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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비 Sep 21. 2024

우리는 싸워서, 스스로를 구원할 거야

『투계』(페르난다 암푸에로, 임도울 옮김, 문학과지성사)를 읽고

여든 살 엄마는 ‘청소년 부모’의 사연을 담은 예능을 즐겨보고는 말한다. 당신의 외손녀인 00이(중1)를 잘 지켜보라고. 나쁜 놈들 조심해야 한다고. 00이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한다고. 유교-가부장제 하의 외며느리,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엄마는 여전히 ‘나쁜 놈들’이 두렵고, 한때는 당신의 딸을, 지금은 손녀의 안위를 걱정한다. 나쁜 놈들은 언제 어디서나 다양하고도 비슷한 패턴으로 존재하고, “귀신이 뭐가 무섭냐. 산 사람이 무섭지”라는 고릿적 우스갯말은 에콰도르 출신 이민자인 작가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의 작품에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소설집 『투계』(2018년 작품) 속 짧은 단편들에는 가부장 사회에서 일상처럼 벌어지는, 오래 묵고 은폐된, 약한 곳으로만 흐르는 폭력, 그 잔인하고 참담한, 지저분하고 구역질 나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놀랍고 끔찍하지만 너무나 ‘뭔지 알 거 같은’ 이야기들. (작품 속 6~70년대 미국의 록음악이나 7~80년대 공포영화들마저도.)       


단편 「괴물」에는 쌍둥이 자매-선머슴 같아 황소라 불리는 ‘나’와, 작고 겁이 많아 콩알이라 불리는 동생-가 나온다. 오빠가 없고 겁쟁이 동생만 있어서 공포영화를 못 볼 것이라는 친구 말에 나는 공포영화(비디오)를 잔뜩 빌려 보고, 동생은 악몽에 시달린다. 가사도우미 나르시사는 우리가 생리를 시작하자 “이제 진짜로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무서워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말한다. 우리는 마침내 주술과도 같은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된다.       


「경매」에서 나는 어린 시절 투계꾼이던 아버지에 이끌려 투계장에 다녔다. 끔찍하게 죽어간 닭들을 보고 고통스러워하면 아빠는 ‘계집애’라 욕하고, “어찌나 마초인지 닭에게 상대 닭을 반으로 쪼개버리라고 소리 지르고 부추기던” 투계꾼 아저씨들은 내게 성추행을 일삼는다. 그런 ‘어찌나 마초’들이 “죽은 닭의 창자와 피와 닭똥”을 보고 구역질한다는 걸 알고 나는 스스로 ‘괴물’이 되기로 한다.      


그 밖에도 미국에서 온 절친 디아나를 통해 전쟁이 가져온 참상을 엿보아 버린 「월남」, 떠나온 고향에 돌아갔다 이웃집 ‘이상한 오빠’-온갖 쓰레기와 벌레들의 구렁텅이에 홀로 버려진-를 찾아간 「새끼들」, 한때 사촌 남매와 신나게 놀고 사랑을 맹세했지만 그들이 떠난 뒤 우울한 엄마와 아픈 할머니만 남겨진 「블라인드」 등 여러 작품에는 어리거나 사춘기를 맞은 화자(주로 소녀들)가 등장한다. 가족 위계상 가장 약한 곳에 자리하면서도 성과 도덕의 금기를 훌쩍 넘나드는, 어쩌면 “개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기도요 구원인 시간.      


-우리 셋은 절망 속에서 마치 고아처럼, 조난당한 사람들처럼 키스한다. 굶주린 강아지들이 이 세상 마지막 남은 우유 방울을 빨아 마시듯. 하모니카 소리가 울려 퍼진다. 헤이, 미스터 탬버린 맨, 나를 위해 노래 한 곡 연주해주오. (*밥 딜런의 ‘Mr. Tambourine man’ 가사) 우리는 저녁 어스름 속에 있다. 이 순간이 지나가고 있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가 세상이다. (56쪽, 「월남」)     


덕분에 소설은 잔혹한 민담 같기도 한데, 천연덕스레 성큼성큼 전개되는 이야기의 끝에는 끔찍한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냉담자’이지만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나에게 「수난」과 「상중喪中」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두 작품은 아예 성경 속 예수의 신화를 비트는데, 그가 보인 온갖 기적은 실상 천대받던 마녀의 힘이라거나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는 학대하는 오빠였다는 불온한 상상으로 다시 쓰인다. 작품 속 마리아들은 “고아이자 멸시받고 학대받은 아이, 절름발이이자 절반의 귀머거리, 창녀, 살인자, 나병 환자”이고(「수난」), 숱한 폭력과 유린 끝에 “가장 꾀죄죄하고 더러운 떠돌이조차도 구역질을” 느끼게 된 여자(「상중」)이다. 기록조차 없이 무참히 사라진, 어쩌면 신의 아들보다 더 신에 가까웠을 여성들의 현현.      


엄마에게 종교는 때때로 위안이지만 가부장적 기독교-거룩과 순결, 죄의식이 강요된-는 동시에 억압이었을 것이다. 하여, 나는 두 작품이 몹시 고통스러우면서도 일견 통쾌함을 느꼈는데,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     


-그는 변했다. 이야기들은 처방으로, 기담으로, 그리고 명령으로 바뀌었다. 그는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사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마술적인 것들, 성스러운 것들, 그리고 어쩌면 불경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너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117쪽, 「수난」)     


-마르타에게 믿음이란 단어는 이미 혀 속에서 똥 맛이 났다.(136쪽, 「상중」)     


그 밖에도 이런 대목.     


-이런 게 정말 기적이구나, 아기 예수의 기적이구나, 하긴 우리가 정말 많이 기도하긴 했으니까. 그리고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더 사랑하셔서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고들 하니까, 빌어먹을 가난도 뭔가에 도움이 되긴 하는구나. (163쪽, 「알리」)     


13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충격적이지만 잘 읽히고, 지독히 불편하지만은 않았는데, 이렇듯 간결하고 거침없는 문장, 어루만지듯 아름다운 묘사 덕분인 듯.      


딸은 사춘기를 지나는 중이고 여성에 가해지는 폭력과 능욕은 더 교묘하고 악랄해지는 세상이라서, 나 역시 엄마처럼 두려움에 떤다. 그러나 딸이여, 쉬이 움츠리지 말기를, 네 목소리가 어디서나 당당하기를, 나의 가장 정의롭고 무엇보다 사랑이신 신에게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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