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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한슬 Apr 10. 2017

정책의 주요한 두 축 : 구조와 개인

   혹자는 우리의 자유 의지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누군가는 개인의 자유의지와는 무관하게 구조적인 원인이 대부분을 결정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언뜻 보면 우리의 삶과는 유리된 철학자들의 탁상공론인 듯도 싶지만, 이는 실제로 우리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정책의 수립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저번 글(링크)에서는 자연과학 전공자로서 정책 공부를 하는 데에 따라오는 학습방법론적인 문제점을 짚어봤다면, 이번 글에서는 정책이 수립되는 데에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두 요소인 '구조'와 '개인'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볼까 한다.  




   우선 구조와 개인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 필요할 것 같은데, 필자의 최근 경험 하나를 옮겨볼까 한다.


서울 지하철을 자주 타시는 분들은 몇 번 보셨을 지도 모르지만, 지하철에 전동휠체어를 타고 탑승하시는 장애인 분들이 종종 보인다. 필자가 비장애인이라 잘 몰랐지만, 그런 분들의 편의를 위해 노약자석 한 줄을 제거하여 휠체어 거치공간을 만들어둔 열차 칸도 따로 있었더라고. 우연히 그런 칸에 탑승한 적이 있었는데,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전동휠체어 한 대가 탑승했다. 그 공간이 전동휠체어 거치공간인지 모르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자리에 멀뚱히 서 있자 장애인 분께서 비켜달라고 요청을 했고, 불만 섞인 사람들이 흩어지며 겨우 휠체어가 제 자리를 찾았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났나, 장애인 분께서 하차를 위해 다시 문 앞으로 향하셨는데 갑자기 노인 분들이 그 옆을 둘러싸곤 내릴 준비를 하시는 거다. 처음엔 같이 내리시는가보다 했는데 웬걸,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위치가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서 열리는 곳이라 전동휠체어보다 먼저 엘리베이터에 오르려고 준비하시던 거였다. 문이 열리고, 할머니 한 분은 전동휠체어 앞바퀴에 살짝 발을 밟히면서도 열심히 걸어 엘리베이터를 타셨고, 할머니 때문에 잠시 멈췄던 장애인 분은 결국 자리가 없어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을 봤을 때, 여러분께선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그냥 어쩌다 한 번 일어난 헤프닝이라 생각 하실 지도 모르겠으나, 2010년에 비슷한 상황을 겪은 장애인 한 분이 분을 못 이기고 전동휠체어로 엘리베이터 문을 들이받다가 추락해서 사망한 일이 있었다. 그런 사례에서 미뤄볼 때, 이게 그리 가벼이 넘길 갈등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일까? 아마도 노인이 '나이를 벼슬이라 여기는' 무례한 사람들이라 이런 갈등이 촉발되었다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리라. 혹은 노인들이 장애인에게 양보를 하지 않는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들이라 갈등이 일어났다고 할 수도 있을 테고.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 정도에서 그쳐도 되지만, 필자는 정책을 공부하고자 한다면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저런 갈등을 어떻게 줄이거나 방지할 수 있을지 까지 고민을 확장해야만 한다.




   우선 저 갈등이 생긴 원인을 노인의 문제로 파악하는 경우, 우리에겐 별 다른 선택지가 없다. 노인들이 근대시민의 교양을 충분히 갖추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니 노인들에게 인식개선 캠페인을 하거나, 의무적으로 인성교육이라도 시키는 것이 선택 가능한 전부일 따름이다. 단순화하기 곤란하기는 하지만 행위자인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면 항상 저런 식의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현재의 청년 취직난 상황에서 '청년들이 노력을 덜 해서 그렇다'는 식의 담론이 유통되는 것도 문제 원인을 취준생 개인에게만 투사해서 그런건데, 그런 담론들과는 정반대의 얘기로 보이겠지만 각종 힐링 서적들이 말하는 '내가 긍정적으로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것들도 결국은 개인만을 문제의 원인으로 꼽는다는 점에서 저러한 노오력론과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이런 접근들이 정책화되기 쉬운 해법이라면 저런 인식도 별 문제가 없겠지만, 사람의 인식을 정책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할까를 생각해보면 그 어려움을 능히 짐작 하실 수 있으리라 본다. 다른 해법을 위해서는 문제 원인부터 새로 찾아야 할 텐데, 그 다음 수순이 바로 '사회 구조'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엄밀한 사회과학적 개념으로 접근하자면 더 복잡하고 난해한 개념이겠으나, 구조적 요인을 간단히 정의하자면 개인의 의지나 능력 외에 다른 여타의 제반조건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는 한 사회의 문화적 특성은 물론이고 더 엄밀하고 명시적인 제도나 법률 따위의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것들이 포함된다. 가령 상급자의 잘못을 지적하기 힘든 사회적 분위기도 저런 것에 포함 될 수 있는데, 어쩌면 2016년 한국 최고의 이슈도 저러한 데에 일부 원인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한국 사회의 수직적 분위기가 옅었더라면, 누군가는 ‘안 된다’고 얘기를 했을 지도 모르는 것이잖은가.




   각설하고, 구조적 원인이 앞서의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자. 필자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므로, 필자의 의지가 얼마나 강하건 간에 생물학적 한계로 인해 필자가 임신과 출산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경우는 구조적인 요인이라기 보단 오롯이 개인의 능력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슷하게, 과거 미국에선 흑인이 교육을 받을 권리란 것은 없었다. 개인이 얼마나 학습 의지를 갖고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법적으로 흑인들은 교육기회를 보장받지 못했었기에 그네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이를 흑인들이 ‘노력을 덜 해서’라거나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하기는 곤란하므로, 이 경우는 오롯이 구조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현실의 문제는 두 사안 간의 경계가 이렇게 단순하지 않기에,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된다.

 한 때 한국에서는 호남 태생인 사람들이 정부 고위직에 올라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 했던 적이 있었다. 분명 호남 출신인 인사들이 고위공무원이 되는 경우도 존재하긴 했었지만 다른 지역(특히나 영남)에 비해서는 그 가능성이 희박했는데, 일부는 이를 두고 ‘호남 출신들이 능력이 떨어져서’라거나 ‘뒤통수를 잘 쳐서’라는 지역 차별적이거나 개인적 차원의 진단을 내리는 방식으로 ‘호남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펴곤 한다. 실제로 고위직으로 진출한 호남 출신들이 그렇지 못한 호남 출신들보다 능력이 탁월했음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정말 호남차별이란 구조적 요인은 없었던 것일까? 그저 우연히도 호남 출생의 공무원들이 타 지역보다 자기계발에 게을렀었고, 그것이 누적되어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해석해야 할까?



   위의 통계를 보면, 역대 정부에서의 인구수 대비 차관 이상의 고위직 공무원 우대/홀대 비율을 알 수 있다. 우선 호남 홀대부터 확인해보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제외한 역대 대한민국 모든 정부에서 호남 홀대가 나타났었다고 해석 할 수 있겠다. 반대로 영남 우대의 경우는 김영삼, 전두환, 노태우 정부에서 가장 심했으며, 김대중, 이승만 정부에서만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경우를 해석해보면,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나는 한국이 출신지역에 따라 능력의 편차가 지대하게 큰 특이한 국가라는 결론이다. 가령 전두환 정부의 경우를 보면, 호남 홀대가 –6.05이고 영남 우대가 +21.37이니 유독 전두환 정부에서 공직에 있던 사람들은 출신지역에 따라 능력이 27.42%나 난다는 비현실적인 결과가 도출된다. 다른 하나는 당시 한국 사회에 구조적인 호남 차별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첫 호남 출신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민주당계 정당의 대통령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하는 시기에 유일하게 호남 홀대가 없었으며 영남 홀대가 나타났었다는 점에서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보인다. 한국에는 호남 출신 차별이라는 구조적 요인이 실재하고 있었다.




   이렇듯 구조적 요인은 개인의 특성보다 간접적이고, 경향성의 측면에서만 나타나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개념을 어떻게 이용 할 수 있을까?




   다시 문제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무례하고 교양 없는 노인이란 ‘개인’에서 벗어나서, 지하철에서 저런 갈등이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야만 한다. 구조적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필자는 가장 먼저 ‘수요와 공급’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대부분의 재화는 그 공급이 한정되어 있고, 수요의 증감에 따라 가격도 증감하는 방식으로 적절한 평형상태를 이뤄가고 있다. 그런데 지하철을 비롯한 대중교통의 경우, 문제가 조금 달라지게 된다. 수요가 증가하면 가격이 올라가야 하는데, 대중교통 가격이 증가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이고 일부는 아예 돈을 내지 않고도 탑승 할 수가 있지 않은가. 좌석과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이용자는 계속 늘어나는데, 2015년 기준 서울 지하철 이용객의 약 15% 정도는 무임승차를 하는 노인이다. 2005년 당시에 약 11% 정도였으니 10년 사이에 5%p 정도가 늘어난 셈인데, 그 시기에 유독 지하철에서 노인들과의 마찰이 증가했다는 것을 많이 접하지 않으셨는가? 노인과 청장년층과의 자리 갈등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노약자석 자리를 두고 노인과 노인끼리의 경쟁도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기사화되고 있다. 수요-공급의 불균형으로 인해 노약자석이나 노약자용 엘리베이터에 대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 과정에서 무례한 개인들이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는 것이 필자의 문제인식이다.




   이런 문제인식에서 출발하면 우리는 종전보다 다양한 선택지를 고를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은 공급을 증가시키는 정책을 펴는 것. 지하철 운영 횟수를 늘려서 배차 간격을 줄인다거나, 지하철 규격을 바꿔서 한 객차 당 이용할 수 있는 사람 수를 늘인다거나, 위의 문제 상황에 맞추어 엘리베이터 속도를 늘린다던지 엘리베이터 수를 늘일 수도 있을 테다. 반대로 수요를 줄이는 것도 가능할 텐데, 대중교통 요금을 현실화하거나 노인 무임승차를 폐지 혹은 개편해서 이용자 중 노약자 비율을 줄이도록 유도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모 정치인의 ‘택시기사들의 삶이 팍팍하니, 택시 수를 줄이자’는 트윗 내용처럼, 수단과 목적이 뒤집힌 정책이라 그리 권장할 법한 것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저 접근마저 노인에게 인식개선 캠페인을 하자거나 인성교육을 실시하자는 식의 정책보다는 훨씬 문제해결에 더 근접한 정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쩌면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노인의 인식수준일지 몰라도, 효과적인 인식수준 개선 정책을 만든다는 것은 무척 힘든데다 실제 변화 가능성도 낮아 결국은 ‘노인혐오’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개인의 의지나 능력은 물론 사회 구조에도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어떤 경우는 한 쪽의 영향이 절대적이고, 어떤 경우는 아니며, 어떤 경우는 정확히 판단이 힘든 경우도 있다. 원인 분석마저 이럴 진데, 이를 정책화하는 것에는 더 큰 어려움이 따라온다. 어떤 경우는 정책으로 바꿀 수가 없을지도 모르며, 어떤 경우는 비용 문제로 인해서 원인을 명확히 짚어내도 정책화 하기 곤란한 경우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런 한계를 이해하고, 어떤 원인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려는 것이 정책공부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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