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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Nov 28. 2020

디지털 독재와 민주주의의 위기

포스트 코로나, 초 감시 사회의 도래 #5

20세기 정치인들은 담대한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시민들이 역사적 혁명에 동참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 주었다. 거리에 붙어 있는 포스터와 방송 매체는 시민들을 미래의 주인공으로 묘사하며 그들이 중요한 존재라는 점을 각인시켜줬다. 비록 그 결과가 전쟁, 숙청, 분열, 대학살 등 참담한 비극으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지만, 그 당시 정치인들이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추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반면, 오늘날 21세기 정치인들에 한테서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트럼프가 내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슬로건, 대영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브렉시트, 소련에 대한 푸틴의 향수, 시진핑의 중국몽 등등. 표현만 다를 뿐 본질은 대동소이하다. 각 국 정치인들은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좋았던 옛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이는 사실 유권자들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시대적 변화로부터 소외당한 사람들은 자신이 점점 미래와는 무관하다고 느끼며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정치인을 지지한다. 세계가 질주하며 미래를 향해 도약하고 있는데 정치인들과 평범한 사람들은 멍하니 지나친 과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인류가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공동의 적과 싸워야 할 이때, 각 국 정치인들이 야만적인 민족주의를 자극하며 분열을 부추기고 본인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연대와 협력보다는 혐오와 국수주의를 택하고,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을 위한 전문가들의 조언을 경시하며 정치적 이권에만 골몰하고 있다. 한국도 딱히 사정이 다르지 않다. 여의도에서는 수준 낮은 엔터테인먼트 쇼가 매주 방송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는 정치는 21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관측되는 보편적인 현상인 듯하다. 이처럼 무능한 정치인들이 국민 투표를 통해 선출된 사람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왜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봤는지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인터넷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훼손하는지에 대해 적었다. 그나마 고무적인 것은 문제 인식과 더불어 문제 해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됨에 따라 문제가 서서히 개선될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다. 가령, 페이스북-캠브리지 애널리티카 사건을 의식해서인지, 이번 2020년 미국 대선에서 인터넷 미디어 업체들은 가짜 뉴스의 확산과 프로파간다 봇이 활동하는 것을 억제하며 투명한 선거 환경 조성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심지어 트위터는 현직 미국 대통령인 트럼프가 올린 “우편 투표는 사실상 사기나 다름없다”는 트윗에 경고 딱지를 붙이며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는 문구와 함께 트럼프의 주장에 반박하는 기사를 배치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모든 국가가 인터넷의 역기능을 견제하며 투명한 선거와 공정한 민주주의 시스템을 갖출 만한 환경인 것은 아니다. 권위주의 적인 독재자가 지배하는 국가는 디지털 독재를 실시한다. 디지털 독재의 정의는 인터넷을 활용한 전면적인 감시와 통제, 그리고 시민들의 사상개조에 따른 권력 집중화 현상을 뜻한다. 불이 사람을 죽이거나 살리는 데 사용될 수 있듯이, 인터넷도 민주주의를 이롭게 하거나 위태롭게 하는데 활용될 수 있다. 디지털 독재는 전적으로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디지털 독재 국가의 지도자는 정교한 알고리즘 모형을 설계하고 국가가 원하는 ‘모범 시민’의 모습을 시민들에게 강요한다. 이를테면, 국가에 맹목적으로 충성하고, 이데올로기를 찬양하거나, 적으로 규정되는 세력을 증오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모범시민으로 선정된 자에게는 각종 혜택이 부여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가혹한 처벌이 기다린다. 중국을 비롯해 북한, 러시아 등 권위주의 적인 독재자가 군림하는 국가가 현재 이러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한편, <1984>의 주인공 윈스턴은 빅브라더와 당에 반감을 품고 다음과 같은 글을 몰래 적는다.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 말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자유이다. 만약 자유가 허용된다면 그 밖의 모든 것도 이에 따르게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올곧은 신념을 지키려고 했던 윈스턴은 심한 고문을 받고 결국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는 당 지도부의 말을 진심으로 믿는다. 윈스턴은 자기 자신까지 완벽히 속여 버리고 당에 충성하는 데 성공한다.


둘 더하기 둘이 다섯이라는 명제는 거짓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디지털 독재 국가의 지도자가 시민들로 하여금 이 헛소리를 진심으로 믿게끔 만드는 것은 앞으로 식은 죽 먹기가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시민들이 거짓을 참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출이 막히고, 의료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모기지 금리가 높아지고, 직장에서 고과 감점을 당하고, 가족과 친구들이 온갖 불이익을 받을 테니 말이다. 이때, 둘 더하기 둘이 다섯이라고 믿는 시늉을 하는 것만으로는 곤란하다. 생체 데이터를 측정할 수 있는 스마트 기기와 안면 인식 장치가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까지 포착해 낼 테니까. 둘 더하기 둘이 넷이 아니라 다섯이라는 전면적인 정신 개조가 되지 않는 이상, 보통의 시민이 디지털 독재 국가에서 살아가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워질 것이다.


처칠은 민주주의가 ‘가장 덜 나쁜 제도’라고 표현했다. 실로 그렇다. 지난 수 천년 간 민주주의에 환멸감을 품은 사람들이 다양한 정치 체제를 시도했지만, 그 결과는 대개 비극으로 남았다.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위협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불가피하게 정부의 기능 확대를 초래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것은 사실이지만, 분별력 있는 민주 국가 시민들과 정치인들은 민주주의를 포기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우려하는 점은, 디지털 독재를 실시하는 국가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이 주춤하고 있는 현상을 누군가 오용하여 감시 기술을 남용하고 대중을 선도해 민주주의를 퇴보시키는 비극을 낳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마치 온실 속의 화초와 같다. 지속적인 관심과 세심한 배려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파시즘, 군국주의 따위와 같은 잡초에 생명력을 잃는다는 것이 역사가 증명하는 교훈이다. 개별 국가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완전히 박멸할 수 없듯이, 기업과 개인이 민주주의를 좀먹고 디지털 독재를 초래할 수 있는 바이러스를 (이를 테면, 가짜 뉴스, 무차별적인 혐오, 프로파간다 봇, 편향된 알고리즘, 환원 주의적 음모론, 진지한 담론 형성을 방해하는 자극적인 버라이어티성 트윗 등등) 퇴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따라서 앞으로도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위기에 처할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권력을 견제하지 않으면, 어느새 민주주의가 사멸하고 디지털 독재가 일상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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