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변명 한번 들어볼래?
글에 들어가기 앞서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게 되어 죄송합니다.
저는 브런치 외에 아이들과의 일상을 공유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www.youtube.com/donghidonjour 유튜브에서 ‘동하이동주르’를 검색)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면서 한 주에 유튜브에 영상 한편, 그리고 브런치에 글 한편을 올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8월, 급성 신우신염으로 며칠 입원을 하게 되었어요.
혼자 1인 병실에서 할 것은 생각밖에 없더군요.
단지 ‘취미를 갖고 싶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다방면에 걸친 저의 얕은 관심과 도전들이 돌아보니 강박이 아니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평일엔 출퇴근과 육아를 병행하며 틈틈이 영상편집과 글쓰기, 주말엔 6시간의 학원 강의를 듣고 아이들 챙기기 등 분주하게 보내는 삶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생각했는데 눈물 나도록 아픈 몸을 견디다 결국 응급실로 향하면서 다 갖는 것은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숙제를 내고 약속을 만들어가며 스스로 몰아붙였다는 생각이 들어 아직 가속이 붙지 않았다고 생각된 브런치를 잠시 내려놓았었는데 많이 기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브런치라는 우주에서 저에게 쥐어준 ‘작가’라는 타이틀은 부풀려진 거품처럼 민망하게 느껴지면서도 그토록 바라며 사는 작은 '인정(認定)'의 징표라 계속 글을 써나갈 생각입니다.
제 브런치를 구독해주신 감사한 여러분께서 어떤 이야기를 기대하시는지 제가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아마도 그저 ‘대한민국에서 아들 둘을 멀쩡한 녀석들로 키우기 위해 내가 먼저 상마초가 되었다는 어느 엄마 이야기’가 아닌가 감히 예상해 봅니다.
그리고 신청곡은 못 받습니다만 혹여나 입양이나 저의 육아 등에 대한 질문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글 속에 잘 녹여서 답변을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람이 자기 건강을 해치는 방법이란 게 별 것이 없다.
나보다 중요한, 나보다 먼저 챙겨야만 하는 존재(그것이 사람이든, 일이든)가 생기면 아주 그만이다.
어릴 때부터 난 운동을 싫어했지만 지구력은 꽤 좋은 편이었다.
중고등학교 땐 인스턴트를 좋아해서 몸은 육중했지만 체육시간 뜀틀은 곧잘 자신 있게 뛰어넘었던 것 같고 100미터 달리기는 20초를 가뿐히 넘기지만 오래 달리기에선 늘 순위권에 들었었다.
반면 남편은 체질적으로 마른 체격을 극복하고자 운동으로 벌크업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라 운동 경력이 꽤 되었다.
내가 남편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교회 내 친한 사람들 사이에 ‘몸짱’으로 소문난 청년이었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선 볼캡을 쓰고 다니는 말 수 적은 청년을 보았는가. 그는 늘 바나나를 송이째로 들고 다니며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다. 그와 친하지 않아 바나나를 얻어먹지 못했던 나는 그가 하도 말이 없어서 마치 먹으란 말도 없이 바나나부터 내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보고 있자면 받은 사람들의 얼굴은 감사함으로 빛나기보단 이미 바나나를 받게 될 오늘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는 듯 건조했다. 초등학교 때 급식으로 나온 우유가 하굣길 쓰레기 통에서, 학교 담벼락 아래에서 처참하게 터진 채로 심심찮게 발견되던 장면이 떠올랐다. 바나나가 빨리 시들지 않는 과일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결혼을 하면서 남편과 함께 처음 건강을 위해 운동이란 것을 해보았고 달라지는 몸의 긴장감과 에너지를 즐기게 되었다.
첫째 동하를 집으로 데려오면서 완전히 뒤바뀐 엄마로의 삶에 적응하느라 한동안은 운동을 하지 못했지만 꺼지지 않은 의지의 불씨를 일으켜 회사 근처 헬스장에서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난 꽤 운동을 잘했던 것 같다.
하지만 동주를 만나고 두 아이 육아를 하면서부터는 주어진 24시간이 마치 분단위로 쪼개지는 듯했다.
육아는 참 시간표로 쓰기도 어려운 임무들의 연속이다.
단 몇 분이 소요될 뿐이지만 필수적이고, 태산을 만드는 티끌처럼 잡다한 일거리로 가득 차있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 소변을 보게 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흘린 것을 치워주고 묻은 것들을 닦아주는 일, 아이 손에서 떨어진 숟가락을 주워 다시 씻어 손에 쥐어주는 일, 손톱과 발톱이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고 때때로 깎아주는 일, 기저귀 틈 사이로 새어버린 똥오줌을 처리하고 내 손에 묻은 것도 씻어내는 일 등… 사건과 사고 같지만 필연적인 일들이 내 집중력과 시간을 흡수한다.
어린아이를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아주 사소한 챙김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나는 때때로 지금은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가 겪으셨던 6.25 사변의 피난길을 종종 상상해보곤 한다.
우리 할머니는 우리 아빠를 포함해 다섯 명의 자녀를 낳으셨다는데 우리 아빠가 동주보다도 어릴 때 피난길에 오르셨단다. 손발톱부터 기저귀, 대소변… 나는 온갖 육아의 편의를 돕는 발전된 도구들을 갖추고도 이렇게 허덕이는데 그 시절이 어땠을까 하면 상상의 나래는 제 역할을 미처 다 하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툭 꺾이고 만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해주어야만 하는 일들을 아이들이 스스로 해내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며, 나는 아직도 그 잡무의 터널을 통과 중이고 아마 그 기간 내 운동이란 걸 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걸.
그렇게 아이들에게 어제 먹은 칼로리들을 바치고 나서 이른바 ‘육아 퇴근’을 하는 시간은 대략 10시~10시 반 사이가 된다.
그 시각, 그저 남은 내 몸 하나 씻기고 눕히는 목표만이 남는다.
그럴 때면 똑같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도 운동으로 멋지게 삶을 주도해가는 엄마들이 떠오르고 그게 나는 아니라서 슬퍼진다.
그런 일상이 모여 3년을 지나 4년 차가 되었다.
운동을 안 한 지 4년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