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종시에 회전교차로가 많이 보인다. 아파트뿐인 신도시에 신호등이 너무 많다보니 교통체증이 가중됐다. 대안으로, 새로 생기는 교차로들은웬만하면 신호등 없는 회전교차로로 지어지고 있다. 회전교차로에서핸들을 돌릴 때마다 내 기억의 회로는 3년 전 영국의 스윈든(Swindon)이라는 마을을 찾아간다. 가족여행 당시 런던에서 옥스포드로 가는 길에 들렀던 작은 도시다. 하룻밤 묵어가는 경유지에 불과했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마을에 있는 아주 특별한 라운더바웃때문이다. 영국에선 회전교차로를라운더바웃(roundabout)이라고 부른다.
예전에 누가 그랬다. 영국 자동차 여행은 라운더바웃만 조심하면 된다고. 한국 운전자들에게 영국에서의 운전은 쉽지 않은 챌린지다. 좌측통행이라 운전석이 오른편에 있는 것까진 그러려니 했는데, 렌터카에 오토차가 없단다. 20년 만의 수동차 운전이라니. 게다가 기어마저 왼쪽에 달려 왼손을 써야 한다.설상가상, 회전 시 습관대로 깜빡이를 켜면 와이퍼가 움직인다. 졸지에 깜빡이도 없이 턴 하는 비매너 운전자가 된다. 도로는 어찌나 좁은지 사이드미러를 아슬아슬 비껴가는 곡예운전이다. 이미 총체적 난국이지만 여기까진 애교다.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바로 공포의 라운더바웃이다.
라운더바웃통행의룰은 사실 간단하다. 모든 진입로는 평등하고 진입선에 먼저 도착한 차가 먼저 회전로로 들어온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룰이 전혀 안 통한다. 진입로는 평등하지 않고 암묵적인 주 진행방향이 있다. 특히 진입로가 3개 일 때는 직선으로 빠져나가는 방향을 주 진행방향으로 인식한다. 다른 진입로에 정차한 차는 끝까지 기다렸다가 차가 없을 때 눈치 봐서 들어온다. 이럴 거면 굳이 라운더바웃을 할 것도 없다. 대충 속도가 빠른 차가 먼저다. 앞차 꼬리물기로 계속 들어가면 다른 진입로의 차는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으로 영국의 라운더바웃을 주행하면 큰일 난다. 영국은 라운더바웃의 나라다. 신호등이 없는 대신 라운더바웃이 이삼백 미터마다 하나씩은 있다. 각 라운더바웃에 진출입로가 기본 대여섯 개는 된다. 가야할 때 주춤하거나 멈춰야 할 때 속도만 믿고 그냥 진입하다가 아스팔트의 빌런이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죽하면 그 젠틀한 영국 신사들이 클락숀을 울려댔을까.
운전 이틀째, 라운더바웃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을 무렵, 스윈든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런 엄청난 라운더바웃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처음엔 그냥 보통의 라운더바웃인줄 알았다. 들어서자마자 내비게이션이 버벅거렸다. 도로가 롤러코스터처럼 빙빙 돌았다. 돌고 돌아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는 다섯 개의 작은 라운더바웃들이 톱니바퀴처럼 엉켜있고 이걸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는 큰 라운더바웃이 품고 있는 모양이다. 한눈팔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미로다.
스윈든에 있는 Magic roundabout 안내판(위키피디아)
매직 라운더바웃 사진(출처: 온라인커뮤니티)
그로부터 1년쯤 지나서야 내가 통과한 곳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매직 라운더바웃'이라는 걸구글 알고리즘이 이끈 기사를 통해 알게 됐다. 한국에서는 '악마의 도로'로 온라인 커뮤니티와 언론에 잇달아 소개된 적이 있다. 아마도 악마의 도로를 직접 운전해서 통과한 한국인은 손에 꼽을 것이다. 보통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 방송에 소개되면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는데 이건 정반대지 싶다. 웬만하면 여긴 피해갈테니. 매직 라운더바웃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아직도 모르겠다. 아내랑 차 안에서 어리둥절해 괴성을 질러댄 기억밖에 없다.
인생이 쭉쭉 뻗은 탄탄대로라면야 얼마나 쉬울까마는 가다 보면 어김없이 크고 작은 라운더바웃들을 만나게 된다. 진학과 취업, 결혼그리고 출산과 육아..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순간들이다. 바교적순탄하게 통과할 때도 있지만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차들에 뒤섞여 갈팡질팡 길을 잃을 때도 있다. 그러다 엉뚱한 출구로 나가기라도 하면 이탈한 경로로 한참을 가다가 다음 라운더바웃을 통해 돌아온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시간이 흘러 경륜이 쌓이고 운전대가 좀 편해져 이제 어지간한 라운더바웃을 만나도 크게 당황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늘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한 가지다. 아직 진짜는 오지 않았다는 불길한 예감. 여태껏 지나온 라운더바웃들을장난감처럼 보이게 할 정도로 엄청나게 크고 난해한 인생의 매직 라운더바웃이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더이상 부끄럽게 여기지 않기로 했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그때, 나 대신 운전대를 잡아줄 절대자를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