챗봇에 의해 대체될 트럭 운전기사, 식당 점원, 콜센터 직원 등이 미래에 직업 재교육을 받고 수월하게 새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과연 이들이 코딩을 학습하고 빅데이터를 다루거나 혹은 부가가치가 높은 창의적인 일을 쉽게 할 수 있을까? 신기술 위주로 새롭게 바뀌는 산업 지형에서 이들이 설 자리가 얼마나 많을까? 나는 이에 대해 무척 회의적이다.
결국 승자는 핵심 기술을 보유한 국가 및 기업, 창의성을 발휘해 위기를 기회로 활용할 1%의 엘리트가 될 것이다. 21세기 변화의 물결을 주도하는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의 차이는, 마치 18세기 증기기관을 발명한 영국과 아프리카 소수 민족 간 격차만큼이나 벌어질 것이다. 누가 정치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선택받지 못한 대다수의 그룹을 위한 실업급여나 기본소득과 같은 보편적 복지는 점차 확대될 것이다. 그리고 자동화에 서서히 쪼그라드는 고용 시장에서 생존하고 기계보다 나은 생산성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일터에서 바쁨의 출력을 최고치로 끌어올릴 것이다.
바쁘지 않을 여력이 있는 극소수의 엘리트, 기계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존 헨리처럼 그 어느 때보다 바쁠 보통의 계층 그리고 일이 없어 비자발적으로 바쁨을 잃게 될 계층. 이것이 우리가 미래에 목격할 일과 관련된 바쁨의 양극화다. 바쁘고 싶어도 바쁘지 못할 잉여 계층이 느낄 무력감과, 턱없이 줄어들 가처분 소득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미래의 지도자들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는, 이 잉여 계층에게 어떻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 분열을 막느냐일 것이다. 일에서 벌어질 바쁨의 양극화는 결국 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데 이는 다음 파트에서 다루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