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초 감시 사회의 도래 #4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토마스 앤더슨은 낮에는 평범한 프로그래머이지만 밤에는 네오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는 해커이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사실은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가상현실 매트릭스라는 점을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네오의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암담한 진실을 마주할 것인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상현실 속에서 평생 인공지능의 노예로 살 것인가. 네오는 용기 있게 전자를 택하고 인공지능에 맞서 투쟁한다. 그러나 진실을 택한 대가는 너무나 고통스럽다.
“우리의 삶이 어쩌면 가상현실일 수 있다” 는 매트릭스적 발상은 사실 수 천년 전부터 위대한 사상가들이 의문을 제기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일찍이 우리를 둘러싼 현실 세계가 가상일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의 저서 <국가>에는 ‘동굴 속의 우화’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동굴 속에 갇힌 죄수들은 온몸이 포박당한 채 동굴 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뒤에는 거대한 횃불이 있다. 동굴의 벽에는 실재와 횃불에서 파생된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죄수들은 그것을 현실로 여긴다. 누군가 동굴 속 죄수들에게 벽면에 비친 그림자가 가상이라고 말해 줘 봐야 그들은 듣지 않는다. 진실을 알려준 현자는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고 죄수들의 조롱거리가 된다.
현실 (Reality) 이란 무엇인가. 플라톤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와 씨름하며 머리를 싸맸다. 진리를 체득한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가짜’ 보다는 ‘진짜’가 될 것을,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를 생생하게 체험하기를 바라며 저마다 나름의 방법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한 무지’의 상태로 동굴 벽면에 비친 환영을 현실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에 개의치 않아했다. 현실과 가상의 차이를 인식하고 매트릭스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데, 이는 소수의 지각 있는 사람들만 행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21세기 접어들어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는 것이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빠르게 잠식함에 따라 가상은 더 이상 가상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오히려 가상은 오늘날 현실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상이 현실에 앞선 주객전도의 사례는 무수히 많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에 전시되는 가상의 자아가 때로는 실제 내면의 자아보다 중요시된다. 미국 대통령의 트위터는 현실 정치와 세계정세에 영향을 미친다. 우버를 통해 경제 활동을 하는 택시 기사의 온라인 평점은 그의 수입을 좌지우지한다. 중국의 사회 신용 평가 시스템에서 낮은 등급을 받은 자는 현실에서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일상에서 일어난 일을 사진 찍고 인스타그램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기 위해 삶을 기획하고 콘텐츠를 생산한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가상의 중요도가 현실보다 점점 높아지는 현상을 가리켜 주영민 작가는 <가상은 현실이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가상이 실재를 초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생 인류는 가상이 실재를 압도하는 ‘가상화 혁명’을 목격하는 첫 번째 세대다. 가상화 혁명은 가상기술을 통해 가상이 실재를 초월하고 궁극적으로 실재를 변형시키는 현상이다. 가상기술이란 가상현실 기술이 아니다. 가상기술은 실재를 변형시키고 증강시키는 모든 종류의 초실재 기술을 뜻한다. 오늘날 가장 근본적인 기술인 소셜미디어, 인공지능, 암호화폐는 모두 가상기술이다. 소셜미디어는 ‘현실’을, 인공지능은 ‘지능’을, 암호화폐는 ‘돈’을 가상화한다. 가상기술로 인해 탄생한 가상의 현실, 가상의 지능, 가상의 돈은 실재 위에 덧입혀져 실재를 가상의 질서로 재구축한다”
가상이 현실보다 중요해지는 세태는 가상현실 기술 (가상현실, 증강 현실, 혼합 현실 등 가상현실 관련 기술 용어가 다양하고 의미하는 바도 조금씩 다른데, 여기서는 편의상 가상현실로 통일하기로 한다) 발전과 맞물려 점점 심화되고 있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 가상현실 기술 적용은 가속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보편화되고 이동과 만남이 제한된 사람들이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가상현실 기술의 도움을 필요로 함에 따라, 기업들이 발 빠르게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행지에 가보지 않고도 마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가상 여행 서비스는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팬과 스타가 가상현실에서 교감하는 가상 콘서트도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새로운 먹거리로 부상하고 있다. 심지어 온라인 게임에 지인들을 초대해 가상 결혼식을 올리는 사례도 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여행, 게임, 엔터테인먼트, 의료, 교육 등 가상현실 기술이 적용될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닌텐도의 가상현실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 (“모동숲”)에 대한 인기는 가상현실 대중화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는 점을 시사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출시된 모동숲은 전 세계 사용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모동숲 사용자는 물고기를 채집해서 시장에 팔고, 대출받은 돈으로 집을 짓고, 자연을 즐기며 한적하게 산책하거나, 근처 지인들과 파티를 열 수 있다. 사용자에게 부여된 높은 자율성과 자연을 콘셉트로 한 힐링,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시행이 모동숲이 인기를 얻은 이유이다. 모동숲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기업들은 모동숲을 마케팅 창구로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발렌티노, 마크 제이콥스 같은 패션 기업들은 신상품을 선보이는 패션쇼를 모동숲에서 진행한 바 있다.
모동숲의 사례는 인류가 얼마나 가상현실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가상현실 기술이 실생활에 완벽히 스며드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미래의 인류는 가상현실에 푹 빠져 살게 될 것이다. 가상현실에서 노동을 하고, 집 앞 텃밭을 가꾸고, 디지털 화폐로 거래를 하고, 투표를 하고, 사교 활동을 하고, 연인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될 것이다. 따분하고 고된 현실보다는 흥미진진한 가상현실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그들은 현실보다 가상현실에서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다가 종국에는 현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가상현실에서 사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마치 매트릭스 속 대중처럼 말이다.
문제는 가상현실을 창조한 신이 디지털 빅브라더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매트릭스 속 세계를 조작하고 시민들을 감시하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듯이, 디지털 빅브라더도 마찬가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발휘할 수 있다. 디지털 빅브라더는 가상현실 속 법, 정치, 사회, 경제, 심지어 자연현상에 까지도 개입하며 사용자를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다. 또한, 디지털 빅브라더의 고객과 정부의 입맛에 맞게 가상현실을 조작하고 암시적인 선전 장치를 통해 사용자들을 조종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상현실 이전의 감시 자본주의가 대상의 마음과 신체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에 국한되었다면, 가상현실이 접목된 감시 자본주의는 개별 대상뿐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늘날 디지털 빅브라더는 다양한 부류의 '스마트 기기'를 보급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감시하려 한다. 미래의 디지털 빅브라더는 별도의 감시 도구를 설치할 필요 없이 가상현실 그 자체를 창조해 보다 광범위한 감시와 통제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빅브라더의 반옵티콘 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우리가 앞으로 가상현실 매트릭스로의 초대를 거절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사회 전반의 구조가 실재가 아닌 가상으로 재편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가상현실에 골몰함에 따라, 가상화 혁명에 동참하는 것 외에는 사실상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가 없을 테니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가상현실 매트릭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본인이나 글을 읽고 있는 그대들 역시 가상현실 속 아바타일 수 있다는 뜻이다. 현실은 미래의 가상현실로부터 파생된 환상일 수 있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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