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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Sep 03. 2017

관음의 욕구에 대해

왜 인간은 훔쳐보고 싶은 욕구가 있는 걸까

<트루먼 쇼>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인 관음증을 다룬 영화다. 짐 캐리가 열연한 주인공 트루먼은 방송사 쇼의 주인공으로서, 거대한 스튜디오 안에서 일생을 살고 그의 삶은 여과 없이 시청자들에게 방영된다. 대중들은 트루먼이 아기 때부터 성인으로 자라는 것을 지켜보며 재미를 느끼고, 그는 일약 스타가 되지만 정작 주인공인 트루먼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트루먼 쇼 엔딩

대중들의 관음증을 자극하는 엔터테인먼트는 이미 "리얼리티 쇼"라는 형식으로 미디어에 확산됐고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캐는 수많은 파파라치를 양산했다. 오늘날 대중들은 이미 연예인들의 사생활 노출이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몰카 형식의 미디어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관음의 재미를 느낀다. 또한 연인의 핸드폰을 때때로 훔쳐본다거나 헤어진 연인의 SNS를 기웃거리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점, 몰카가 포르노에서 꾸준히 잘 팔리는 장르라는 것은, 그만큼 크고 작은 수준의 관음이 일상이 됐다는 뜻이다.    


훔쳐보기를 좋아하는 관음증 환자를 뜻하는 "Peeping Tom"은 11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유래한다. 당시 영국의 코벤트리 지역에 있던 영주가 과도한 세금을 부과해 주민들이 곤궁해지자, 고다이바 부인은 영주에게 세금을 낮춰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영주는 기분이 상해 세금을 인하하는 조건으로, 부인이 나체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 것을 제안한다. 결국 마음씨 착한 부인은 이 제안에 승낙하는데, 이에 감동한 주민들은 부인이 나체로 마을을 배회할 동안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쳐 그녀를 보지 않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Tom만은 슬쩍 창문을 열어 부인의 알몸을 훔쳐보게 되고, 이에 하늘이 노해 Tom은 그 자리에서 눈이 멀었다는 이야기다. 

나체로 말에 탄 고다이바 여인

왜 현대인은 점차 개별화되어 자신의 주위에 높은 담을 쌓고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담장 너머 타인의 삶을 엿보고 싶은 충동이 있는 걸까. 관음의 욕구는 인간의 본능인가? 원시시대 때부터 인간은 사냥을 위해 자신의 위치를 숨기고 멋익감을 관음 했어야 하기에, 관음은 대단히 원초적인 욕구라는 설은 꽤나 그럴듯하다. 당시의 원시인에게 자신의 위치를 들킨다는 것은 맹수의 위협을 받거나 사냥감을 놓치는 것으로 이어지기게, 관음은 생존을 위한 필수 스킬이었을 것이다.


건축의 관점에서 바라본 관음에 대한 욕구도 흥미롭다. 왜 펜트하우스의 가격은 저층보다 높은 것일까? 이는 훌륭한 조망권 때문이기도 하지만, 펜트하우스의 주거자가 고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반면 저층의 주거자는 고층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시선의 비대칭 속,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관음 할 수 있다는 것은 곧 권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대형 클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클럽의 2층, 3층 고층으로 갈수록 클럽에서 요구하는 테이블의 가격도 높아진다. 비싼 돈을 지불해 입장한 클럽의 3층에서 저층의 수많은 사람들을 관음 하는 사람은, 클럽이라는 공간 속에서 일종의 권력을 느낀다. 마치 교도소에서 파놉티콘 (Panopticon) 속 죄수들을 감시하는 교도관이 권력을 느끼는 것처럼.            

 

죄수들을 감시하는 파놉티콘

인터넷의 발달은 이러한 관음의 확산에 기폭제가 됐다.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을 통해, 익명의 가면을 쓴 수많은 네티즌들은 관음을 즐긴다. 특히나 SNS의 발달 덕분에 본인과 면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등을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는, 바야흐로 관음의 시대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공인이 아닐지라도, SNS 사용자는 이미 전체 공개 설정을 한 순간, 타인에게 관음을 허용하는 암묵적 동의를 한 셈이다. 하지만 관음의 주체의 시선이 느껴지는 순간, 관음의 객체는 이것을 의식하기에 자연스러움을 잃게 된다. SNS에 유독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콘텐츠가 (자랑, 허세, 광고 등) 많은 이유다. 


내가 브런치를 시작한 건 작년 하반기, 한 친구의 권유에서였다. 글 쓰고 싶다는 생각을 이야기하던 중, 친구가 글쓰기에 특화된 플랫폼이 있다는 것을 알려줬고 생각보다 양질의 콘텐츠를 올리시는 분들이 많기에 자주 이용했다. 내 생각을 표현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으로, 회사 및 지인들에게 굳이 적극적으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닉네임을 사용했는데 뭘로 할지 고민하다 별생각 없이 홍콩아재로 정했다. (당시에 막 홍콩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였고, 아재화 돼가는 본인 및 또래 친구들을 보며 별생각 없이 홍콩할매에서 영감을 받아 지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구독자가 조금씩 늘게 됐고, 특히나 책 내면서 브런치 트래픽을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필명을 책 프로필에 밝혔더니 종종 지인들이 구독자가 되는 경우가 보였다. 그나마 실명으로 브런치 가입한 분들은 누군지 짐작이 가지만, 실명과 다른 닉네임으로 지인들이 구독자가 되는 경우가 분명 종종 있었다. 말했듯이, 관음의 객체가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자연스러움을 잃게 된다. 


애초에 브런치를 개설한 주목적이, 내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었기에 내가 관음을 의식하는 것은 글의 맛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생각보다 사람들은 너한테 관심이 없단다"라는 가치관으로 남 시선 크게 신경 안 쓰는 편인데도, 나도 사람이다 보니 시선을 의식하는 것에서 완전히 자유롭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필명도 실명으로 바꾸고, 프로필도 떡하니 사진으로 바꿨다.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내면 오히려 관음의 시선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본연의 취지를 잃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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