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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Sep 10. 2017

살롱이 필요해

살롱의 부활을 바라며

한국사람에게 "살롱"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미용실, 갤러리, 유흥업소 정도다. 특히나 룸살롱 때문에 한국인에게 다소 우호적이지 않은 이미지와는 달리, 살롱은 18-19세기 프랑스에서 철학, 예술, 토론을 꽃피우게 한 사교모임이었다. 살롱의 특이한 점은 행사의 주최자가 대부분 기득권 남성이 아닌, '마담'이라 불리는 여성들이었으며 이들은 기꺼이 자신의 집을 손님들에게 개방해 안방마님 역할을 자처했다. 살롱은 교양 있고 지식 있는 사람들의 쉼터로써, 수많은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살롱에서 교류했다. 살롱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테네의 시민들이 열띤 토론을 벌였던 아고라다. 하지만 여자나 노예에게는 시민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던 아테네와는 달리, 살롱은 성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누구나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던 좀 더 열린 표현의 장이었다.

문화와 사교의 장 살롱

하지만 이런 살롱은 현재 멸종의 위험에 처해있다. 살롱의 뒤를 이은 카페는 우후죽순 생겼지만, 정작 살롱의 정신을 계승한 영세한 규모의 카페는 점차 대형 프랜차이즈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우리에겐 살롱 같은 쉼터가 필요하다. 때때로 사회생활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누구나 편하게 가식 없는 상태로 있을 수 있는 곳.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곳. 자신과 비슷한 철학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기쁜 마음으로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는 곳. 담론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곳. 나는 진심으로 늘 이런 살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나 편하게,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또 배움을 얻는 살롱 같은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찾아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가령 비슷한 관심사 혹은 일정한 필터링을 거쳐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 (재벌들만 사교모임 있는 줄 알았는데, 일반인 모임 중에서도 가입 자격 요건이 나름대로 까다로운 모임들이 꽤나 있는 것에 놀랐다) 이런 류는 너무 피상적인 느낌이라 꺼려졌는데, 특히나 첫 만남에 어딜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이런 부수적인 것들 (적어도 내 기준엔)을 묻는 것이 거북했다. 처음 본 타인에게 자기소개할 때 이름을 말해봤자 보통은 잊힐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어차피 타인은 그 사람의 외모, 직업, 사는 곳 등의 조건으로 그를 기억할 테니. 


하지만 이런 가벼운 대화와 모임을 무작정 비난할 순 없는 것이, 친하지 않은 타인에게 낯을 가리고, 유교문화에 익숙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만났을 때 저 두 가지를 제하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처음 보는 자리에서 자신이 감명 깊게 본 영화나 소설 속 장면,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일상의 소소함, 영혼의 빛남을 느꼈던 순간들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면 별종 취급을 받을 것이다. 어린 왕자도 말했지. 어른들에게 새 친구를 사귀었다고 하면 그들이 새 친구에 대해서 관심있는 것은 본질보다는 숫자라고.  


과거에 내가 피상적인 사교모임의 대안으로 선택했던 것이 독서 모임이었는데,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좀 더 특화된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었다. 다행히 이런 부분은 만족스러웠지만, 매주 어떤 책을 읽고 돌아가며 발제를 해가는 의무가 생기면서 숙제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나 내겐 전혀 흥미롭지 않은 책이 선정될 때마다 주말에 부가적으로 하는 잔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었는지, 시간이 지나자 다른 멤버들의 참석률이 눈에 띄게 떨어졌고, 결국 몇 달 못 가서 모임은 해산했다. 그때 느낀 것이 놀이가 일이라고 느껴지는 순간,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 때, 아예 이럴 거면 내가 살롱 같은 공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술을 즐기니 카페보다는 술을 파는 바가 적합할 듯한데, 살롱처럼 문화와 토론, 만남이 꽃피는 공간. 다만 클럽이나 라운지 바처럼, 시끄럽고 남녀 헌팅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 아닌 절제된 멋이 있는 공간. 바를 운영하는 지인에게 조언도 구하고, 어떤 콘셉트로 운영할 지에 대해서 고민도 했다. 특히나 책을 콘셉트로 한 바에 관심이 생기면서 (요새 책 보면서 술 먹는 공간이 왕왕 생기고 있다), 지인을 통해 책 콘셉 바를 운영하는 사장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대화 끝에 나의 계획을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자본금은 둘째치고 생각보다 바 운영에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든다는 것인데 회사 다니면서 부업으로 할 수 없다는 것. 이 문제는 내가 강한 확신이 있었다면 퇴사를 고려했을 수 있지만, 다음 나를 붙잡은 문제는 공간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 사장님은 자신의 공간에 대한 애착이 큰 분이었는데, 자신이 주 6일 바쁘게 일하면서도 그 자체에 재미를 느끼는 편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단지 이용자로서 그런 공간을 갈구하는 것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엔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사장님에게는 바 운영을 통해 공간을 키워나가는 것이 목적이었던 반면, 내게는 단지 수단일 뿐이라는 점이다. 나는 칵테일을 제조하고 손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즐길 자신이 있지만, 바 운영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서 (수단) 내가 틈틈이 읽고 쓰는 것 (목적)에 제약을 줄 정도로 바쁘게 살고 싶지는 않다. 어떤 일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돼버리면 재미도 없고 무엇보다도 잘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살롱의 부활을 원한다. 참을 수 없는 관계의 허무 속에서 영혼의 안식을 얻고, 예술을 만끽하는 곳. 누구나 가식 없이 자신을 표현하고, 속물적인 주제보다는 울림을 주는 진솔한 대화가 가능한 담백한 곳. 무언가를 배우거나 영감을 얻어갈 수 있는 곳. 앞으로 이런 공간이 많이 생기길 바라고, 나도 언젠가 살롱 같은 공간을 만드리라 다짐해본다. <라라랜드>서 한물 간 재즈를 고집하던 라이언 고슬링이 결국은 재즈바를 차리고 사람들에게 재즈를 들려주는 장면처럼, 나의 살롱에 사람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는 구석에서 팔짱 끼고 흐뭇하게 지켜보는. 언젠간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며.

영화 <라라랜드> 속 재즈바에서 연주하는 라이언 고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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