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노예들

프롤로그

도처에 쇠사슬이 널려있다. 인류를 노예로 만들어 버린 문명의 쇠사슬이. 우리는 문명의 주체가 아닌 객체이며 단지 문명이라는 슈퍼 컴퓨터가 작동하는데 투입되는 에너지원에 불과하다. 그동안 인간사회의 일반적 사회 준칙이었던 계급 간 착취는 이제 해묵은 역사이다. 현대인은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자본가와 노동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문명에 예속된 노예이자 피착취자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 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자유롭지 않으면서 본인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인간만큼 절망적인 노예는 없다”라고 한 괴테의 말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비참한 상황에 처한 노예인 셈이다.

문명의 노예.png

나는 이 글을 통해 우리를 교묘하게 노예로 만들어버린 문명의 잔혹성을 고발하고자 한다. 문명화는 비열한 양면성에도 불구하고 긍정성만 부각된 경향이 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문명화의 부정성은 언제나 영리하게 은폐되었다. 문명은 스스로의 진화를 위해 ‘문명화는 바람직하다’라는 인식을 널리 퍼뜨렸고 이러한 선전은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실제로 문명은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경제 발전, 첨단 과학 기술, 수명 연장, 도시화 등과 같은 달콤한 선물을 인류에 선사했다. 이러한 성취는 인류의 마땅한 전진으로 여겨졌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문명화 덕분에 우리는 전보다 훨씬 행복해졌다” 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문명에 의해 조작되고 주입된 생각일 수 있다는 의심을 품지 않은 채,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말이다.


문명화의 부정성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대단히 치명적이다. 사실 문명화가 진행될수록 집단으로서의 문명만 빛을 발할 뿐, 이에 종속된 수많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별다른 혜택을 느끼지 못했다. 예를 들어 20세기 저명한 경제학자 케인즈는 저서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를 통해 엉터리 예언을 했다. 그는 미래 2030년에는 소득 수준이 8배 높아지면서 주당 15시간만 일해도 충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미래의 후손들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 어떻게 여가를 보낼지가 훨씬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위대한 경제학자답게 케인즈의 경제 전망은 들어맞았다. 자본은 지구를 통째로 삼켜버렸고 경제는 탐욕과 부채를 먹이 삼아 거침없이 성장했다. 그러나 노동 시간에 대한 케인즈의 예언은 완벽히 틀렸다. 주당 15시간은커녕 주당 52시간 근로 시간 단축법 시행에도 적잖은 진통을 겪는 것이 오늘날 현실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지만 생활고를 이겨내기 쉽지 않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조차 다양한 이유에 의해 –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여가를 어떻게 보낼지 몰라서 등 - 일에 파묻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즉, 문명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별다른 이점을 느끼지 못했다.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미래에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해봐야 번영의 과실은 문명에게로만 돌아갈 뿐, 사람들의 삶의 질 및 행복 수준이 뚜렷이 나아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명화의 수준과 사람들이 느끼는 만족도는 정비례하지 않을뿐더러 어쩌면 문명은 사람들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지구는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거대한 종합 운동장이 되어버렸고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 우울, 공허, 상실, 허무의 수준은 점차 심화되고 있다.


느림과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화려하고, 빠르고, 새로운 것을 좇는 사람들. 이들은 문명이 마련한 인공적인 사물의 세계 속에서 부유하고 있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명의 조류에 휩싸여 무기력하게 떠다니는 것이다. 방향키를 본인이 잡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 이들의 목적지는 사실 정해져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소멸이다. 문명의 발전을 위해 자신을 착취하고 생을 송두리째 에너지원으로 헌납하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종국에는 생을 마감하는 것이 일반적인 문명의 노예들의 숙명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당신이 문명화의 혜택 – 편리한 기술, 건강 증진, 물질적 풍요 등 – 을 온전히 누리면서 문명을 비판하는 것은 기만이 아닌가? 자동차 없이 먼 거리를 걸어 다니고, 먹을 것이 부족해 배를 굶주리며, 역병에 시달리며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던 미개한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당신이 아무리 문명의 잔혹성에 대해 고발한다 한들 그게 지금 내 인생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것은 합당한 지적인데 첫 번째 비판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본인 역시 태어남과 동시에 문명과 강제로 계약을 맺었다. 그 결과 문명과 뿌리 깊은 유대감을 공유하고 조건반사적인 학습에 의해 길들여졌는데, 이것이 나의 한계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고무적인 것은, 위대한 사상가로 불렸던 사람들 (이들의 사상은 이 책에서 많이 인용될 것이다) 조차 문명의 요람을 완전히 박차고 나간 이는 대단히 드물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비록 문명의 종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했을 지라도 훌륭한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이들은 문명의 중심에 있었기에 문명의 지배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2년간 문명에서 벗어나 숲 속에서 살면서 글을 썼고 <월든> 출간을 위해 다시 문명으로 돌아왔다. 만약 그가 문명에서 완전히 달아나 숲에서 평생 살았다면 <월든>은 출간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그의 사상은 생명력을 잃었을 것이다. 게다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만약 문명사회 미국이 아닌 아프리카 소수 민족에서 태어나 <월든>과 유사한 글을 썼다고 해도 그 파급력은 분명 미미했을 것이다. 따라서 문명을 비판하면서 문명화의 혜택을 누리는 것을 (컴퓨터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편리하게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나는 기만이라기보다는 ‘생각의 기록과 전파, 그리고 행동’을 최적화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변호하고 싶다.


두 번째 비판에 관해선 "그래서 지금 우리는 문명화 덕분에 과거 세대 대비 훨씬 행복해졌는가?"라는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렇다'라고 답하기 전에 생각해보자. 왜 과거 대비 훨씬 풍족하고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여전히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자살률은 줄어들지 않는 것일까? 이는 우리가 궁핍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및 이웃 간 유대감, 고향의 따스함, 삶의 여유, 소박함과 같은 가치들은 이제 현대사회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이러한 가치들은 문명화의 대가로 우리가 상실한 것들이다. 아마 정신이 단단히 개조된 정예 노예들은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한 자각조차 못할 것이다. 이들은 보통 향기 없는 통계치를 들먹거리며 문명화의 정당성을 입증하는데 골몰하느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제 미개한 (그러나 나름의 인간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산업화 이후 인류는 달콤한 문명화의 대가로 문명에 종속되는 편을 택했고, 이러한 ‘자유의 반납’은 이제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전 지구적 추세가 되었다. 결국 중요한 의사 결정의 주체는 인류가 아닌 문명 그 자체이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자연을 강간하다시피 하며 다른 종을 말살시키는데 앞장섰던 인간은 총구를 자기 자신에게 겨눴고 탄환은 이미 발사됐다.


세 번째 비판에 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분명 우리는 모두 다른 환경에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다른 삶을 살아가는 유일성을 지닌 존재들이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 어떤 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시리아 난민 캠프에서 태어난 3살 아이에게 세계화, 지구 온난화, 양극화 등과 같은 문제는 전혀 무관해 보인다. 또한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퇴직 연금을 받고 사는 60대 독거노인에게 브렉시트, 미중 전쟁, 생명공학, 저출산 등과 같은 문제는 큰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 저곳’에서 일어난 일이더라도 이는 분명 ‘이 곳’에 크고 작은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미친다. 왜냐하면 문명의 사슬이 이미 지역, 국가, 민족, 종교를 초월해 전 지구를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가령, 올해 국내에선 카풀 업계와 택시업계간 마찰이 생겼고 한 택시기사가 국회 앞에서 분신을 시도하다 숨진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비극의 주인공은 2009년 미국의 실리콘 밸리에 세워진 우버라는 스타트업의 출현이 약 9년 후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것을 당시에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파괴적인 문명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이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추후에 발생할 비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문명이 우리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그리고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대안은 무엇 일지에 대해 깊이 있는 사유를 할 필요가 있다는 듯이다.


이 책은 크게 네 가지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인식”에서는 문명에 의해 거대한 노예 수용소로 개조된 현대 사회의 실태를 고발한다. “2장-원인”은 인류가 어떻게 문명의 노예가 되었는지에 대한 원인을 다룬다. “3장-전망”은 문명이 인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주로 미래 사회 (당장은 아니지만 그리 멀지 않은)에 대한 이야기이자 인류가 힘을 합쳐 고민해 보아야 할 중요 담론이다. “4장-대안”에서는 문명의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인류가 취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지막 장을 구상하는 데 있어 위대한 사상가들의 업적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사실 문명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발상이 아니다. 근대 이후 과학자, 경영자, 정치가가 목소리를 모아 문명의 발전을 찬양할 때, 일부 지식인 및 예술가들은 과도한 문명화를 경계했고 날 선 비판을 했다. 하지만 결국 문명의 발전을 막지 못했고 인류의 노예화는 천천히, 그리고 확실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앞으로도 이러한 추세가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설령 어떤 국가의 지도자가 지나친 문명화에 위기를 느껴 자연을 보호하고 성장보다는 분배 및 삶의 질에 초점을 맞추자고 한다면 유권자들로부터 이런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다른 나라는 이만큼 경제 성장을 하는 마당에 말이 되나? 우리도 뒤쳐질 수 없다. 빨리 공장을 짓고 신기술을 개발해서 강력한 일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이처럼 이미 지구 상 거의 모든 정부에서 경제 성장은 최대의 목적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발전에 제동을 거는 것은 대단히 순진한 발상이다. 결국 문명화 및 인류의 노예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이것이 세계에 대한 나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21세기는 600만 인류의 역사에 변곡점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패러다임이 전환하는 도중에 ‘낀 세대’다. 그동안 우리는 원숭이에서 힘겹게 인간이 되었고, 이제는 문명에 의해 기계가 되고 있다. 사람들의 숨통을 조이는 것은 두 시대가 교차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앞으로 우리가 겪게 될 아노미는 ‘낀 세대’에 부과된 시대적 징벌이다. ‘낀 세대’인 내가 바라보고 해석한 시대의 기록은 분명 과거 위대한 사상가들이 미처 다루지 못했던 영역일 것이라 믿는다. 예를 들어,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이 규율을 통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고발했지만, 권력이 ‘디지털 판옵티콘’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진화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는 내가 미셸 푸코의 사상을 발전시켜 현시대를 새롭게 해석할 여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정보의 과잉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이 글이 모두에게 읽히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 기약 없이 유리병에 편지를 담아 바다에 띄우는 심정이다. 그러나 기록을 하는 것은 ‘생각의 기록-> 전파-> 행동’이라는 위대한 변화의 불씨를 지피는 첫걸음이다. 따라서 조급해하지 않고 묵묵히 글을 쓰는 것만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일 것이다. 유리병에 담긴 편지에 적힌 생각이 언젠가 영감의 원류가 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프로메테우스의 출현을 고대한다.


==================================================================

예전에 <현대판 노예>라는 책을 출간하기 위해 출판사와 이야기하다가 생각이 맞지 않아 ('노예'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표현이 들어간 제목, 타깃 독자 등) 취소된 적 있었습니다. 이 매거진은 그동안 생각을 더욱 숙성시킨 업그레이드된 버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번에도 만약 마땅한 출판사를 구하지 못한다면 크라우드펀딩이나 자비출판이라도 할 생각입니다.


덧. 독서할 시간이 없는 분들을 위해 책을 리뷰하는 '21세기 살롱'이라는 온라인 채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3분만 투자하면 책 한 권의 개괄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독은 큰 힘이 됩니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https://www.youtube.com/watch?v=5GZvBMvu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