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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진 Apr 24. 2023

충남 논산 관촉사와 은진미륵

서양인의 눈에 비친 은진미륵 기록역사(Historiography)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풀어쓰면 "등잔 밑이 어둡다"라고 한다.

굳이 이렇게 설명할 필요 없이 이미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는 이 표현은 우리나라 미술사를 바라보는 세간의 실태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시각적으로 낯선 것은

언제나 신비롭고 자극적이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것보다, 바깥에 무엇인가를 더욱 추구하게 되어있다. 나 또한 한동안은 미국, 유럽 등 해외의 문물에 정신이 팔려 우리의 것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것을 공부해 보니 생각보다 매력적인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또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좋은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획도 많았다. 왜 나는 여태껏 비싼 돈을 주고 멀리만 갔을까?


2022년, 코로나-19가 사그라들 때쯤부터 시작된 나의 한국 사찰 답사를 브런치에 기록으로 남겨보고자 한다!


사진을 찍다 보니 더 좋은 화질로 멋진 구도의 사진을 남기고 싶어서 전문적인 카메라까진 못 사더라도 아이폰 프로맥스를 샀다.(?)


프로맥스의 위. 엄.


그리고 아직까지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흥미로운 미술사 답사 지역을 탐방해 가기 시작했다. 그냥 답사나 탐방에 그치지 않고, 관련해서 내가 재미있게 공부했던 부분을 쉽게 풀어보고자 한다. 이로써 우리의 유적지와 미술이 많은 이의 관심을 사게 되면 좋겠다.



그 첫 편으로 논산 관촉사와 은진미륵의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맞다.


우리 교과서에서 늘 보았지만, 한 번도 세심하게 들여다본 적 없는 바로 그 '못생긴' 은진미륵이다.




 



1. 논산 관촉사

관촉사 일주문




충남 논산시 반야산에 위치한 관촉사는 고려 광종 19년(968년)에 광종의 명령으로 승려 혜명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3년 현재의 기준으로 무려 1,055년 전에 지어진 사찰이다.



오래된 역사가 말해주듯, 단청의 빛바란 색이 아름답고 관촉사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나이가 지긋한 나무가 많다.



천 년 전의 사실을 우리는 현재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온 것일까?


관촉사의 건립 배경, 중수* 내력과 관련된 이야기는 영조 25년(1749년)에 음각된 관촉사 사적비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토대로 정립되었다.


*중수(重修) : [명사] 건축물 따위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침.




(좌) 원형의 한문 관촉사 사적비 / (우) 새롭게 만든 국문 관촉사 사적비



이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문인 이색(1328~1396)이 관촉사와 은진미륵에 관련된 시를 남겼고, 『신 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도 반야산의 관촉사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기에 꽤 오래전부터 관촉사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고종 9년(1872년) 은진현의 지리를 담은 「은진현지도」에도 귀여운 모습의 은진미륵과 관촉사가 묘사되어 있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우리 곁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 여기서 '은진'은 논산의 옛 지명으로, 덕은(德恩)과 시진(市津)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흡수되면서 각 지역의 마지막 글자를 합친 것이다.


Copyright ⓒ 2023. 서울대학교 규장각.




2. 고사리 설화


관촉사 사적비에는 관촉사가 자리한 은진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캐던 한 여인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어서 그곳을 바라보니 아이는 없고 바위가 땅에서부터 솟아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광종은 승려 혜명을 시켜 반야산의 바위로 불상을 조성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승려 혜명은 100명이 넘는 장인들을 동원하여 970년부터 1007년까지 약 37년간 불사를 치른 끝에 '은진미륵'으로 더 잘 알려진 석조보살입상을 완성하게 된다.



고사리 캐던 여인이 발견한 땅에서 솟아오르는 돌, 그리고 장인 100명이 옹기종기 옮기는 큰 돌의 그림


그렇게 영험함이 깃든 땅에 많은 인력과 오랜 시간을 들여 조성한 은진미륵은 당시 한반도 땅에서 가장 큰 석조보살입상이 되었다.



사찰 건물에 묘사된 은진미륵의 모습이다. 실제 입상과 다르지만, 영험함과 의미는 잘 다가온다.
이외에도 여러 그림이 남겨져 있다.
단청과의 조화가 참으로 아름답다.




3. 은진미륵


출처 : https://ncms.nculture.org/archival/story/4698


규모만으로 보면 은진미륵은 약 18m로 현재 아파트 건축물의 2-3층 높이에 이른다.


당연히 하나의 돌덩이로 만들어낼 수 없었으니 두 개의 돌을 딱 허리 부분에서 나누어 상부와 하부를 제작하였다. 머리에는 높은 보관을 쓰고 있고, 몸의 양 옆으로 떨어져 내리는 대의를 착용하고 있으며 손에는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사실 여러 도상으로 추정컨대 '은진미륵'은 미륵이 아닌 관음보살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2022년 11월, 관촉사 은진미륵은 보수를 위해 천막 뒤에서 쉬고 있었다.



앞서 은진현지도에서도 보았듯이 은진미륵의 보관에는 관음과 함께 그려지는 화불이 묘사되어 있고, 손에는 관음의 상징인 연꽃가지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기복적인 신앙 특징으로 인해 여러 보살상과 불상은 '미륵'으로 통칭됐을 가능성이 크다.


미륵하생 신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미륵불이 출현하면 모순된 세상이 바로 잡히는 등 구세주로서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복잡하니, 브런치는 여기까지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관촉사 은진미륵 앞에 놓인 석등, 세월을 보여주는 듯한 낡은 모습이 숭고한 느낌을 준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신은영 선생님의 논문을 참고해 보면 좋다.

신은영,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의 圖像-尊名불일치 문제와 ‘世間’," 史學硏究 117, 한국사학회 (2015): 123-161.
신은영, "‘은진미륵’의 근현대 역사 경험," 美術史論壇 42, 한국미술연구소 (2016): 107-130.


아무쪼록 은진미륵은 거대한 규모 때문인지 여러 영험함을 지닌 것으로 세간에 잘 알려져 있었다.


일례로, 중국 송나라 승려가 찾아와 은진미륵에 예배를 하고, 은진미륵의 불빛을 중국에서도 보았다고 한 기록이 있다.


또한, 국가가 평화로울 때 은진미륵의 이마와 눈에서 빛이 나고, 난리가 나면 땀을 흘린다고 전해지며 은진미륵이 단순한 석조입상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태종실록』에서 관촉사의 석조보살상이 땀을 흘린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보수 중인 은진미륵은 볼 수 없었지만, 오래된 역사를 느끼게 해주는 석등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돌이 너무 썩은 것 같다.



4. 서양인이 기록한 은진미륵


진짜 재미있는 내용은 지금부터다. (?)


1800년대 말, 아무리 막아도 세상의 변화는 우리의 보이지 않는 결막(?)을 뚫고, 비집고 들어왔다. 그 결과, 철도가 건설되었고 시공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근대적 개념의 '여행'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무려 18m의 관촉사 은진미륵은 독특한 생김새와 뿐만 아니라 거대한 크기로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고, 영험함을 지닌 신성한 종교적 존재에서 자국민과 외국인 모두의 눈길을 끄는 존재로 재탄생하였다.


은진미륵을 본 서양인들은 꼭 한 번씩 사진을 남긴 모양이었는지, 아직까지도 은진미륵을 포착한 서양인의 사진 자료가 많이 남아있다.


가장 오래된 서양인의 은진미륵 관련 기록으로는 1884년에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조지 포크(George C. Foulk)의 사진이다. 포크는 보빙사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게 된 미국인 청년으로 한국에서 거주하는 당시 갑신정변을 경험하며 여러 정치 폭풍 속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꿋꿋하게(?) 한국 여행을 세 차례나 다녀온 인물이다.


George C. Foulk


약 200여 년 전에 찍힌 포크의 사진에 나타난 관촉사의 모습이 비교적 오늘날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트럼블 화이트(Trumbull White)의 1898년 책 『Glimpses of the Orient』라는 책에 등장한 삽화이다.

Trumbull White, "Colossal Corean Idol -- Un-jin Miriok," from White's 『Glimpses of the Orient』(1898)


은진미륵의 손과 얼굴, 높은 보관 등을 사실대로 묘사한 점이 흥미롭다.


그런데 왜 화이트의 삽화에는 석등에 기둥이 묘사되지 않았을까? 19세기 이전에는 기둥이 없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림 상에서 누락된 것이겠지만, 왠지 추가 연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화이트의 삽화와 나름 비슷한 구도로 찍어보려 했던 사진. 실패.


다음으로는 1911년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책 『Korean Fairy Tales』에 등장한 은진미륵 삽화이다.


William Elliot Griffis, 『Korean Fairy Tales』(1911)


마치 모던 포스터를 연상케 하는 그리피스의 삽화는 근엄한 표정이 일품이다.


그림 아래에는 "인내를 갖고 미륵은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다"라고 되어 있다.


실제로 은진미륵은 "쥐(두더지) 설화"와도 연관되어 있는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 외부 링크로 남겨두겠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968



미국 선교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역시 관촉사를 탐방하고 1906년 자신의 책 『The Passing of Korea』에 아래와 같은 사진을 실었다.


Homer B. Hulbert, 『The Passing of Korea』(1906)


사진 아래 한 줄짜리 설명을 제외하고는 은진미륵에 관한 글을 별도로 남기진 않았지만, 한국의 불교를 소개하는 사진으로 은진미륵을 선별하여 첨부한 점에서 은진미륵을 특별히 한국적인 것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1924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에는 커즌 후작(The Marquess Curzon of Kedleston)이 한국을 여행하고 남긴 탐험기를 정리한 글이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에 은진미륵을 보고 온 사진을 첨부하였다.


아마도 1924년 발행된 글이니 그 이전에 은진미륵을 보고 왔을 텐데, 사진을 통해 1910~1920년대에 은진미륵을 관광지로서 찾는 인파가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로써 관촉사와 은진미륵을 살펴보고, 이를 우리보다 먼저 흥미를 갖고 기록한 서양인의 기록까지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우리나라에도 흥미롭고 재미있는 작품이 많고, 들여다보고 오래 바라볼수록 그 가치가 빛을 발한다.







1. 해당 글은 학술지 투고 예정 원문의 요약본입니다. 연구 자려의 무단 사용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1차 사료의 세부 출처는 학술논문 발행 후 별도 표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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