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발걸음이 빠른 편이다. 가족과 함께 걸을 때면 으레 앞서 나간다. 주차장을 나설 때면 무조건 먼저 운전석에 앉는다. 아들의 손을 잡고 갈 때는 예외지만, 대부분 먼저 가서 준비를 한다. 내가 빨리 걷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급한 성격이 원인 일 수 있지만, 아버지의 영향이 더 큰 것 같다. 성격이 급한 아버지는 약속시간 1시간 전에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시외버스 시간이 오전 7시면, 새벽 6시 전에 터미널에 도착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지만 상대적으로 나는 약속 시간에 대한 강박이 덜하다. 말 그대로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아버지가 보기엔 나는 느림보 그 자체지만, 다른 사람에겐 약속 시간을 절대로 어기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가족이 외출을 할 때도 아버지는 먼저 앞서 나간다. 외식을 하더라도 식당에 먼저 들어가고, 집으로 갈 때도 저만치 앞서서 걷는다.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를 뒤따르는 형국이다. 어렸을 적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가 들고 나도 가정을 꾸리고 가장이 되면서 조금씩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게 된다. 혹여나 반려동물로 인해 아들이나 가족이 피해를 입을까 하는 노파심에, 엘리베이터는 무조건 먼저 타고 내린다. 앞서서 길을 걸으면서 차가 오진 않는지, 가족에게 피해가 갈 일은 없는지 확인하며 가족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아파트 단지를 걸을 때도 가족의 안전을 생각해서 먼저 나선다.
이러한 아버지도 걷는 속도를 줄이는 날도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 바로 그날이다. 무뚝뚝한 아버지는 우산을 본인이 들고 어머니의 발걸음에 맞춰 걸었던 것이다. 한 시간 이상을 일찍 나서던 아버지의 빠른 발걸음은 비가 오는 날 만큼은 영업중지다. 이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머니의 걸음에 맞춰서 걸었다. 지금도 비가 올 때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우산을 쓰고 걷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급한 성격을 누르고, 아내가 젖을까 봐 우산을 받쳐 들고 발걸음을 맞춰 걷던 아버지. 아버지가 바쁘게 서둘렀던 이유는, 우리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어머니가 젖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했다. 어쩌면, 본인은 함께 천천히 걷는 것이 더 좋았던 거 아닐까?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려 본다. 내일 전화 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