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올해는 내년병 안 걸렸냐?"
20년 지기 친구 G와 나는 자주 내년을 이야기했다. 여름이 지나 하반기에 접어들거나 11번의 월요일이 지나면 2020년이 된다는 지금쯤이 아니라, 연초부터 뭔가 일이 잘 안 풀린다 싶으면 내년을 기다렸다. 우리는 그걸 '내년병에 걸렸다'라고 표현했다.
'내년'이 온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는데도 그랬다. 스물아홉이 서른이 된다고 해서 갑자기 성장하지 않듯이, 서른넷이 서른다섯이 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래도 어쩐지 내년이 되면 올해 있었던 모든 안 좋은 일이 리셋되고 무언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물론, 몇 달 안 가 다시 내년병에 걸리곤 했지만.
언제나 '내년'에는 좀 더 근사한 어른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G와 내가 한창 내년병에 걸려있던 스물다섯, 카페에 나란히 앉아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 서른에는 작업실을 갖자고. 행여나 작업실을 갖지 못하더라도 글 쓰는 일에 소홀해지지 말자고.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던 G와 소설가가 되고 싶지만 카피라이터로 살고 있던 내가 가지고 있던 또 다른 꿈이었다. 아직 있지도 않은 작업실을 머릿속에 그리며 어디쯤에 몇 평짜리를 구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우리만의 작업실 이용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레발을 쳤다.
언젠가 책장 정리를 하다가 그 무렵에 썼던 다이어리를 찾았다. 면접 때 흔히 들을 수 있는 질문을 어느 한 귀퉁이에 적어놓았는데 5년 뒤에 어떤 모습일 것 같냐는 내용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질문을 다이어리에 써두었는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광고를 만든 유명 카피라이터가 되어있을 거라고 장담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도대체 뭘 믿고 그랬을까.
그로부터 10년이나 지났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작업실은 없다. 그저 나는 소설 수업을 듣고 몇 번 끄적여본 12년 차 카피라이터가 됐다. 그리고 부장이 되고 CD가 되는 동안, 호언장담했던 그때와 달리 이름만 대면 알만한 광고 같은 건 만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내년'에 그럴 기회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행복한 '내년'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적 있었다. 결혼을 생각했던 사람과 울고 불고 밑바닥까지 드러내며 헤어진 마당에 그런 '내년'이란 없다. 적어도 당분간은 말이다. 오히려 그때의 상처가 빨리 지워지길 바란 '내년들'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생각해보면 기대만큼 좋은 '내년'이 있던 것도 아닌데,-오히려 없어서 더 그랬나- 왜 그토록 내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걸까.
혹시 후회 때문은 아니었을까. 잘할 수 있었는데, 더 해낼 수 있었는데 또는 그런 말 같은 건 안 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그렇게 상처 주지 않았어도 됐는데 싶은 순간들에 대한 후회 말이다. 되돌릴 수 없는 모든 순간들을 곱씹으며 이렇게 깨달았으니 '내년'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믿었던 것 같다. '내년'이 되면 레벨 업할 수 있을 거라고, 한층 쌓인 경험으로 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몸도 마음의 성장도 이뤄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사람은 그렇게 금방, 쉽게 자라지 않는다.
이제 G도 나도, 예전만큼 내년병에 걸리지는 않는다. -결혼을 앞둔 G는, 마지막으로 격한 내년병을 앓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아! 이렇게 갑자기 내년병 동지를 잃게 되다니!- '내년'에 대한 기대감보다 오늘을 그리고 올해를 살아내는 것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타나 날 괴롭히는 게 내년병이다.
언젠가는 내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오롯이 올해가 좋은 해라고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오면 좋겠다. 지금의 능력치를 충분하다 여기며, 뭔가 이뤄내지 못한 '내년'이 아니라 뭔가 이뤄내기 위한 노력하는 '내년'을 가질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