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무비패스 01
임순례 감독의 신작[리틀 포레스트]는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데 만화는 이미 일본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모리 준이치 감독의[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편에서 주인공의 후배인 요이치. 요이치는 도시에서 살다 고향인 코모리로 돌아왔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한다. 도시인들은 자기가 직접 체험하고 겪은 진짜를 말하기 보다 남이 만든 걸 옮기면서 잘난 체만 한다고. 지금부터[리틀 포레스트]에 관해 이야기를 꺼낼 내가 꼭 요이치가 말하는 도시인 같아서 민망한 마음을 어쩔 줄 모르겠다. 여러 날과 달 동안 많은 사람이 몸을 쓰고 생각과 말과 분주히 움직인 걸음걸음을 모아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질텐데 그 영화를 직접 겪지 않은 사람이 만듦새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하기는 쉽다. 각자 선 자리에 따라 세우는 가치가 다르다보니 내가 선 자리에서 오늘은 괜한 잘난 체를 하게 되었다. 영화[리틀 포레스트]가 착한 영화라며 청춘을 위로하는 힐링을 내세운다니 이런 영화에게 '도대체 왜' 이렇게 영화를 만들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이야기를 꺼내려니 자꾸만 본론을 미루고 싶어 서두가 길다.
모리 준이치 감독은 [리틀 포레스트]의 사계를 각 계절마다 대략 50분씩 할애해서 네 편으로 나눠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여름과 가을, 겨울과 봄으로 나뉜 두 편이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그 [리틀 포레스트: 겨울과 봄]편에서 키코가 임순례 감독의 영화에서는 혜원이라고 불리는 이치코에게 이런 말도 한다. '박복한 공주놀이 중'이라고. 등장인물이 등장인물에게 한 말이었는데 한국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딱 한 마디로 요약한 표현이 저렇지 싶다. 예전에 꽤 유행한 '아프니까 청춘'이란 메세지가 여러 사람을 위로도 했겠지만 젊은 세대의 고난을 조롱한다고 비난도 많이 받았다. 아프니까 청춘의 부정적인 의미를 영화로 보여준 작품이 [리틀 포레스트]이다.
추상만 있고 구체는 없다.
주인공 혜원은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도시로 상경한 지방인으로 살면서 부실한 식사를 하고, 소통이 되지 않는 연인을 만난다.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온다. 누군가 반겨주는 집이 아니라 혼자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고향집. 혜원은 집에 오자마자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주요한 행위 중 하나가 요리인데, 혜원은 도시에서 옥탑방에 살 때는 간단하게 해치웠던 끼니를 시골집에서는 재료를 손질하고 다듬어 먹을만하게 만들어낸다. 음식 프로그램의 오프닝처럼 여러 요리들이 펼쳐지는데, 시골에서 직접 재배한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기대를 갖고 영화를 보았다가는 실망만 한다. 주인공들이 먹겠다고 만든 음식은 마치 잡지 촬영용 사진을 찍기 위한 요리처럼 보인다. 식용 꽃잎을 면요리에 우루루 뿌리는 장면이 나오는 순간부터는 앞으로 나올 음식 장면에 대한 기대가 싹 사라지고 말았다. 뻔한 클리세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또 혜원의 시골집 부엌에는 '낡은 게' 그닥 눈에 띄지 않는다. 같은 원작으로 만든 모리 준이치의 [리틀 포레스트]에도 임순례의 영화처럼 저런 촌에 살면서 갖추고 살기 어려워보이는 가재도구들이 보인다만 그래도 곰팡이 슨 주걱이나 오래 써서 바닥이 닳은 프라이팬들이 부엌을 채운다. 그렇게 생활의 세세함을 영화적 세계에 구현하려고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데 혜원의 고향집 부엌에는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 중에 요리 연구가가 있나 싶은 궁금증이 들만큼 부엌 도구들에 신상 제품의 날선 기운이 서렸다. 이곳에서 혜원은 도시에서 돌아와 사계절을 지내는 동안 음식을 해먹는다. 수제비를 빚고 떡을 찌고 찌개를 끓이고 전을 부치고 술을 담궈서 친구들과 나눠 먹는다. 사람 눈을 홀릴 만큼 멋진 요리도 아니고 영화를 보다 말고 메모장을 꺼내고 싶게 솔깃한 레시피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다보니 딴 생각이 드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은 저 음식들을 다 해먹을 돈이 어디서 나나라는 문제였다. 엄마는 오래 전에 집을 떠났고 아버지는 혜원이 어릴 때 죽었다. 옆집에 사는 고모가 매일 식재료를 가져다 주면 그것으로 해먹는다는 설정인가? 간간이 혜원이 농사를 돕는 장면이 나오지만 혜원의 고민은 농사나 밭일보다 자기가 두고 온 서울의 삶이다. 이렇게 [리틀 포레스트]가 만든 영화적 세계에 공감이 안 되는 이유가 뭔가 곰곰이 따져보니 노동은 없이 팬시용 제품같은 음식만 있기 때문이었다.
자꾸 일본영화와 비교해서 안됐지만, 모리 준이치 감독의 혜원인 이치코가 그럴싸하게 플레이팅 한 접시에 놓인 오리구이를 먹는다면 우리는 그녀가 그런 오리구이를 충분히 먹을만하다고 받아들인다. 이치코는 오리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본 뒤뚱거리는 오리들의 귀여움 때문에 오리를 죽이는게 불편했다. 그러나 오리구이를 먹으려면 누군가는 오리를 죽여야 하니까 그녀는 이를 피하지 않고 부엌에서 일을 거든다. 그렇게 수고해서 얻은 오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이치코가 프라이팬에 올린 오리는 살이 붉고 기름기가 흐르는게 먹음직하다. 그저 예쁘게 뿌린 소스와 오리구이 상차림만 놓였다면 분명 사람의 먹고 사는 수고 같은 건 떠올리지도 못 했을 것이다. 일본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주인공 이치코가 만들어가는 세계의 핵심은 '일'이다. 한국영화와 다르게 연애나 자아찾기는 사실 약간 뒷전이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모를 심고, 잡초를 뽑고, 장마에 내린 비를 맞아서 땅에 떨어진 과실들을 거두고, 사우나를 하는 것처럼 땀이 뻘뻘 나는 제초작업을 한다. 밭에 감자를 심고 양파를 기르고 바구니를 들고 숲으로 가서 고사리와 두릅을 따기도 한다. 이것들이 전부 그날그날의 밥상에 오르는 재료들이다. 먹거리가 낭만이 아님을. 살기 위해 먹고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하루종일 일해야 한다고 보여주는 영화가 모리 준이치의 [리틀 포레스트]이다. 그래서 한국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힐링을 위한 음식'을 보는 심정이 시큰둥하고 심드렁했다. 물론 멋진 그림 같은 한 끼를 보여주면서 노동은 빼고 음식만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기만 해도 입이 쩍 벌어지는 요리 만들기의 아름다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그런데 그마저도 이루지 못 해 아쉽다. 아주 오래 전에 레스토랑을 소재로 삼은 미니시리즈에서 본 듯 기시감이 드는 음식 만들기를 보여주고 마니, 인간의 삶을 채우는 진짜 노동은 빼고 잡지용 사진으로만 장식했다는 생각만 든다.
혜원의 나레이션을 통해 인생에 관한 '어떤 것'을 전달하려고 하는데 영화에서 표현되는 것들의 수위가 피상적이어서 [리틀 포레스트]라는 세계에 선뜻 끼어들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의 부재에 관한 설정도 납득하기 어려운 요인이다.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메세지를 '한 인간의 성장'이라고 한다면 한국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잠깐의 휴식'이라고 할텐데 이것은 '어머니의 부재'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혜원의 어머니는 혜원이 수능시험을 치른 날 혜원에게는 아무런 말도 해두지 않고 집을 나갔다. 혜원이 어릴 때 아버지가 죽고 혜원은 어머니와 둘이서만 살아왔다. 혜원의 엄마는 어린 혜원에게 인생을 사는 방향을 적극적으로 가르친 지혜로운 인물이자 자신이 결혼을 할 때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자신이 원하는 상대인 혜원의 아빠를 선택한 주체적인 여성이다. 영화속에서 이 정도의 설명을 해준다는 말이다. 그런 엄마가 딸을 두고 야밤도주하듯 집을 떠날 이유가 도대체 뭔지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차라리 애인이랑 살러 떠났다면 그럴만하다고 여기겠다. 세상에 집을 나가는 엄마들은 많다. 모든 엄마들이 다 집을 지키며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 세상에 나갈 때까지 지켜주기만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혜원의 엄마는 집을 나갈 엄마가 아니다. 자기가 미뤄두었던 일을 위해 집을 떠났다고 편지를 보내왔지만 그 편지도 좀 어이가 없기는 하다. 그런 엄마라면 충분히 딸에게 당분간 도시로 가서 할 일이 있다고 알리고 집을 떠날 수도 있겠다 싶다. 혜원을 '박복하게' 만들기 위해 이 시나리오를 쓴 이들이 스마트폰의 기능을 잊어버리려고 눈을 감아버렸나 싶은데, 혜원의 엄마같은 캐릭터가 딸을 두고 집을 나간 이유와 다시 돌아올 여지를 보여주는 설정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또 일본 영화 이야기를 하자면, 주인공 이치코는 엄마에게 버림 받았다. 버림 받았다고 받아들이고 산다. 냉정한 진실을 받아들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아마도 이치코의 엄마는 연인과 함께 살고 있을 것 같은데, 딸을 두고 자기 만의 인생을 찾기 위해 떠났고 이치코는 이 사실을 인정한다. 혼자 남은 딸은 스스로 먹고 살기 위해 빌린 농지에서 농사를 짓고 시간이 나면 다른 작업장에 가서 아르바이트처럼 일손을 돕는다. 혼자 돈 벌고 혼자 집안 일 하고 혼자 밥 지어 먹는게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고 투덜거리는 장면 역시 영화에 등장하는데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녀가 얼마나 고생스러운지 너무 잘 안다. 이치코는 자기가 살 땅을 스스로 선택해서 살아가는 기쁨을 알고 싶어 도시로 떠났다가 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영화가 끝날 때 쯤이면 열몇 살이던 소녀가 어머니가 떠난 빈 집에서 혼자 살림을 하고 일을 하러 매일 논과 밭과 공장으로 다니고 다시 도시로 떠나 대형마트에서 상품정리를 하면서 어른이 되는 시간을 다 들여다보게 된다. 이치코가 부유하듯 도시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던 때와 달리 남편을 데리고 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를 볼 때, 우리는 그녀가 그 고단한 하루하루를 사는 동안 계속 고민했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기쁘고 대견하기만 하다. 이치코는 자기 삶에서 짐을 나눌 가족을 잃고 혼자 살면서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성장한 한 여성이자 인간이다. 모리 준이치 감독이 어머니의 부재를 한 여성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치르는 고통스런 진실처럼 표현한 반면 임순례 감독은 어머니의 부재를 진짜 인생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멘토' 혹은 딸에게 인생의 진리를 알려주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참 모성'처럼 그렸다. 그런 허상때문에 영화를 보는 우리가 주인공 혜원에게 공감하거나 그녀의 허허로운 빈 구석을 같이 아파할 여지가 없다. 어머니의 부재를 다루는 관점 역시 인생의 어떤 면을 과하게도 덜하게도 보여주지 않고 딱 그만큼에 대면하여 직시하기보다 그럴듯한 포장 혹은 익숙하고 관습적인 관념에 기댔기 때문에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의미 있는 주제로도 매력적인 소재로도 표현되지 못 한 셈이다.
예쁜 영화, 묵직한 영화, 아름다운 영화 중에서
산에 지천으로 널린 게 먹을 거리라는 말이 있는데, 도시에 사는 사람도 이걸 모르지는 않는다. 널린 열매와 먹을 수 있는 나물들을 골라서 집으로 가져와 이것들을 삶아야 할 지 소금에 절일지 말릴지 끓일지 아는 것. 숲에서 나는 자연의 재료들을 먹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감탄하고 저런 숲과 계곡에 둘러싸인 낡은 농가에서 나고 자란 삶을 동경해보기도 한다. 이런 영화를 볼 때 말이다. 그런데 주인공 혜원은 도시 사는 사람이 동경하는 그런 자질, 원작에 이미 표현된 주인공의 능력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 못 한다. 자기 자신답게 살며 자신의 뜻으로 삶의 공간을 만드는 문제라는 주제 역시, 음식 보여주듯 추상적인 메세지만 있을 뿐 그것을 구체화하는 에피소드나 개연성이 부재한다. 묵직한 주제도 없고 예쁘지도 않다면 아름다움을 담은 영화의 자리를 지켰더라면 어땠을까? 사계절이 변화하는 동안 하늘을 차지한 양떼구름을 누가 붉은 꽃잎으로 물들였나 싶게 아름다운 해질녘이라든가 집채를 흔들 기세로 부는 바람, 앞이 보이지도 않을만큼 쏟아붓는 눈보라가 내리는 오후같은. 자연 속에서만 느끼는 변화하는 계절의 정취를 감상 할 멋진 풍경들도 부족하다.
영화의 시작부터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자주 보여주어서, 등장 인물의 속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게끔 길이 펼쳐질 줄 기대했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드러나는 주인공 혜원의 내면은 이 세상에 유일한 한 인간 혜원만의 색채와 깊이가 보이지 않는 평평한 공간이고 그녀가 겪는 갈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감당해야 하는 보편적인 고통 역시 구체성이 부족한 탓에 공감하기 어렵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집을 떠나면서 키우던 강아지를 안전한 쉼터로 데려다놓을 줄도 모르는 주인공. 줄에 묶인 강아지를 그대로 마당에 두고는 친구들이 언제 와서 확인할 지도 모르는 쪽지에 '이 쪽지를 먼저 보는 사람이 강아지를 돌봐'주라고만 써두고 발랄하게 집을 떠나는 주인공을 관객이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이 없는 영화이다. 다만 혜원 역을 맡은 김태리, '연기하는 근로자'의 강인하고 성실한 이미지가 빛나는 배우 김태리가 있어서 이 영화의 여러 부분들이 채워지고 윤기있게 덧칠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