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유쾌하진 않은 성장 영화 <레이디 버드>
영어에 'The squeaky wheel gets the grease시끄러운 바퀴가 기름칠을 받는다'라는 속담이 있다는 걸 맨 처음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때 받은 충격이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건 한국어의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이었다. 똑같이 불평불만을 해도 한쪽에 가면 원하던 기름을 얻고, 한쪽에 가면 얻어맞는단 말인가? 아니, 얻어만 맞으면 다행이다. 정에 맞으면 그 모서리가 깎여 떨어져 나갈 건 뻔한 일이다. 똑같은 상황을 두고 어쩌면 이렇게 다른 해석이 나오는지 그리고 그 해석의 바탕이 되는 관점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나는 조금 무서워졌다.
어릴 때부터 항상, 남들과 같아서 문제가 되는 일보다 남들과 달라서 문제가 일어나는 일이 많았던 나는 언제나 '모난 돌'과 'squeaky wheels'를 변호하게 된다. 나는 지금 무언가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나는 남들이 이때까지 항상 해오던 대로 따라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 내가 그만큼 좀 더 나은 모습을 향해 나아가고자 열망하고 있다는 증거다. 현상황에 안주하고자 한다면 이러쿵저러쿵 불평할 이유도 없다. 이들이 받아 마땅한 건 정이 아니라 기름칠이다. 세상이 더 괜찮은 곳으로 바뀌는 것도 언제나 당연한 일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던가.
자칭 '레이디버드'인 주인공은 이런 '모난 돌' 내지는 'a squeaky wheel'로서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남들이 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쓸 때, 레이디버드는 스스로에게 '레이디버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름만 남다른 것은 아니다. 그의 고향 새크라멘토에서 뿌리 박고 사는 데에 별 불만이 없는 주변 친구들과 달리 그녀는 더 넓은 뉴욕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 이런 마음은 가장 친한 친구 줄리도 공감해주지 못한다. 모두가 둥글둥글 마치 순리대로 고향에서 자신의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을 때 그곳을 벗어나고자 삐죽 솟아난 돌멩이는 레이디버드 하나뿐인 것만 같다. 집안사람들마저 레이디버드의 진학 계획에 썩 탐탁지 않아하는 표정이다. 뉴욕에서 대학을 다니는 건 돈이 훨씬 많이 든다. 누군가는 빚을 져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레이디버드는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신이 바라는 바를 좇는다. 레이디버드는 계속해서 자기는 뉴욕에 가고 싶다고,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삐걱거린다".
이 과정에서 레이디버드와 가장 많이 충돌하는 것은 바로 엄마다. 엄마는 기름칠을 해줄 생각이 없다. 딸이 조금만 더 둥글 둥글 해지길, 조금만 더 조용히 있어주길 바란다. 차라리 그냥 놔두면 좋을 것을. 엄마는 정을 든다. 뉴욕에 가고 싶다고 말하면 가뜩이나 가계가 어려워졌는데 뉴욕 학비까지 대줄 수는 없다고, 주립대에 가서 오빠가 일하던 마트 일자리나 이어받으라고 말한다. 자신을 키우는데 든 돈을 나중에 다 갚을 테니까 금액을 알려달라고 홧김에 소리치는 레이디버드에게 엄마는 넌 그만큼 많은 돈을 벌 능력도 없다고 쏘아붙인다. 꼭 이렇게 '후려쳐야'만 하는 것일까?
레이디버드가 졸업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를 고르는 장면에서 두 모녀가 나누는 대화가 있다. 드레스를 입고 나온 레이디버드의 모습을 보고 엄마는 색깔이 너무 분홍이지 않냐며 한마디 한다. 레이디버드는 이를 듣고 그냥 예쁘다고 말해주면 안 되냐고 묻는다. 그러자 엄마는 자신은 '언제나 네가 최고의 모습이길 바라기I'm just trying to encourage you to be the best version of yourself' 때문에 그러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레이디버드는 '이게 내 최선이면 어떻게 하느냐what if this might be my best'고 되묻는다. 나는 이 대화에서의 엄마의 대사가 영 마음에 걸렸다. 진짜 자기가 최고의 모습이길 바라며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건 오히려 레이디버드 본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원하는 동아리에 들어가기 위해 오디션을 보는 것부터 좋아하는 남자아이와 사귀기 위한 적극적인 제스처까지. 대학이라는 커다란 목표뿐만 아니라 소소한 일상에서도 레이디버드는 언제나 자신의 꿈(!)을 좇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입시에 유리한 점수를 받지 못해 선생님의 채점지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거나 거짓말을 해서 새로운 친구의 관심을 끄는 등 가끔 도덕적이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잘못이 탄로 났을 때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과한다. 그 정도의 말썽은 사춘기 아이의 성장과정 속 우여곡절로 봐줄 수 있다. 어쨌거나 레이디버드는 자기가 바라는 자신의 모습에 다가가기 위해 열심이다. 그 파란만장한 과정 속에서 레이디버드는 자신의 마음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이 바라던 결과도 얻어냈다. 나와 더 잘 통하는 친구가 누군지 알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잘 통하는 친구라도 나와는 지향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였으며, 가고 싶던 학교에 가기 위해 노력함과 더불어 그걸 실현시킬 수 있도록 열심히 주변에 도움을 청했고, 결국 가고 싶던 학교에 합격했다. 레이디버드는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가능한 최고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도록 스스로가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은 한순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정이 필요하다. 레이디버드가 언제나 최고의 모습으로 있기를 바란다면 그 과정을 도와주는 게 맞는 일 아닐까? 엄마가 레이디버드를 대하는 방법—필요 이상의 비난과 자존감 깎아내리기—은 오히려 레이디버드가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빼앗고 더 나아질 것 없는 상황에 머물러 있도록 부추기며, 심지어 레이디버드가 원하는 결과를 얻었을 때에도 자신을 믿지 못하고 방황하도록 만든다.
레이디버드가 엄마 몰래 지원한 뉴욕의 대학에 대기자 명단에 올라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엄마는, 마침내 레이디버드가 뉴욕으로 떠날 때까지, 레이디버드와 여름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레이디버드가 아무리 자신의 속사정과 속마음을 설명해도 엄마는 묵묵부답이다. 겪어보면 누구나 알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얼마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인지. 엄마의 이런 행동으로 인해 크나큰 죄책감과 상실감을 느꼈을 레이디버드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뉴욕으로 가서도 자신의 고향 새크라멘토에서의 기억을 좀처럼 놓을 수가 없다. 그녀는 계속 방황한다.
이게 과연 단순히 '알고 보니 뉴욕은 내가 원하던 곳이 아니었다'로 무마시킬 수 있는 상황일까? 만약 엄마가 레이디버드의 여정을 응원해줬더라면, 레이디버드의 모난 점을 깎아내려하지 않고 오히려 쉴 새 없이 삐걱거리는 레이디버드에게 조금이라도 기름칠을 해줬더라면 레이디버드가 위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지, 나는 의문이다. 정에 맞아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으니, 자신이 바라던 자리에 간다 해도 그저 헛돌게 될 뿐이다.
이전 <우리의 20세기>에서 배우로 한 번 접한 적 있는 그레타 거윅을 이번 영화에서는 감독으로 접했다. <우리의 20세기>에서 그가 맡았던 배역 '애비'의 뒷이야기를 <레이디버드>가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이번 영화가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낸 건가 싶었는데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영감을 받기는 했지만 실제로 감독의 경험과 영화의 내용 사이에 일치하는 부분은 크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꼈다. 이 이야기가 실화였다면, 감독이 이 이야기를 단순히 '엄마와 딸 사이의 애증 관계' 혹은 '지나고 나면 모두 추억' 따위로 미화하지 않기를 바랐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레이디버드>의 홍보 문구 속 재기 넘치는 분위기가 왠지 어색하다고 느낀다. 내게 있어 이 영화는 겉모습만 유쾌한 성장 영화지,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우울한 드라마다. 조금 특이하지만 찬란한 가능성을 가진 아이가 그 아이의 숨을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주변으로 인해 충분히 성장할 수 없었던, 그래서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영 씁쓸한 뒷맛을 감출 수 없었던 '모난 돌이 정 맞는 이야기'가 바로 내가 본 <레이디버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