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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Feb 22. 2018

<어떻게 살 것인가> - 멋진 어른이란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고

인생을 어떻게 살지에 대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봤겠지만, 뚜렷한 답을 찾기는 무척 어렵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곧 '어떻게 죽을 것인가' 혹은 '어떻게 나이를 먹을 것인가'와 유사한 의미인데, 연초에는 어떻게 나이를 먹을 지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된다. 


한때는 언제나 막내로서 식당에 가면 수저 놓기 바빴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일을 할 때나 사석에서 후배들 및 동생들을 만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때때로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이들을 접할 때면, 연장자로서 짐짓 점잖은 행세를 하는 것이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른이 돼버린 것이다. 아마 나이를 더 먹고 중년 그리고 노인이 될 때도 마찬가지겠지. 마음만은 청춘이라던 노래가 생각난다.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일정한 수준의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 아니다. 내면의 어린아이를 감추는 것에 익숙해질 때, 차오르는 눈물을 의연하게 삼킬 수 있을 때, 거리의 꽃과 밤하늘의 별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적이 생각나지 않을 때, 사랑하는 대상에 애정과 더불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낄 때, 그리고 변하는 모든 것에 무뎌질 때. 이때 비로소 아이는 어른이 되는데, 이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한편, 요새 문득 드는 생각은, 저 사람처럼 늙고 싶다는 멋진 어른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대다수 평범한 어른들은 다음과 같았는데, 나는 결코 이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 지나치게 세속적인 가치에 집착하는 속물적인 어른,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자식에게 투사해, 자식의 삶에 온갖 간섭을 해대는 보상심리 가득한 어른, 회사와 집을 반복하며, 여가시간에 TV만 보는 무기력한 어른, 요즘 젊은것들은... 을 입에 달고 살는 꼰대 같은 어른,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것은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꽉 막힌 어른 등등.     


이런 배경에서, '멋진 어른이 되자'는 내게 중요한 삶의 신조 중 하나가 되었는데, 내가 생각하는 멋진 어른의 정의는 이러하다. 다름에 대한 관용을 가진 어른, 이따금 아이의 천진함이 미소에 묻어 나오는 어른, 확고한 삶의 주관이 있는 어른,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어른, 삶의 여백과 멋을 즐길 줄 아는 어른, 타인에게 영감을 주는 어른, 그리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어른이다.    


물론 이 모두를 충족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나의 순수는 부식될 것이고, 신념은 도전받을 것이며, 감각은 무뎌질 것이다. 하지만 이상향을 설정해 놓으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비슷해지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격 없이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흰머리 노인이 된 나를 상상해본다. 


++ 유시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사랑하고, 일하고, 놀고, 연대하라고 조언했는데, 무척 동의한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그만두고, 지식소매상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재정의하고 연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마침내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보길 바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M0lWieXaZgs&t=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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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발견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은가? 의미 있는 삶, 성공하는 인생의 비결은 무엇인가? 품격 있는 인생, 행복한 삶에는 어떤 것이 필요한가? 이것은 독립한 인격체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이미 예감한 중년들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 내가 나름대로 찾은 대답을 이야기했다. 삶의 기쁨, 존재의 의미, 인생의 품격을 찾으려고 고민하는 모든 분들의 건투를 빈다. 그 무엇도 의미 있는 삶을 찾으려고 분투하는 그대들을 막아서지 못할 것이다.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일과 놀이 및 사랑으로는 인생을 다 채우지 못한다. 그것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온전하게 느끼지 못하며, 그것만으로는 누릴 가치가 있는 행복을 다 누릴 수 없다. 타인의 고통과 기쁨에 공명하면서 함께 사회적 선을 이루어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연이 우리에게 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사용해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런 인생이 가장 아름답고 품격 있는 인생이다. 공감을 바탕으로 사회적 공동선을 이루어나가는 것을 나는 ‘연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가 이루어내는 아름답고 유쾌한 변화를 ‘진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한다. 


부모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잘못은 자녀의 삶을 대신 설계하고, 자녀의 행복을 대신 판단하는 데서 시작된다. 


출생의 행운과 불운은 이미 벌어진 일이다. 바꿀 수 없다. 행운은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눠야 한다. 불운은 온전히 혼자 감당하면서 극복해나가야 한다. 누군가 곁에서 거들어준다면 감사한 일이다.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왜 자살하지 않는가?’ 카뮈의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가슴이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있다.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너무 좋아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오를 것 같은 일이 있다. 누군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이 있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미안한 사람들이 있다. 설렘과 황홀, 그리움, 사랑의 느낌…. 이런 것들이 살아있음을 기쁘게 만든다. 나는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손잡고 더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미래의 어느 날이나 피안의 세상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 떠나는 것이야 서두를 필요가 없다. 더 일할 수도 더 놀 수도 누군가를 더 사랑할 수도 타인과 손잡을 수도 없게 되었을 때, 그때 조금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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