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 남기는 소박한 유언?

사소하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은 욕망

by 그랑바쌈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노르망디 몽셍미셸 성안을 발바닥 땀나도록 돌아다니다가 잠시 쉬어간 곳은 묘지였다. 우리집 막내는 왠지 모르게 여행 중 묘지만 보면 사족을 못쓴다. 구경할 데 천진데 꼭 무덤에 발목이 잡힌다. 특별한 끌림이 있나보다. 유럽에서 묘지는 공원처럼 친근하다. 묘지 전문가로서 하는 얘긴 아니다. 시내 어디에서든 마주치는 게 묘지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한 시골 마을 성당에선 뒤뜰 전체가 묘지인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땅도 넓은데 굳이 뒤뜰에다 묘지를.. 몽셍미셸 같이 하나의 요새처럼 닫힌 공간에서조차 묘지는 오싹하게도 담장 안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창문을 열면 큼직한 비석이 눈앞에 보인다. 사는 곳에서 한참 떨어진 한적한 곳에 묘를 쓰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몽셀미셸 내 묘지를 누비는 우리집 막내(2018)

모스크바 출장중 잠시 들렀던 노보데비치 수녀원의 묘지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이곳을 걷다 보면 죽음이 비극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묘마다 고인의 삶을 읽을 수 있다. '시를 사랑했던 정치인' '세상에 웃음을 선사한 희극배우' 비석은 조각 작품이고 글귀는 한 편의 시다. 묘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개성만점의 예술 작품으로 손색없다. '아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군요. 난 당신을 모르지만 그대의 멋진 삶 앞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런 고백이 절로 나온다.


귀신이라도 나올까 싶어 또는 재수라도 나가떨어질 까봐 기피하는 장소가 아니라 시간 내어 걷고 싶은 산책로이자 잠시 쉬어가고픈 휴식처다. 사랑하는 이를 소환하는 기억의 정원이다. 무덤이란 것도 유한하며 기억조차 영원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나와 시간을 함께 한 가족에게만이라도 이따금씩 따사로운 오후의 쉼터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손주들이 뛰노는 잔디밭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를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

부모님을 어디로 모실까 고민하기엔 꽤나 이른 나이였다. 예고 없이 결정의 순간이 찾아왔다. 근처와 고향 남해를 두고 고민했다. 결국 집안 어른들이 묻힌 고향 마을 공동묘지를 선택했다. 남해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풍광 좋은 묘터였다. 매해 여름이면 가족 휴가로 남해를 찾는다. 두 분의 묘도 휴가코스의 일부다. 묘지에서 1km 정도 올라가면 양떼목장이 있어 아이들이 양들에게 먹이를 주며 놀기에 딱이다. 떠난 분을 추억하기에 묘처럼 적합한 장소는 없으리라. 파도 한 점 없이 그림처럼 펼쳐진 한려해상 절경을 내려다보노라면 이리 모시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내려오는 길목, 허기를 달래주는 멸치 국숫집도 빼놓을 수 없다. 국수 맛도 일품이지만 아버지와 똑같은 남해사투리를 쓰는 주인어르신이 반갑다. 못내 아쉬운 것은 너무 멀어 자주 찾을 수 없다는 이다. 캔커피 하나 사들고 올라와 시시콜콜한 얘기들 재잘재잘 털어놓을 수 있는 우리 동네 언덕배기 같은 곳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남해 묘지 근처 양떼목장에서 뛰노는 막내(2017)

난 아이들이 자주 찾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묻혔으면 좋겠다. 대단한 묘비나 장식도 필요 없고 풍광 좋은 터 아니라도 괜찮으니 몇 시간 운전해서 와야 하는 불편 없이 쉽게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렇게 중년이 된 아이들의 과거 회상씬에서 잠깐잠깐 엑스트라로 등장하고 싶다. 비싼 땅값을 생각하면 도시에 뼈를 묻겠다는 것이 그리 소박한 욕심이 아니란 안다. 그래서, 늙어 경제적인 여유가 좀 생긴다면 도심 가까운 곳에 납골당 한 칸 정도는 내 손으로 마련해 두려 한다. 아무리 아름답게 만들어진 관이라도 죽음을 갈망하게 할 수는 없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열심히 사는 이유가 멋진 관과 묘를 차지하기 위한 것은 아니겠지만, 피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이별 앞에 누구든 그 정도 욕심은 가져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오래도록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잔잔하게 기억되고 싶다는 작은 바람. 입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로 묻어달라고 했던 <소나기> 소녀의 잔망스러운 유언이 해가 갈수록 가슴 시리게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