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사라진 스웨터

by 고강아놀자


서울의 밤은, 그가 알던 제주의 밤과는 다른 종류의 어둠을 가지고 있었다. 제주의 어둠이 모든 것을 보듬고 잠재우는 어머니의 품과도 같았다면, 서울의 어둠은 수만 개의 불빛 아래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차갑고 끈질긴 그림자와도 같았다. 임피제는 며칠째, 그 그림자 속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최 사장이 쳐놓은 보이지 않는 그물은 완벽했다. 명동의 화려한 백화점과 양품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소녀들의 희망과 눈물이 담긴 스웨터는, 이 거대하고 냉정한 도시의 논리 앞에서 한낱 촌스러운 시골의 토산품에 불과했다. 그는 링 위에 오르기도 전에 카운터펀치를 맞고 쓰러진 권투선수였다. 더 절망적인 것은, 누가 자신을 때렸는지 알면서도, 그 심판에게 항의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갔다. 여관방의 낡은 달력은 하루하루 찢겨 나갔고, 그의 주머니는 빠르게 비어갔다. 밤마다 그는 제주의 소녀들 꿈을 꾸었다. 스웨터를 정성스럽게 포장하며 반짝이던 그들의 눈빛, 자신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 그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서울의 차가운 새벽 공기는 그의 폐부를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그는 이 실패를, 이 절망을, 어떻게 그 아이들에게 전해야 한단 말인가.

모든 희망이 바닥을 드러내고, 그가 마침내 제주로 돌아가는 텅 빈 배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무렵. 기적은, 언제나 그렇듯, 가장 진부하고 통속적인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종로의 한 허름한 선술집 구석에서,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취하고 싶었지만, 술은 그의 절망을 희석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더 선명하게 만들 뿐이었다. 바로 그때, 한 남자가 그의 맞은편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사장님, 혼자 오셨나 봅니다. 타지 분이신 것 같은데,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남자는 사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닳아빠진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사람 좋은 미소와,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안다는 듯한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 사장이었다. 그는 자신을, 백화점 같은 큰 곳이 아니라, 동대문과 남대문의 작은 가게들에 물건을 대는, 소규모 도매상이라고 소개했다.

임피제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 온 것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서울에서 겪었던 일들을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김 사장은 그의 이야기를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들어주었다. 그는 임피제가 가방에서 스웨터를 꺼내 보이자, 백화점 매니저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스웨터를 직접 만져보고,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보기까지 했다.

"이야… 이거 물건이네, 물건이야." 김 사장은 진심으로 감탄하는 듯했다. "요즘 세상에, 이렇게 정직한 물건이 어디 있습니까. 요즘 것들은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에 이런 이야기가 없어요. 사장님, 이런 진짜배기는, 알아보는 사람한테 팔아야 제값을 받는 법입니다."

그의 말은, 임피제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하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김 사장은 마치 그의 마음속에 들어왔다 나간 사람처럼, 그가 듣고 싶었던 모든 말을 정확하게 골라서 하고 있었다. 그는 임피제의 가장 약한 부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제가 한번 팔아보겠습니다." 김 사장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저한테는, 이런 물건의 가치를 아는 단골 가게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백화점처럼 크게는 못 팔아도, 꾸준히는 팔 수 있을 겁니다."

임피제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가느다란 빛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망설였다.

"다만…" 김 사장이 말을 이었다. "그 가게 영감님들이 좀 깐깐해서요. 물건을 맡기려면, 우리 쪽에서도 성의를 보여야 합니다. 이 물건이 확실히 팔릴 거라는 보증, 일종의 '보증금' 같은 게 좀 필요합니다. 그래야 그 양반들도 믿고, 가게의 가장 좋은 자리에 물건을 내놓아 주거든요."

보증금. 그 단어에, 임피제의 마음에 드리웠던 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에게는 이제, 여관비와 제주로 돌아갈 뱃삯을 빼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전부 다는 어렵습니다." 임피제가 말했다. "하지만, 제가 가진 것의 절반 정도라면…"

김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사장님, 장사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이왕 거는 거면, 전부를 걸어야죠. 저를 믿으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내일 이 시간에, 여기서 다시 뵙지요. 그때는 제가 두둑한 현금 뭉치를 들고 나타날 테니, 사장님은 오늘 밤, 오랜만에 두 발 뻗고 푹 주무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임피제는 그의 눈을 보았다. 그 눈에는, 서울에서 만났던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따뜻한 신뢰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희망이라는 이름의 도박에 걸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녀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임피제는 여관으로 돌아와, 남은 돈 전부를 긁어모았다. 그리고는 소녀들의 희망이 담긴 스웨터 스무 벌을, 김 사장의 손에 전부 넘겨주었다. 김 사장은 돈과 스웨터를 받아 들고,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내일 봅시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음 날, 임피제는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 선술집에 도착했다. 그는 어젯밤, 정말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희망은, 가장 강력한 수면제였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지나고, 한 시간이 더 지나고, 선술집의 낡은 괘종시계가 저녁 시간을 알렸을 때에도, 김 사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불안감은, 이내 차가운 확신으로 변해갔다. 그는 김 사장이 알려주었던 동대문의 사무실 주소를 찾아 헤맸지만, 그런 주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길 한복판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최 사장의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히고, 이제는 이름 모를 사기꾼에게, 소녀들의 마지막 희망까지 송두리리째 빼앗긴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사업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 그가 평생을 지켜온 신념 자체에 대한, 잔인한 파괴 행위였다. 최 사장의 계략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악랄하고 집요했다.

그날 밤, 임피제는 서울의 거리를 정처 없이 걸었다. 무교동의 화려한 네온사인도, 남산 타워의 고요한 불빛도,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텅 빈 주머니와, 텅 빈 마음과, 그리고 이제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텅 빈 미래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허름한 여관방으로 돌아왔다. 돈도, 스웨터도, 희망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방. 그는 불을 켜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어둠 속에 주저앉아, 창밖에서 들려오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도시의 소음을 들었다. 축음기는 없었지만, 그의 귓가에는 세상의 모든 슬픈 노래가, 한꺼번에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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