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첫 번째 기적
1968년의 제주는, 마치 아주 길고 복잡한 교향곡의 한 악장이 끝나고, 다음 악장이 시작되기 전의 그 짧고 밀도 높은 정적과도 같았다. 아일랜드에서 온 수녀들이 가져온 아란(Aran) 문양이라는 새로운 선율은, 테쉬폰의 둥근 지붕 아래에서 조용하지만 완벽하게 조율되고 있었다. 소녀들의 손은 더 이상 밭일로 굳어진 투박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들의 손은 이제, 이야기를 잣고 기도를 엮어내는 섬세한 악기가 되어 있었다.
테쉬폰 안의 공기는 변해 있었다. 이전까지 공간을 채우고 있던 것은 실패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서로를 향한 이름 없는 원망, 그리고 희미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를, 숙련된 장인들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긴장감과 고요한 자부심이 채우기 시작했다. ‘덜컹, 쿵’ 하고 울리던 베틀 소리의 리듬은 이전의 서툴고 망설이는 듯한 왈츠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잘 훈련된 군대의 행진처럼, 절도 있고 규칙적인 리듬으로 공간을 채웠다. 그 소리는 이제 노동의 소음이 아니라, 창조의 음악이었다.
그 음악의 지휘자는 양순임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도시의 그늘에 떨던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 좋은 직물을 가려내는 마이스터의 그것처럼, 차갑고 예리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수녀들이 가르쳐준 아란 무늬의 모든 것을,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흡수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어부의 밧줄과 풍요의 밭, 그리고 가족의 안녕을 비는 생명의 나무가, 마치 마법처럼 피어났다. 그녀는 다른 소녀들의 작업을 감독하고 품질을 검사했다. 그녀의 기준은 혹독했다. 단 하나의 코라도 어긋나면, 그녀는 가차 없이 풀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짜게 했다. 소녀들은 처음에는 그녀를 원망했지만, 이내 그녀의 눈빛 속에서 자신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완벽함에 대한 집요한 열망을 발견하고는, 말없이 그녀를 따르기 시작했다.
어느 늦가을 오후, 양순임은 갓 완성된 크림색 스웨터 한 벌을 들고 임피제 신부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것은 어떤 무늬도, 장식도 없는, 지극히 단순한 형태의 스웨터였다.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는, 수많은 실패와 반복을 거쳐 마침내 도달한 어떤 경지가 담겨 있었다. 짜임은 기계처럼 균일했지만, 손으로 만졌을 때 느껴지는 감촉은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살아있는 듯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옷이 아니었다. 그것은 양순임의 잃어버린 시간과, 이 섬 여자들의 거친 손과, 그리고 제주의 바람과 햇살이 함께 짜낸 하나의 '이야기'였다.
임피제는 그 스웨터를 받아 들었다. 그는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등잔불 아래에서 스웨터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는 생각했다. 이것은 단순한 ‘제품(Product)’이 아니다. 이것은 시장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가치(Value)’다. 그렇다면, 이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시장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이 스웨터를 들고, 낡은 트럭을 몰고 읍내 장터로 나갈 수도 있었다. 아마 몇 벌쯤은 팔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이 스웨터가 제값을 받기를 원했다. 아니, 세상이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종류의 가격으로 평가받기를 원했다. 그것은 혁신가의 고집이었다. 그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싶었다.
그는 축음기에 톰 존스(Tom Jones)의 <Delilah>를 올렸다. 1968년, 그해 한국의 다방과 클럽을 지배하던, 광기 어린 사랑과 배신, 그리고 비극적 살인을 노래하는 그 격정적인 노래. My, my, my, Delilah! Why, why, why, Delilah! 톰 존스의 포효하는 듯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생각했다. 세상은 저 노래처럼, 격정적이고 위험하며, 때로는 비합리적이라고. 저런 세상에, 이 순진하고 고요한 스웨터를 어떻게 내놓아야 한단 말인가.
그는 결심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그는 서울로 가기 전, 먼저 이 섬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이질적이며, 가장 높은 가치들이 거래되는 장소의 문을 두드려보기로 했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가장 혹독한 방식의 시장 테스트(Market Test)가 될 터였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낡은 가죽 가방에 그 스웨터와 몇 벌의 다른 옷가지를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김만수와 양순임을 불렀다. "이것을 팔아야겠네."
김만수가 물었다. "읍내 장터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육지 상인이라도 부를까요?"
임피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은 창밖, 제주시의 해안선을 향해 있었다. 그곳에는 얼마 전, 섬의 풍경을 영원히 바꿔놓은 거대한 유리 요새, 제주 칼(KAL) 호텔이 서 있었다.
"아니. 저곳으로 갈 걸세."
김만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신부님, 제정신이십니까? 저곳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문전박대만 당할 겁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지." 임피제는 희미하게 웃으며, 스웨터를 낡은 가죽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다음 날, 임피제와 양순임은 칼 호텔의 거대한 회전문 앞에 섰다. 흙먼지 묻은 낡은 지프와 작업복 차림의 신부, 그리고 잔뜩 겁을 먹은 채 몸을 움츠린 섬 처녀. 그들은 호텔의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얼룩과도 같았다. 로비의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호텔 기념품점의 박 매니저는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서울 본사에서 파견된, 유능하지만 냉정한 엘리트였다. 그녀의 눈에 임피제와 양순임은 귀찮은 불청객일 뿐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잘 닦인 유리잔처럼 차가웠다.
임피제는 말없이 가방을 열어 스웨터를 꺼냈다. 박 매니저는 그것을 보자마자 실소를 터뜨렸다. "신부님, 농담이시라면 재미없군요. 이런 촌스러운 시골 물건을 저희 매장에 들일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자개함이나 인삼 같은 최고급 기념품만 취급합니다."
바로 그때였다. 지금껏 공포에 질려 임피제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양순임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손으로 스웨터를 공손히 받쳐 들고, 박 매니저를 똑바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나 반항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손으로 낳은 첫 아이를 세상에 내보이는 어미의, 그런 종류의 절박하고도 숭고한 무언가였다.
박 매니저는 그 강렬한 눈빛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손을 뻗어, 스웨터의 소매 끝을 살짝 만져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녀의 손끝에 전해진 감촉. 그것은 그녀가 평생 만져본 그 어떤 캐시미어나 실크와도 다른 것이었다. 기계의 차갑고 완벽한 부드러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완전하지만, 그 안에 사람의 체온과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한, 살아있는 질감이었다.
"이건..."
임피제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스웨터의 기능이나 가격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다로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아일랜드의 여인들이 밧줄 무늬를 스웨터에 새겨 넣었던 이야기, 그 기도가 수천 킬로미터의 바다를 건너, 또 다른 섬의 소녀들에게 전해진 이야기. 그리고 부산의 공장에서 상처입고 돌아온 한 소녀가, 이 스웨터를 짜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나간 이야기.
박 매니저는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스웨터와 양순임의 거친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는 사업가였다. 그녀는 이 스웨터가 가진 진짜 가치를 깨달았다. 그것은 희소성이었다.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진정성'이라는 가치.
"...다섯 벌만, 맡겨보시지요. 위탁 판매 조건입니다."
그날 오후, 한림수직의 스웨터는 제주 칼 호텔 기념품점의 가장 좋은 자리에 놓였다. 그리고 며칠 뒤, 호텔에 묵고 있던 한 재일교포 사업가의 아내가 그 스웨터를 발견했다. 그녀는 옷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다섯 벌을 모두 사 갔다. 도쿄에 있는 딸들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야기가 있는 스웨터'는 호텔의 상류층 투숙객들 사이에서 조용한 화제가 되었다. 주문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성공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압도적이어서, 박 매니저는 이 기이한 현상을 총지배인에게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임피제는 호텔 총지배인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박 매니저보다 훨씬 더 높은 벽이었다. 그는 임피제에게 물었다. "이 성공이 일시적인 유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만약 우리가 정식으로 계약을 맺는다면, 당신들의 그 작은 조직이 과연 우리 호텔의 기준에 맞는 품질과 수량을 꾸준히 공급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임피제는 대답했다. "우리에겐 공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에겐 컨베이어 벨트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수녀님들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겐 이 모든 것을 책임지는, 저 아이들의 손이 있습니다. 우리는 약속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스웨터는, 세상에 단 하나뿐일 것이라고."
그의 대답은 사업가의 것이 아니었지만, 총지배인은 그의 눈 속에서 그 어떤 사업가에게서도 본 적 없는, 강렬한 확신을 보았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기념품점 한쪽에, 당신들만의 작은 공간을 내드리겠습니다. '한림수직'이라는 이름의, 공식 매장을 여는 겁니다."
그 소식이 테쉬폰에 전해진 날, 양순임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녀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더 만들어 달랍니다. 우리가 만들 수 있는 만큼, 전부 다. 그리고... 우리 가게가 생긴답니다. 저 호텔 안에."
그 말을 끝으로, 테쉬폰 안에서는 거대한 울음과 환호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것은 지난 몇 년간 그녀들이 삼켜왔던 모든 설움과 한숨, 그리고 희미한 희망들이 마침내 하나의 결실을 보는, 첫 번째 기적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