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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Nov 07. 2020

디지털 전체주의, 같은 것의 지옥

포스트 코로나, 초 감시 사회의 도래 #3

독일계 유대인 출신 철학자 한나 아렌트만큼 전체주의에 대해 깊게 사유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나치의 유대인 핍박을 피해 해외로 망명한 전력이 있다. 훗날 전쟁이 마무리되고 나치가 심판대에 섰을 때, 그녀는 악의 평범성과 전체주의의 야만성을 조명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전체주의는 복잡한 문제에 대해 쉬운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대중을 규합한다. 이를 테면,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고 게르만 족이 똘똘 뭉쳐 전쟁을 일으키면 1차 세계대전 이후 침체된 독일이 다시금 위대한 국가로 거듭날 수 있다는 식이다.


전체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은 민족의 우수성, 역사적 사명감 따위이며, 그들은 대중이 ‘거대한 혁명’에 동참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애국심에 호소한다. 또한, 반체제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해 비밀경찰을 동원하는 것 역시 전체주의의 특징이다. 전체주의 하에서 인간은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한다. 인간의 개별성은 완전히 박탈당하고 단지 시스템을 구성하는 ‘재료’로 존재할 뿐이다.


전체주의에 세뇌된 사람들은 조종자에 의해 움직이는 자동인형에 불과하다.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명령을 따르며 수동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실제로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한 나치 전범 아이히만은 재판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지 충직하고 성실하며 정확하고 부지런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중략) 제가 살인자도 대량학살을 자행한 사람도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체주의가 무서운 점은, 극악무도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정작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조차도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전면적인 세뇌에 있다.


무솔리니나 히틀러가 오늘날 디지털 빅브라더를 바라본다면 일종의 경외심을 갖게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디지털 빅브라더는 그들이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했던 전체주의를 세련된 방식으로 구현해 냈으니까. 디지털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디지털 전체주의 하에서 인간은 데이터를 생산하고 운반하는 ‘노드 (Node)’로 전락한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프라이버시를 노출하기 때문에 비밀경찰이 따로 필요 없다. ‘싫어요’와 불행이 허락되지 않은 세계에서 우리는 다 같이 ‘좋아요’를 누르며 행복해한다.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에서 신자유주의와 디지털화가 디지털 전체주의를 야기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는 모든 것이 폭력적으로 획일화되는 과정을 가리켜 ‘같은 것의 테러’라고 표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같은 것의 테러는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산된다. 우리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인지하면서도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정보와 데이터를 쌓으면서도 어떤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체험과 흥분을 애타게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친구와 팔로워를 쌓으면서도 어떤 타자도 만나지 못한다. 사회 매체들은 사회적인 것의 절대적인 소멸 단계를 보여준다.”


디지털 전체주의는 곧 같은 것의 지옥이다. 우리는 필터 버블에 의해 “같은 것”들에 의해 둘러 쌓인다. 모두가 같은 것과 연결되고,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체험하고, 같은 트렌드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가진 고유의 색깔은 빠르게 탈취되고 우리는 점점 서로를 닮아간다.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인간은 획일화된다. 제 아무리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색깔을 가진 사람이라도, 한 번 디지털 네트워크에 접속하면 그의 색깔은 0과 1로 구성된 무채색으로 획일화된다. 디지털 빅브라더는 우리가 0과 1 이외의 무엇이 되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디지털 빅브라더는 ‘0과 1 너머의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좀처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끓는 물속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개구리와 디지털 전체주의 속 인간의 신세는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빅 데이터의 재료가 될 운명인 채로 디지털 네트워크로 ‘내던져지고’, 같은 것들에 둘러싸여 서서히 인간성을 제거당한다. 그 과정이 너무나 편리하고 안락해 우리는 대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좋아요’ 한다. 그리고 주변의 같은 것과 지속적으로 비교하며 남들과 같다는 사실에 안심한다. 빅 데이터 용광로가 쉼 없이 펄펄 끓는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같은 것의 지옥으로 빠져든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인페르노다.


한편, 디지털 빅브라더가 설계한 정교한 알고리즘 모형은 우리를 디지털 전체주의로 몰아넣는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2019년 중국은 ‘위대한 중국 공부’ 게임 앱을 출시했다. 중국 공산당을 찬양하는 학습 자료를 숙지한 뒤,  당에 대한 충성도를 점수로 환산하는 게임이다. 중국 공산당 치적을 기리는 것과 시진핑 주석의 우상화가 학습의 주된 내용이다. 중국 시민들은 의무적으로 게임을 해야 하고 학교나 직장 등지에서 상급자가 이를 감시한다. 중국 시민들은 게임을 통해 획득한 포인트를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심지어, 직장인들의 경우 향후 인사 평가에 학습 결과가 반영된다.  


문제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강도만 다를 뿐 중국과 유사한 방식으로 디지털 전체주의가 연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전체주의와 현대의 그것이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날 디지털 전체주의가 대단히 교묘한 방식으로 자행되고 있어 그 야만성이 은폐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포켓몬 고를 언급하며, 감시 자본주의의 미래가 전체주의적인 게임의 일상화 일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디지털 전체주의는 더 이상 공상 과학 영화 시나리오가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부터 감지되던 불길한 신호들, 이를 테면, 중산층의 붕괴, 자본주의의 위기,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의 부상, 세계의 분열,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 등등. 지루하게 반복된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일반적으로 이런 환경에서 전체주의는 악의 꽃을 피웠다. 대중은 난세를 타개할 영웅을 원했고, 그렇게 등장한 영웅이 권력을 잡으면 거의 예외 없이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독재자가 되어 전체주의를 조장했던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기점으로 ‘스트롱 맨’과 ‘큰 정부’가 더욱 주목받고 있다. 게다가 원시적인 민족주의와 무차별한 혐오, 그리고 근거 없는 프로파간다 역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점이 내게는 무척 불길한 신호로 여겨진다. 제2의 히틀러가 등장해 디지털 전체주의를 공고히 하고 21세기 역사의 페이지를 비극적인 내용으로 채워 나갈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같은 것의 지옥이 확산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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