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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Feb 20. 2018

<피로사회> - 현대인은 왜 늘 피곤할까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고

퇴사 전 회사원이었을 때는, 일을 하지 않을 때에도 피로를 느꼈다. 이 개운치 않은 뒷맛은 여행을 가거나 주말에 집에서 빈둥거려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와서 당시를 돌이켜보면, 쉬는 것은 완전한 휴식이 아닌 일을 하기 위한 예열에 불과했고, 심지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이런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니, 피로가 가시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저명한 경제학자 케인즈는 20세기에 과감한 예언을 했다. 2030년쯤 되면 경제성장으로 인해, 사람들은 일주일에 15시간만 일해도 충분할 것이라고 말이다.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일하고, 자기계발 열풍이 사그라들지 않는 것을 보면 케인즈는 완전히 틀렸는데, 이는 그가 '과시적 생산'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과시적 생산은 분명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었다. 계급사회 출현 이후, 상당한 기간에 걸쳐 계층을 나눴던 것은 '과시적 소비'를 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대중이 쉽게 따라 하지 못하는 (대부분 경제적 이유) 기호 및 취향을 갖추는 것은, 상류층이 대중과 본인을 구분 짓는 주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명품이나 외제차로 허세를 부리며, 자신의 경제력을 과시하는 것은 구식이 돼버렸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본인이 얼마나 바쁘고 활동적인 삶을 사는지로, 자신의 가치를 은근히 뽐내고 싶어 한다. 이들은 과시적 생산을 통해, 자신이 능력 있고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워커홀릭이 주로 야심만만한 기업 경영자, 전문직 등에 만연한 질병인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지배 없는 자기 착취는 현대사회에 보편적인 정신질환이다. 기회와 가능성이 충만한 것처럼 보이는, 긍정의 "할 수 있다" 사회에서, 활동적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각광받는 삶의 기준이 되었다. 반면, 이러한 활동성에 반하거나 뒤쳐지는 자의 가슴엔 루저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다. 따라서 평생교육 혹은 자기관리라는 구호를 외치며 학생, 직장인 심지어 퇴직을 바라보는 사람들까지 자기계발에 매진한다. 각종 시험, 자격증, 학위, 운동 등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성취할 수 있는지 골몰하지만, 이것을 '왜' 하는지는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는다. 상당수는 남들이 하니까, 안 하면 뒤쳐지는 기분이 들어서와 같은 맹목적인 이유로, 현대인은 억척같이 만성 피로를 등에 업고 산다. 

 

당신도 어쩌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착취의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돼버린 것은 아닐까? 이 책을 통해 생각해보길 바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3FDTFPqav3c&index=3&list=PL2euNnZDwlbRtS6c3Bqeg2uVO1oj-rWFA

<피로사회> 책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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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발견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결핍 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적 질병이며,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성과사회, 활동 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와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화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날 진행 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이러한 강제 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과 함께 노동도 가져다주었다. 성과 주체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묶여 있다. 끝없이 다시 자라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는 성과 주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제2의 자아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의 인간은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빈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 간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모든 사색적 계기가 소실된다면, 삶은 일로,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행위로 퇴락하고 만다. 사색하는 머무름은 노동으로서의 시간을 중단시킨다. “시간 속의 활동과 일, 그리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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