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난 유인원

지금은 21c.

by coldhail

나는 유인원 이론 신봉자다.

이론의 대전제는 이렇다.

'우리가 문명을 가지게 된 이후의 시간보다,

이전의 시간이 훨씬 길기 때문에

우리 뇌의 대부분, 특히 감정과 본능은 아직도 유인원 수준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화]를 낸다는 게 중요한 표현 수단이라고 믿는다.

유인원 이론에 따르면,

커뮤니케이션 중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상대방 뇌 저변, 그러니까 본능을 타격하려면 화를 내는 게 잘 먹힐 수밖에 없다.


유인원들은 단체로 생활을 했고, 언어가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언성이 높아지면 몸싸움으로 번졌겠지.

의사나 병원이 없으니 싸우면 회복이 느렸을 테고

그런 몸상태로는 자연에서 살아남기가 힘들었을 거다.

(사실 화를 낸다는 것 자체가 경고성을 띄기 때문에 물리적 위해는 없겠지만

유인원의 뇌는 아직도 [화를 낸다]가 자연 속에서 가지는 의미를 잘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문명인은 참을 줄 안다.

화가 나는 걸 참는 게 아니라.

화를 내는 걸 참는다.

화를 내더라도 어디에 누구에게 낼지를 구분할 줄 안다.

마냥 참지 않고 사리 분별을 하며 화를 낸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과

굳이 헤집어서 화를 내야 할 일을 구별할 줄 안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화를 낸다는 게 서로에게 부끄러운 일인 줄은 안다.

때로는 화 대신 용서하기도 한다.


유인원들이 요즘 많이 보인다.

화낼 일과 화내지 않아도 될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원숭이들이다.

간간히 튀어나오는 유인원은

드래곤볼 손오공이 달을 보며 원숭이로 변신하는 효과를 줄 수 있다.

갑자기 사람이 원숭이가 되니 안 놀랄 수가 있나?

그런데 지금은 21c다.

덩치가 크던 어떻던 유인원은 문명인에게는 그냥 원숭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침에 거울 속에서도 유인원 한 마리를 발견했다.

내 얼굴과 유인원의 얼굴이 그제야 붉어졌다.

앞으로 화날 때는 일단 침착히 자리라도 피해야겠다.

문명인 흉내라도 내면서 살자고 다짐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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