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하루
오늘 연대에 다녀왔다. 모교는 아니지만 꽤 인연이 있는 학교이다. 캠퍼스에 가 본 지는 10년이 넘은 것 같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신촌 거리를 배회했다. 오전이라 그런지 번화가에 인적이 드물다. 참 많은 것이 변했고, 많은 것이 그대로이다.
연대 정문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친구는 최근에 연대 교수로 부임했다. 공부한다고 그렇게 고생하더니,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 같아 보기 좋다. 정문 쪽에 사람이 많아서 만나는데 애를 먹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저 멀리에서 친구가 바로 보인다. 풋풋한 학생들 사이에서 칙칙한 느낌을 내는 아저씨. 어린 학생도 아니고 나이 지긋한 직원도 아닌, 우리는 캠퍼스의 이방인이다.
원래는 신촌 번화가에 위치한 일식당에서 보기로 했는데 학생 식당을 가보자고 고집을 피웠다. 오랜만에 캠퍼스에 오니까 학생 코스프레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학생식당에 가보니 밥 값이 5천5백 원이다. 메뉴는 뷔페식. 제육볶음, 떡볶이, 어묵, 그리고 계란 프라이까지. 나 때는 (라떼는) 학생식당이 3천 원 정도이고 학교 근처 밥 집이 5천 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친구한테 신촌 물가를 물으니 백반 한 끼에 8-9천 원이라고 한다. 학교 근처 상권도 인플레이션을 피해 갈 수 없구나. 과외비나 평균 용돈이 두 배로 오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요새 학생들 참 먹고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와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교정을 걸었다. 무려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그란데 사이즈를 들고! (커피쯤은 가격표 안 보고 사는 것이 어른이 되어 누리는 특권 중 하나가 아닐까) 학교 점퍼를 입고 재잘재잘 거리는 학생들이 보인다. 뭐가 저렇게 좋을까? 귀여운 병아리 같다. 반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지나가는 학생도 보인다. 연애 고민? 군대 고민? 학업 고민? 가족 고민? 뭐가 됐든 고민이 많을 때지. 얘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단다! 아마 나중에는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친구는 강의가 있어서 먼저 들어갔다. 나는 교내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밀린 원고를 썼다. 오늘따라 유독 글이 안 써진다. 1시간 조금 넘게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아까처럼 캠퍼스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근로자의 날이구나. 지금 여겨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분주히 무언가를 해야 하지만 나는 오늘 휴일이다. 오후에 있었던 강의가 갑자기 휴강이 된 느낌이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 기분 좋다) 그 어떠한 의무감도 없는 자유의 상태. 기쁜 마음으로 캠퍼스를 나와 걸었다.
신촌역을 지나 경의선 숲길을 걸어 집에 오면서 나의 대학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생산적인 일은 놀라우리만치 기억이 안 나고, 주로 재밌게 논 일 위주로 기억에 남는다. 시험 기간에 도서관 밖에서 야식 먹으면서 잡담하기, 여름밤 한강 둔치에서 밤새 술 먹기, 미팅, 주점, 축제, 여행 등등. 아주 사소한 매개체도 생각난다. 이를 테면, 통학할 때 탔던 지하철 3호선 6호선,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던 중앙 광장 잔디밭, 교수들이 자주 가던 김치찌개 집 등등. 그리고 사람들. 그때는 친했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긴 사람들도 더러 있다. 다들 잘 살고 있겠지?
청춘은 청춘에게 주긴 너무 아깝다. 버나드 쇼가 한 말인데 실로 공감이 간다. 오늘 내가 신촌에서 마주친 이름 모를 청춘들은 결코 모를 것이다. 그들의 현재가 얼마나 찬란한 시기인지. 가진 것이 없어도 반짝반짝 빛나는 시기. 많은 것이 서툴고 마음대로 잘 안 되지만,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이 충분히 용인되는 시기. 미래가 불안하지만 그만큼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시기. 뜨겁게 울고 웃을 수 있는 시기. 그리움 보다 설렘이 많은 시기. 오- 청춘 예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